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직접 제작한 상아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조각가는 그 조각을 닮은 아내가 생기길 원한다. 이에 미의 여신 비너스가 조각에 숨결을 불어넣어 조각가는 살아 숨 쉬는 상아 여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신화 중 피그말리온의 에피소드다. 이 장면이 미학의 역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생기기 전의 예술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신화의 시대엔 예술작품이 현실의 모방이 아닌,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현실의 대상과 닮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나의 믿음만으로 조각상은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실제 대상을 보는 듯 한 눈속임을 보여줄 필요가 없이 나의 감정을 ‘표현’하면 된다. 작품이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 건 이런 주술이 깨졌을 때다.

만약 자신의 예술이 무엇의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이길 바라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가 신화의 시대로 시선을 돌리는 건 당연해 보인다. 4월 9일부터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미궁-투우장의 미노타우로스 1, 다이달로스의 일생 2’展을 열고 있는 박진호는 아마 그런 예술가인 것 같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와 관련한 작업을 하다 아비뇽 인근에서 격렬한 투우를 본 그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미궁 안에 가뒀던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작업을 했다고 밝힌다. 그의 회화 속 미노타우로스는 우리가 짐작하던 모습이 아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미노타우로스는 ‘재현’해야 할 의무가 없는, 신화 속 존재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박진호가 블로그를 통해 다이달로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단 점이다. 다이달로스는 신화 속 최고의 발명가다. 이것은 최고의 주술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추락했지만. 그래서 종종 주술사이고 싶어 하는 현대의 예술가들은 다이달로스가 되길 바라는 불안한 이카로스를 닮았다.

<알렙>
1998년│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다이달로스에 의해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는 바다에서 온 흰 수소와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 사이에서 나온 반인 반수의 괴물이다. 이 괴물을 가둬놓기 위해 다이달로스는 누구도 한 번 들어오면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었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집 <알렙> 중 ‘아스테리온의 집’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왜 갇힌 지도 모른 채 미궁 속에서 고독하게 산다. ‘그 많은 놀이들 중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내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가 나를 방문하러 오고 나는 그에게 나의 집을 보여주는 상상을 한다.’ 그는 절실히 자신을 구원해줄 이를 기다렸고, 그 구원자는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은 테세우스다. 신화의 모티브는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 안에서 변주한다.

<폴락>
2000년│감독 에드 해리스

독일 출신의 추상표현주의화가 호프만은 잭슨 폴록의 작품이 모델이나 스케치 없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 “당신은 자연으로부터 작업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폴록은 “내가 바로 자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일화만 떼어놓고 보면 다분히 허세 가득한 대답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액션 페인팅’은 어떤 ‘재현’의 요구에서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힘을 다루는 주술사를 닮았다. 에드 해리스가 직접 연출과 주연을 맡은 영화 <폴락>은 이처럼 자신의 삶과 예술의 창조자로 살고자 했던 폴록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사랑에서나 예술에서나 브레이크 없이 열정적이었던 그는 음주운전으로 44세에 사망했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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