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에게 유형관은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SBS <솔로몬의 선택>에 매회 출연했던 ‘솔로몬 아저씨’, 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사장님이 바로 그다. 특히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그가 연기한 작은 광고회사의 사장 연기는 오랫동안 ‘재연전문 배우’로만 알려졌던 그의 역량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5시즌에서 회사의 인수합병으로 사장이 아닌 팀장이 된 그에게 ‘솔로몬 아저씨’도, ‘사장님’도 아닌 ‘유형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4 시즌까지 사장이었는데 이제 팀장이 됐다 (웃음)
유형관
: 요즘 한국 경제가 어려우니까. (웃음) 전에는 사무실에서도 혼자 사장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같이 섞이니까 내가 자주 나와서 좋다. (웃음) 그리고 계속 사장만 하면 할 얘기가 없지 않을까? 팀장이 되니까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된 것 같다.

“직장생활 한 적은 없고, 회사 오리엔테이션까지 간 적은 있다”

남들 눈치 안 보던 사장님이다가 이젠 이사 눈치를 보는 팀장이다. 입장이 바뀌면서 연기도 달라진 부분이 있나.
유형관
: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어차피 내 캐릭터는 회사 안에서는 큰 소리 쳐도 고객들 앞에서는 굽신거렸으니까 달라진 거라면 이제는 회사 안에서도 이 눈치 저 눈치 보게 됐다는 건데, 전처럼 화만 내고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까 더 좋다.

연기를 하기 전에 직장에서 일해본 적은 없나. 연기가 워낙 실감나서. (웃음)
유형관
: 그런 적은 없다. 다만 사는 게 너무 어려워서 직장에 다니려고 해서 회사 오리엔테이션까지 간 적은 있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에서 강사가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을 자꾸 강조하더라. 그건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라는 말이었는데, 그게 나한테는 “너는 계속 연극해라”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계속 연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연극하던 시절에도 중간 위치에 오래 있어서 위아래 사이를 절충하는데 이력이 났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팀장 연기도 거기서 나온 거다.

그런데도 직장인 연기가 굉장히 디테일하다. 특히 빗으로 벗겨진 머리를 치는 행동은 당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됐다. (웃음)
유형관
: 그건 작가들 공이다. 처음에 <막돼먹은 영애씨>에 출연할 때 내가 “가발을 쓸까요”라고 하니까 오히려 그게 괜찮다며 그런 행동을 대본에 넣었다. 제작진이 나를 계속 불러내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면서 내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시킨다. 여러모로 작가들이 고맙다. 처음에는 내 역할이 악역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날 보더니 지금처럼 캐릭터를 바꿔 줬고.

제작진은 왜 당신을 캐스팅했다고 하던가.
유형관
: 솔직히 처음 연락 받았을 때는 tvN이 뭔지도 몰랐다. 우리집은 케이블TV도 안 달았으니까. 그런데 작가들이 <솔로몬의 선택>에서 연기를 봤다고 하더라. 처음 봤을 때 너무 겸손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겸손이 기본이니까. (웃음)

<막돼먹은 영애씨> 출연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나?
유형관
: 전에는 애들이 “솔로몬 아저씨”라고 했는데, 이제는 “사장님”이라고 그런다 (웃음) <솔로몬의 선택> 3년 한 것 보다 <막돼먹은 영애씨>로 훨씬 많이 알려졌다. 들어오는 배역도 달라졌고. 예전에는 경비 같은 게 많이 들어왔는데, 이제는 얼마 출연하지는 않지만 MBC <내조의 여왕>에서 인사부장으로 출연한다. (웃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연극을 못 놓겠더라”

<막돼먹은 영애씨>전까지 ‘솔로몬 아저씨’를 하면서 (웃음) 사람들이 재연전문 배우로 알기도 했다. 실험극단에서 10년 넘게 연극을 했는데, 왜 재연배우를 한건가.
유형관
: 그러게. 나는 <솔로몬의 선택>을 3년 전에 그만뒀는데, 아직도 하는 줄 아는 사람도 있다. 1년 넘게 출연했을 때 SBS 경영진에서 감사패까지 주더라. (웃음) 재연 배우 중에는 내가 유일하게 받았다. 그런데 그 때는 그걸 해야만 했다. <솔로몬의 선택> 제작진 중에 한 분이 그 전에 날 케이블 TV 시트콤에 6개월 정도 출연시켜줬거든. 그 분이 <솔로몬의 선택>에 출연해달라는데 어떻게 안 할 수가 있나. 그러면서 별 문제가 다 생겼다. <야인시대>에 만해 한용운으로 출연할 때는 원래 잠깐 출연하는 거였는데, 출연 분량이 늘어나니까 제작진이 “한용운 이미지가 있는데 <솔로몬의 선택>에 꼭 출연해야 되냐”고 말하기도 했었다.

