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손예지 기자]
[TEN 인터뷰] 영리한 래퍼 루피 “심오하진 않지만 실험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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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EP 음반 <퀘스천즈(QUESTIONS)>를 발표한 래퍼 루피. / 사진제공=메킷레인 레코즈

래퍼 루피(Loopy)는 2016년 힙합 레이블 메킷레인 레코즈(MKIT RAIN RECORDS, 이하 메킷레인)를 만들었다. 미국 LA를 기반으로 함께 활동한 한인 래퍼 나플라·블루가 창립 멤버다. 이후 오왼 오바도즈·영 웨스트를 영입했다. 이들의 음악은 LA 힙합과 한국 힙합 사이에 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자(中間子)로서 각 신(scene)의 장점을 흡수해 자신들만의 색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루피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미국과 한국의 음악시장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까지 파악하고 비교한다.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만큼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믹스테이프(Mixtape, 비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해 무료 배포하는 곡이나 음반)를 중심으로 시장이 활성화된 미국의 트렌드를 반영해 만든 것이 지난달 공개한 EP 음반 <퀘스천즈(QUESTIONS)>다. 루피는 “심오하진 않지만 실험적인 음반”이라고 소개했다.

10. 이번 EP 음반은 선 공개 싱글 <몰라(MOLLA)>와 <왓 아이 원트(WHAT I WANT)> <지금 어디야(Feat. DOPE’DOUG)> 등 타이틀곡이 세 곡인데 이유가 있나요?
루피: 제 마음속 타이틀은 <몰라>였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음반 전곡을 아우르는 타이틀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힙합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왓 아이 원트>와 대중적인 <지금 어디야> 사이에서 고민했죠. 결국 세 곡을 모두 타이틀로 선정했어요.

10. 독특한 사전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죠. <지금 어디야> 피처링에 참여한 래퍼를 콘테스트를 통해 선발했다고요?
루피: 루피라는 래퍼가 힙합 팬들 사이에서 반응을 얻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획한 이벤트에요. 요즘은 힙합을 즐겨듣는 사람들이 랩도 해요. ‘오픈 벌스(Open verse, 곡의 벌스를 맡아 부를 래퍼를 뽑는 공개 오디션)’를 열면 재밌겠다 싶었죠. 500여 명이 참여했어요. 보내준 데모를 전부 듣느라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어렵지는 않았어요. 선정 기준이 확실했거든요. 곡을 해석하는 방식이 나와 다른 사람을 뽑고자 했어요. 비트에 맞는 랩을 하는 게 아니라 비트와 악기, 멜로디와 분위기를 이해하고 해석할 줄 아는 래퍼, 그리고 그 방식이 저와는 다른 친구를 선정했습니다. 선정된 DOPE’DOUG에게서 제 음악을 통해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어요. 고마웠죠. 이 친구와 함께 공연하고 싶어요.

10. <퀘스천즈> 음반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습니까?
루피: 특정한 철학이 담긴 음반은 아니에요. 요새 미국에서는 래퍼들이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떠요. 사운드 클라우드에 무료 공개 곡을 올리고 재생 수가 100~200만 회를 넘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면 공식 음원을 내는 거죠. 사운드 클라우드 음원은 15초 미리 듣기로 바꾸고요. 자본을 들여서 만든 음반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시대가 지났다는 뜻이에요. 자신의 작품을 미리 보여주고 사랑받았을 때 정식으로 출시하는 겁니다. 요즘은 곡을 제작하고 소비되는 패턴이 굉장히 빠르잖아요. 하루에 수십 개의 신곡이 나오는데 다음 날이면 인기가 떨어지는가 하면, 한 곡의 재생 시간도 점점 줄어들어요. 이게 지금의 흐름이에요. 이런 느낌의 곡들을 만들어 묶은 게 <퀘스천즈>예요. 전곡을 관통하는 철학은 없지만 곡을 만들면서 느낀 고뇌는 담겼죠. 음악 스타일도 쏘아붙이는 랩, 잔잔한 스타일 등 여러 가지를 모았어요. 심오하지는 않지만 실험적인 음반이에요.

