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에리뜨’였다.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도, 선생님 말씀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함께 사는 할머니를 따라 드나든 동네 경로당에서 민화투와 고스톱을 배우며 자랐지만 학교 수업 시간에는 한 번도 자 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시키는 숙제는 꼬박꼬박 다 해 갔고 공부보다는 음악, 체육이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였지만 장래희망은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학생이 제일 편한 거다”라는 말을 들은 다른 친구들이 “그게 뭐야?”라며 코웃음 쳐도 소녀는 속으로 ‘맞아, 맞아’를 외쳤다. 아버지의 일터에 따라 나갔을 때 평소 그렇게 커 보이던 아버지가 남들에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며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갈 때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주목 받는 걸 좋아했고, 발표 할 때마다 인기를 끄니 학생들도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교단에 서는 선생님이 되기로 했고,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뒤에는 복수 전공에 장학금까지 받다가 졸업반이 되었다. 그리고 소녀는 임용고사를 준비하러 노량진 학원가로 갔다.

모범답안 에리뜨, 독한 연애술사가 되기까지

여기까지다. KBS <개그 콘서트>(이하<개콘>)에 등장하기 전 박지선의 인생은. 스스로 “필기만 잘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주입식 교육의 에리뜨였다”고 회상하는 박지선은 임용고사 공부 한 달 만에 학원을 뛰쳐나왔다. ‘남들은 자기가 선택해서 공부하는 거지만 나는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왜 이걸 붙잡고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나마 제가 배운 게 마이크 들고 나와서 학생들 다루는 거니까 그 일하고 비슷한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해볼까 해요”라는 ‘궤변’으로 부모님을 설득했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반대를 대비해 2안, 3안까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평생 성실한 학생이었던 딸의 주도면밀한 제안에 부모님이 넘어갔고, 박지선은 KBS 개그맨 22기 공채에 ‘덜컥’ 합격했다.

그 이후의 박지선은 물론 우리가 보아 온 박지선이다. <개콘>의 ‘삼인삼색’에서 ‘성형전’도 ‘성형후’도 아닌 “부작용이올시다!”라며 당당히 데뷔했던 그는 “외국 갔다 돌아오니 남자친구가 공항에 퇴치 부적 들고 서 있더라” “내가 허들 넘는데 코치 양반이 불붙여 놨더라” 라는 독한 자학 개그를 선보임과 동시에 “왜 이래? 나 생닭 들고 사파리에서 조깅하는 여자야!” “나 봉춘 서커스에서 호랑이 대신 불타는 훌라후프 뛰어 넘는 여자야!”라며 불굴의 능청스러움을 만방에 떨쳤다. 미모가 출중하지 않은 탓에 왕의 승은을 입지 못하는 눈칫밥 신세의 원빈으로 등장한 ‘조선왕조부록’에서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관과 상궁을 “불꽃 싸다구”로 다스리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궤변을 늘어놓는 ‘봉숭아 학당’의 여성학자를 거쳐 최근에는 연애술사 캐릭터로 변신한 박지선은 “지금, 황금 같은 주말 저녁에 집구석에서 개콘을 보고 있는 우리 여성분들, 우린, 우린, 바로 당신, 우린! 틈새시장을 노려야 합니다!”라며 나와 너를 아우르는 솔로 탈출의 솔루션을 제공한다.

화장도 분장도 필요없는 진짜 멋쟁이

그리고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은 캐릭터들을 벗어 버리고 <개콘> 밖으로 나온 박지선은 또 다른 자기만의 영역을 만드는 중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비주류 음악을 들려주는 심야 라디오의 애청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소개하며 개그 팬들 뿐 아니라 음악 팬들과도 소통한다. “연예인이 되고 나서 제일 좋은 건 다른 연예인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박지선은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 천국>에 ‘마성의 여자’ 대표로 출연했고 M.net <샤이니의 연하남>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학창시절부터의 아이돌 사랑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아이돌의 이모’임을 자처해 아이돌 팬들로부터 “내 마음과 똑같다”는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할머니의 치부책, 개그맨보다 더 웃긴 오빠 등 평범한 듯 보이지만 독특한 가족사 역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박지선이 <개콘>의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자기 세계가 분명하지만 수더분하고 엉뚱한 20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교단에 오르는 대신 무대에 서기로 했던, 많은 사람들이 꿈꾸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용감한 결정의 결과다.

박지선은 2007년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지난 연말에는 여자 코미디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뒤 “피부 트러블 때문에 화장을 하지 못한다. 20대 여성이 화장을 못해 예뻐 보일 수 없어 슬퍼하기보단, 개그맨이 분장을 못해 더 웃길 수 없다는 것에 슬픔을 느끼는 개그맨이 되겠다”라고 말해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최근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보 분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얼굴의 멋쟁이 개그맨 지선” 꿈을 찾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왔고,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도 기죽지 않고 웃어넘기는 스물여섯의 개그맨 박지선, 그래서 그는 진짜 멋쟁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