<막돼먹은 영애씨> 전까지 큰 비중 없는 역할만 한 건데, 힘들진 않았나.
유형관
: 뭐, 괜찮다. 나는 연기를 하고 싶은 것뿐이지 배역에 욕심내진 않는다. 요즘 나한테 1-2회짜리 말고 고정배역을 노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난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1-2회짜리를 우습게 생각하나. 예전에 SBS <홍길동>에 한 회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연출하셨던 정세호 감독님이 나한테 “유형관, 이리 와봐”하더니 “오늘 잘 해보자”라고 하셨다. 보통 한 회짜리는 감독들한테 쫓아가서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는데, 그 분은 나를 알아봐 주신 거다. 그래서 기분 좋게 연기를 했더니 작가가 연기 잘 봤다며 5-6회 더 출연시켜줬다. 그 때 드라마 쫑파티라는 것도 처음 가봤다. 한두 회짜리는 쫑파티에 불러주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된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유형관
: 나야 건방지려야 건방질 수 없는 입장이니까. 숙이면서 살다보니까 잘 봐주는 것 같다. TV출연도 그렇게 하게 됐다. 실험극단에서 연극할 때 탤런트 윤승원 선배를 알게 됐는데, 나 사는 게 불쌍했는지 자기가 차린 극장에 날 불렀다. 한 달에 90만 원씩 줄테니까 연기도 하고 극장일도 보라고. 내가 실험극단에서 10년 동안 받은 돈이 천만 원이었는데, 한 달 90만 원씩 받으니까 충격이지. (웃음) 그런데 몇 년 뒤에 극장이 어려워져서 내가 윤승원 선배에게 덕분에 돈도 모았으니까 앞으로 돈을 안 받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윤승원 선배가 고맙다며 <사랑은 생방송>이라는 시트콤에 출연시켜줬고, 그걸 계기로 <토요 미스테리>나 <우째 이런 일이>같은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일을 하게 된 거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왜 연극을 놓지 못했나.
유형관
: 그냥 안 되더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것 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걸 할 바엔 내가 고향 가서 장사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죽을 때까지 연기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연기의 어떤 부분에 끌린 건가.
유형관
: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 부모님 몰래 가출해서 아동극단 시험도 쳐봤고, TV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부 선생님이 내 담임이었는데, 그 분이 좀 문제 있는 애들한테 연극을 시켰다. 사실 나도 큰 사고는 안쳤지만 약간 놀았는데 (웃음) 그 분이 담임이 되니까 내가 그런다는 걸 안거다. 그래서 나한테 연극을 하라고 했고, 첫 작품부터 주인공을 시켰다. 그러다 학교 축제 때나 크리스마스 때 무대에 올랐는데, 내가 살던 곳이 시골이다 보니까 한 작품 하고나서부터 버스에서 “쟤, 쟤”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 때는 그 맛에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연기하는 걸 좋아해도 주인공은 할 수 없었는데, 불만은 없나.
유형관
: 그거야 뭐… 결혼 전에는 배고파도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혼 하고 나니까 당장 생활을 해야겠더라. 연기에 대한 갈등보다는 나를 불러주면 뭐든 다 하면서 생활을 꾸리겠다는 게 커졌으니까. 그래서 방송에서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많이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실 아내는 내가 연극하는 사람이라서 결혼한 건데,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연극에 거의 출연 못하게 됐다.

연극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었다고?
유형관
: 아내를 만난 것도 문예회관에서 직원으로 있는 아내 친구의 소개로 만난 거였다. 그 때 아내는 애니메이션 일을 했는데, 나보다 돈도 훨씬 잘 벌었다. 연극하는 사람이 가난하다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자기가 연극을 좋아하고, 연극하는 사람이 자기하고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아서 결혼하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결혼하면서 연극을 못하니까 뭐라고 하는데, 속으로는 그리 나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활을 책임지니까.

경제적으로 가정을 꾸리는데 문제가 없나.
유형관
: 아내가 2년 전까지 일을 하기도 했고, 갈수록 생활이 안정 됐다. 사실 일이 없을 때는 내가 일주일에 3일쯤 쉬면서 애들을 돌봤는데, 그 때는 내가 엄마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내가 일도 잘 안되고, 애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관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애들하고 많은 시간을 가진 게 참 다행인 것 같다. 나하고 애들 사이가 가까워졌으니까. 지금도 애들은 내가 보라는 프로그램만 본다. 그래서 <막돼먹은 영애씨>도 안 보고, <꽃보다 남자>는 안 보면 학교에서 대화가 안 된다고 해서 보여주고. (웃음) 그렇게 집안이 안정되니까 밖에서 일이 힘들어도 뭐든 해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7남매의 막내였는데, 그 때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각자 살다시피 했었다. 그래서 참 외로웠는데, 지금 나는 가족들 때문에 행복하게 산다.

그렇게 꾸준히 연기를 하면서 생긴 당신의 인생관은 무엇인가.
유형관
: 내가 인터넷에서 쓰는 아이디가 ‘fade in’이다. 서서히 가겠다는 거다. 어차피 늦었는데 급하게 갈 필요 있나. 늙어죽을 때까지 연기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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