지난 4월 종영한 SBS <가문의 영광>은 여러모로 예상과 다른 드라마였다. 이혼과 사별로 배우자를 잃은 종갓집 삼남매가 모두 새로운 짝을 찾아가는 과정은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설정이었고, 조신한 성격의 여주인공 하단아(윤정희)와 냉철한 사업가 이강석(박시후)의 만남 역시 뻔한 로맨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가족극을 가장한 여느 막장 드라마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가족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었고 단아와 강석을 통해서는 이들 각자가 대표하는 전통과 현대, 명예와 돈 등의 가치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냥, 촌스러운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가문의 영광>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정지우 작가는 회상한다. 오래 전 보았던 <종가>라는 다큐멘터리에서 100세 가까이 수를 누리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역시 늙은 아들이 진심으로 슬피 울던 모습은 특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종가라는 문화는 굉장히 특수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거나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과거의 대가족 문화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그렇구요.” 실향민으로 혈혈단신 월남했던 할아버지, 외아들인 데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그는 어머니와 삼남매뿐인 단출한 가족 틈에서 자랐다.

“아무 것도 못 가진 고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SBS <내 사랑 못난이>나 “이웃 얼굴도 모르는 아파트 문화와 달리 남편의 직위가 아내의 신분이 되는 사택 단지를 배경으로 써 보고 싶었던”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등 정지우 작가의 최근작들이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보여주었던 것은 이렇듯 그가 삶 속에서 느끼는 커다란, 혹은 사소한 고민들과 모두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 자신이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정지우 작가는 “장애인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1%도 채 안 된다는 이 나라에서 이 직업이 저에게 주어졌다는 데 무엇보다 감사해요”라는 말로 작품 안에서의 사회적 약자나 마이너리티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설명한다. 그리고 교육방송의 어린이 드라마를 포함해 방송되는 모든 드라마를 챙겨 볼 만큼 이 세계를 사랑하는 정지우 작가의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있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MBC <배반의 장미>
1990년, 극본 김수현, 연출 곽영범

“결혼하자마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7년간 간호하던 여자가 결국 재혼을 하는데 그 직후 전 남편이 깨어나는 기구한 설정의 이야기였어요. 여주인공이었던 정애리 씨가 계속 힘든 상황에 처하면서 ‘세상이, 인생이 나더러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는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저렇게 예쁘고 부자인 여자가 저러는 걸 보면 사는 게 만만치 않은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아마 그 때, 나도 나중에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찍부터 여자 혼자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며 우리를 키우셨던 어머니의 신산스런 삶 속에서도 이런 드라마들을 통한 위로가 굉장히 컸는데, 저 역시 제 드라마가 단 한 사람에게나마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美 <웨스트윙> NBC
1999~2006년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직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웨스트윙>은 작가로 태어나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이 있는 드라마에요. 특히 시즌 2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정적(政敵) 등장과 건강 문제로 재선 출마 여부를 고민하던 대통령이 옛날에 자기에게 정치라는 것을 처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던 비서의 죽음 때문에 성당에 가서 신을 향해 화를 내는 장면이 있어요. 자기가 처한 상황, 지금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 같은 것들을 토로하는 순간에 드러났던 깊이와 철학, 신념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힘은 과연 뭐였을까. 그래서 아직도 볼 때마다 항상 자괴감마저 느끼게 할 만큼 훌륭한 작품이에요.”

美 <길모어 걸스> WB
2000~2007년

“<길모어 걸스>는 80년대 일요일 아침에 방송됐던 <초원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하고 가족적인 느낌이라 좋아했어요. 카페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음식을 각자 알아서 갖다 먹을 정도의 친밀감이라던가, 모든 사람들이 마을 축제와 반상회 같은 행사에 신나게 참여하는 분위기를 보면서 ‘나도 저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저기 살면 아이들을 풀어놔도 안심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쩌면 그저 이상향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길모어 걸스>의 작가가 여행 도중 자기가 실제로 봤던 마을을 떠올리며 쓴 이야기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주인공 모녀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수다발이 숨찰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면서도 그게 바로 즐거워서 새 시즌이 나올 때마다 쉬엄쉬엄, 하지만 빼놓지 않고 챙겨 보곤 했어요.”

“그냥, 그 순간에 써야 하는 얘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정지우 작가는 다음에 쓸 이야기를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준비 했거나 가지고 있던 소재라도 소용 없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그냥, 그 순간에 써야 하는 얘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가 예로 든 것은 <내 사랑 못난이> 때의 일화였다. “당시 금요 드라마는 불륜 소재가 주를 이뤘는데 사실 저는 거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요. 한참 고민하다 조카들과 놀며 <개구리 중사 케로로>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데 가사 내용이 ‘큰 맘 먹고 세차하면 비 오고 소풍가면 소나기. 급하게 탄 버스방향 틀리고 건널목에 가면 항상 내 앞에선 빨간 불’ 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진짜 ‘재수 없는’ 사람들 얘기를 해 보면 어떨까 하다 바로 시놉시스를 썼어요.” 그리고 편성과 맞지 않는 콘셉트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 못난이>는 불륜 없이 히트한 보기 드문 금요 드라마로 남았다. 다 알고 있는 얘기처럼 보이던 것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임이 밝혀질 때의 재미는 그동안 그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그러니 다음에도 그의 작품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날지, 기대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듯하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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