10. 결과물에 대해 얼마큼 만족하나요?
루피: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전에 다른 인터뷰에서 ‘내 음반, 구리다’고 했다가 질타를 받았거든요.(웃음) 미국 크루 오드퓨처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 ‘나 지금 음반 만들고 있는데 구려. 그런데 그게 지금의 나야. 앞으로 더 좋은 거 만들면 되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위트 있지 않아요? 저도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그게 잘못 전달된 것 같더라고요. 팬들이 ‘루피는 자기 음악에 자신감이 없다’고 생각하던데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쉽게 만족하는 편도 아니고요. 이번 음반도 마찬가지예요.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이 남는 음반이라 별 두 개 반을 줬습니다.(웃음)

10. 지난해 나플라와 함께 서태지 데뷔 25주년 기념 리메이크 프로젝트 <타임:트래블러(TIME:TRAVELER)>에 참여했죠?
루피: 가문의 영광입니다.(웃음) 굳이 설명 안 해도 다들 알 거예요. 서태지 선배가 (리메이크 참여 가수로) 직접 우리를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취감을 느꼈어요. ‘인터넷 전쟁’을 리메이크했는데 15분 만에 작업을 마쳤어요. 나플라가 먼저 훅(hook)을 짰어요. 술 먹고 노래방에서 막 스트레스 풀 듯 쏟아내는 느낌의 노래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저도 거기에 맞춰 얼른 가사를 썼죠. 즉흥적인 에너지로 탄생한 곡이에요. 수정 작업을 거친 다음 서태지 선배에게 보냈는데 만족스럽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어요.

10. 이를 계기로 서태지의 단독 콘서트에도 게스트로 올랐는데 어땠습니까?
루피: 서태지 선배의 팬들이 우리를 ‘우쭈쭈’ 해주더라고요.(웃음) 인상 깊었던 것은 사운드였어요. 음향 시스템이 정말 미쳤어요! 그런 환경에서 랩을 해 본 게 두 번째였거든요. 첫 번째는 일본에서 열린 힙합 페스티벌이었고요. 좋은 환경에서 공연하면 내가 아니라 마이크가 랩을 하는 기분이 들어요. 입만 뻥긋해도 소리가 잘 퍼지니까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10. 언제부터 힙합에 관심을 가졌나요?
루피: 힙합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처음 좋아한 아티스트가 팔로알토 형이에요. 당시에 뉴욕에서 살다 온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힙합 공연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간 게 팔로알토 형 공연이었어요. 거리 공연이라 관객이 두어 명뿐이었어요. 그때 저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 멋있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그 시기에 다이나믹 듀오가 발표한 1집 앨범을 듣고, 에픽하이·주석·데프콘·강나그네(현재 활동명은 재지 아이비)·인피니트 플로우의 노래를 들으며 힙합에 빠져들었어요. 입대 후에는 외국 힙합을 들었어요. 릴 웨인·제이지… 그러다 2010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공부를 안 했어요. 평균 학점이 2.0이 안 됐으니까요.(웃음) ‘어떻게 하지?’ 하다가 음악을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오디오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서 관련 학교를 준비했는데, 온라인에 공개한 <기어 2(GEAR 2)> 라이브 영상이 빵 터지면서 입학을 미루고 음악에 집중했습니다.

루피는 ‘LA에서 활동하는 한인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려고 레이블 메킷레인을 설립했다. / 사진제공=메킷레인 레코즈
루피는 ‘LA에서 활동하는 한인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려고 레이블 메킷레인을 설립했다. / 사진제공=메킷레인 레코즈
10. 메킷레인은 ‘LA 한인힙합’을 국내에 알린 레이블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루피: LA에는 ‘한인 힙합’ 신이 존재하지 않아요. 소비자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LA에서 랩을 하는 한인이었던 거고요. 국내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LA의 문화를 들고 오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LA에서는 제가 길거리에서 랩을 하면 흑인들이 와서 비트를 넣고 춤을 춰요.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흑인 점원에게 햄버거를 하나 주문할 때도 힙합이 느껴져요. 우리나라에서는 홍대에나 가야 조금 자유로운 편이잖아요. LA에서 우리가 느낀 것, 그곳에서 형성한 우리의 정체성을 전달하고자 만든 게 메킷레인이었어요.

