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폰부스 클럽에프에프 공연 2010년
이상민 폰부스 클럽에프에프 공연 2010년
(PART3에서 이어짐) 밴드 폰부스는 더블 기타 시스템이다. 리드기타 김태우와 더불어 선한 인상이 신뢰감을 주는 이상민은 폰부스 음악에 풍성한 기타 사운드를 제공하는 리듬 기타리스트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밴드 라인업을 구축했던 초창기에 그와 성과 이름이 같은 드러머가 한 명 더 있었다는 점이다. 밴드에 같은 이름의 멤버가 두 명이 있었기에 멤버들은 기타리스트 이상민은 그대로 이름을 부르고 게임제작과 3기 후배인 드럼 이상민은 ‘삼상민’ 혹은 ‘가죽을 때린다’는 의미의 ‘타피’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이상민은 자동차사업을 하셨던 집안에서 2남 중 막내로 1985년 12월 4일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차분하고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말도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였다. 역사만화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은 접할 기회도 관심도 없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IT분야의 인재들이 각광을 받던 시대였다. 동네 컴퓨터 학원에 다녔던 형의 영향을 받아 이상민은 알파벳도 몰랐던 아홉 살 때부터 컴퓨터를 익혔다. 11세 때는 BASIC으로 아들을 키우는 ‘황제 만들기 게임’을 직접 만들어서 PC통신 천리안에 올려 1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던 컴퓨터신동이었다. 그의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면 장래희망이 ‘프로그래머’로 표기되어 있고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컴퓨터게임제작과에 진학한 이유다.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이상민은 많은 친구들과 교류를 하면서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상민 중학교 졸업앨범 사진 장래희망 프로그래머
이상민 중학교 졸업앨범 사진 장래희망 프로그래머
폰부스 멤버 중 같은 과 김태우와 먼저 친해졌다. 자연스럽게 당시 김태우와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기타를 잘 다뤘던 심화수도 알게 되었다. “태어나서 실제로 기타 치는 모습은 그때 처음 봤습니다. 그 전까지는 솔직히 기타 줄이 몇 개인지도 몰랐습니다.”(이상민)

그 친구들이 보던 록밴드 메탈리카 영상을 훔쳐보고 반한 것이 화근이었다. 메탈리카의 노래를 기타로 근사하게 치고 싶어 기타를 메고 앉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기숙사생활을 하다 보니 부모님은 제가 기타를 치는지 몰랐어요. 당시 게임제작대회에 나가 상금을 탔는데 기타를 사는데 썼다고 말씀드리자 충격을 받으시더군요.”(이상민)

이상민(가운데) 고등학교 졸업여행 제주도에서 태우 광선 한이 함께 했다
이상민(가운데) 고등학교 졸업여행 제주도에서 태우 광선 한이 함께 했다
이상민(가운데) 고등학교 졸업여행 제주도에서 태우 광선 한이 함께 했다

친구 김태우와 심화수, 홍광선이 활동하는 스쿨밴드 ‘내려가’에서 기타를 치던 친구가 전학을 가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경쟁자가 없어서 그냥 들어갈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인지 거창하게 큰 강당에서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습니다.”(이상민) 그때부터 밴드의 매력과 공연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취미수준으로 기타 연주와 밴드 활동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컴퓨터공학과에 합격하면서 밴드 멤버들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더 즐거운 생활을 기대했지만 한학기만에 대학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교를 다녀서인가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생활보다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대학친구들과는 마음에 맞는 친구가 없었고 얘기도 잘 통하지도 않았습니다. 학점경쟁이 치열한 대학문화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방황을 했습니다.”(이상민)

그때 홍광선이 “밴드를 제대로 해보자”고 연락을 했다. 대학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던 차에 너무나 즐거운 제안이었다. 결국 한 학기 만에 휴학을 했다. 당시 이상민은 메탈리카, 아이언 메이든을 넘어 멜로딕 데스메탈까지 메탈 음악을 섭렵했었다. 홍광선이 밴드 오아시스의 영상을 보여줬다. “처음엔 재미없어서 졸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이상하게 오아시스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더군요. 결국 오아시스의 음악에 빠지면서 브릿팝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 분노하는 성격이 아닌데 메탈을 듣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상민) 메탈에서 브릿팝으로 취향이 바뀌자 메탈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아시스, 스웨이드, 펄프 등 90년대 브릿팝에 완전히 빠져든 이상민과 홍광선은 “한국의 오아시스가 되자”는 결의를 했다.
이상민 2009년 프리버드 폰부스 공연1
이상민 2009년 프리버드 폰부스 공연1
당시 물과 가스도 나오지 않아 난방도 안 되는 방배동 지하실 합주실에서 홍광선과 함께 기거하며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씻지도 못하는 곳에서 두 사람은 살기 위해 머리를 삭발을 했고 PC방 알바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초기엔 음악적 재능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처음 결의할 때는 광선이는 리암갤러거, 저는 노엘갤러거가 되어야 했지만, 둘 다 그럴 능력이 못되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조금씩 음악적으로 발전을 했고, 알아주는 곳도 생겼지만,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이상민)

이상민 2006년 태국 팻 페스티발 무대 공연 모습
이상민 2006년 태국 팻 페스티발 무대 공연 모습
이상민 2006년 태국 팻 페스티발 무대 공연 모습

김태우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폰부스는 2005년 8월 클럽FF에서 첫 공연을 했다. 이후 베이스 박한과 드럼 최민석으로 멤버교체가 이뤄졌다. 공대생 이상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인터넷 검색 실력을 발휘했다. 단지 검색만으로 해외 프로모터와 레이블 관계자들의 이메일과 연락처를 찾아내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해 해외 공연을 타진했다. 2006년 태국, 2007년 대만, 일본 공연이 성사되었다. “해외 공연을 다녀오면서 저희 밴드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고 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크게 되었습니다.”(이상민) 휴학기간이 끝나자 이상민은 복학을 했다. “부모님은 밴드를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하길 원하셨지만 그럴 수가 없어 대학을 다니면서 밴드생활을 계속했습니다.”(이상민) (PART5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이상민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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