10. 장르나 기술의 차이와는 다른 차원이네요.
루피: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으로 예를 들어볼게요. 게임 안에서 춘리라는 캐릭터를 만나면 배경 그림이 춘리의 것으로 바뀌어요. 우리가 국내 힙합 신에 등장했을 때 그런 배경 그림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그걸 주로 뮤직비디오를 통해 표현했고요.

10. 앞서 미국 음악 시장의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국내 시장의 트렌드는 어떤 것 같나요?
루피: 어려워요. 여전히 배우고 있어요. 결국은 그 싸움인 것 같아요. 제 음악이 스윙스 형의 음악보다 좋은지 안 좋은지의 문제가 아니라 박효신 선배의 음악보다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요.

10. 장르의 구분 없이 경쟁하는 시스템이란 말이죠?
루피: 맞아요. 제가 어떤 노래를 만들었어요. 동생들이 ‘형 노래 진짜 좋다’고 칭찬해줘요. 그런데 그게 음원차트 100위 안에 못 들면 실패하는 곡이 돼요. 그렇다 보니 좀 더 알려진 가수의 음악을 소비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제가 느낀 바로는 방송의 영향력이 커요. 그렇다 보니 제 음악을 알리는 일 자체가 참 어렵네요.

10. 국내에서는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 ‘고등래퍼’ 등 힙합 서바이벌이 한동안 유행이었는데 본 적 있나요?
루피: ‘쇼미더머니’는 시즌5를 관심 있게 봤어요. 메킷레인 일을 봐주는 지인이 비와이의 친구였거든요. 챙겨보지는 않지만 중요한 이슈는 다 알고 있어요. 요즘은 시즌6의 우원재가 인기라더라, 이런 것이요.(웃음)

10. 또 관심을 두는 아티스트가 있다면요?
루피: ‘고등래퍼’에 나오고 있는 빈첸(이병재)이요. 방송 전에 SNS에 올린 영상을 봤는데 곡이 좋더라고요. 앞으로 지켜보고 싶어요.

10. 자신에게 메킷레인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루피: 제 신조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신경 쓰는 것이 메킷레인이에요. 제 삶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커요. 그 정도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10. 음악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루피: 명곡을 남기고 싶어요. 그 누구도 토를 못 다는 명곡이요. 퀸·너바나·마이클 잭슨처럼 언어와 시공간의 장벽을 뛰어넘고 전 인류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터무니없게 들리죠? 그런데 이게 제 목표예요.

10. 자신에게 힙합이란?
루피: 선생님? 한국에서 고교과정까지 마친 뒤 미국에 가서 힙합을 배웠어요. 힙합은 라이프 스타일 자체였어요. 한국에서 정답을 맞히기 위해 남들을 따라가고, 또 남들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배운 데 반해 미국에서는 힙합을 하며 내가 남과 다름으로써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에요. 힙합은 단순히 체제에 저항하거나 멋을 부리고 돈을 자랑하는 차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귀를 기울이고 내 삶을 그리는 데 의미가 있는 장르예요.

10.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요?
루피: 올해 정규 음반을 내는 게 목표고요. 그 음반이 만족스러웠으면 하는 게 또 다른 목표에요. 또 메킷레인의 컴필레이션 음반도 준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10.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루피: 요새 날씨가 아름다워졌잖아요. <퀘스천즈>에 아름다운 노래를 목표로 만든 트랙들이 꽤 있어요. 요즘 같은 날씨에 들으면 어울릴 것 같아요. 많이 들어주세요. 하하.

손예지 기자 yeji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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