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영
여준영
가끔 상상한다. 여준영이라는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하고.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도 ‘소셜 네트워크’ ‘행복을 찾아서’와 같은 흥미로운 비즈니스 영화 한 편이 등장하지 않을까? (영화의 제목으로 ‘PR의 달인’을 추천하는 바다.) 아, 소개가 늦었다. 지금 거론되고 있고 있는 여준영, 그는 2000년 직원 달랑 3명으로 시작한 회사를 10여 년 만에 국내 1위의 PR기업으로 성장시킨 PR컨설팅 그룹 프레인의 대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김연아, 박지성 등이 이 남자를 거쳐 갔다고 하면 어떤 인물인지 조금 더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다.

물론 여기까지였다면 그의 인생이 영화소재로 그리 흥미롭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이야기에 눈길이 가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 다음. 2005년 프레인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의 행보 때문이다. 돌연 대표직을 내려놓은 여준영 대표는 영화와 매니지먼트(류승룡 김무열 문정희 오상진 문지애 등이 소속 돼 있다)사업을 시작으로 문화콘텐츠 전반에서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어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잉투기’의 마케팅을 책임지고 나섰다. 여준영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 그 어느 때보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Q. 배우 매니지먼트를 시작으로 외화 수입과 영화 마케팅까지. 이제 영화를 제작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여준영:
안 그래도 준비 중이다.(웃음) 정지우 필름과 의기투합해서 영화 6편을 만들기로 했다. ‘진루타 프로젝트’라고 정지우 감독님이 영화의 퀄리티를 책임지고, 내가 돈과 마케팅을 담당한다. 지금 감독을 발굴중인데, 신인이 될 수도 있고 기성이 될 수도 있다. 정지우 감독님이 그 중 한두 편을 연출할 수도 있고.

Q. 왜 ‘진루타 프로젝트’인가?
여준영:
나와 정지우 감독님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감독과 스태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진루타’라고 지었다. 야구에서 진루타가 그런 거잖아. 자기가 죽더라도 주자는 내보내는. 지금 한국영화를 보면 독립영화 아니면 블록버스터다. 중간 영화가 없다. 좋은 영화를 합리적으로 만들어보자는 게 우리의 바람이다.

Q. 당신의 행보는 늘 예상보다 한 걸음 앞서간다.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뭔가?
여준영:
세상에는 굉장히 좋은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안 팔리는 것들이 많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들이 말이다. 마케팅 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런 걸 보면 굉장히 속상하다. PR하는 회사 꿈의 끝은 그런 것들, 그러니까 브랜드는 있는데 제품력이 없는 기업들을 인수해서 직접 비즈니스 하는 거라고 봤다. 영화는 그 꿈의 연장이었다. 기업을 인수하려면 몇 백억이 드는데 영화는 1,00만 원부터 몇 억 까지 다양하니까 접근이 용이했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우리가 직접 알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외화 수입이었다.

Q. 그 첫 작품이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50대 50’일테고.
여준영:
맞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몇 년 전에 ‘파수꾼’ ‘무산일기’ ‘혜화,동’을 연이어 관람한 날이 있다. 너무 좋았다. 그런데 세 영화가 동원한 관객 수를 다 합쳐도 6만이 안되는 게 아닌가. ‘파수꾼’이 2만 명 조금 넘고, ‘무산일기’와 ‘혜화,동’이 2만 조금 안됐다. 그걸 보면서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큰 영화들은 시사회만 해도 몇 만인데… ‘저걸 내가 홍보하면 블록버스터처럼 몇 백만은 못 가도 10만은 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Q. 독립영화에서는 2만이면 ‘대박 났다’고 한다.
여준영:
그런 생각 자체를 깨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했는데, 배급이나 제작은 내 영역이 아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내 임무라고 느꼈다.

Q. 그런데 아무리 마케팅을 잘 해도 상영관이 없으면 흥행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여준영:
처음 ‘50대 50’을 수입할 때는 그걸 몰랐다.(웃음) 배급 메커니즘을 전혀 몰랐기에 ‘50대 50’을 홍보하면서 굉장히 많이 놀랐다. 영화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이건 해 보니까 아트가 아니라 배급싸움이었다. 영화라는 게 재미없는 비즈니스구나 싶었다. 실망? 실망이라기보다는 이걸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준영
여준영
Q. 그래서 ‘잉투기’에 참여한 건가? ‘잉투기’는 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이다.
여준영:
이전부터 영화아카데미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파수꾼’도 영화아카데미 작품이고 하니까. 그러던 중에 정지우 감독님으로부터 ‘잉투기’라는 영화가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 아카데미의 초청으로 편집이 덜 끝난 졸업 작품들을 보게 됐는데, 좋더라. ‘파수꾼’은 이례적인 케이스고, 원래 영화아카데미는 졸업 작품 4편을 묶어서 개봉한다. 그런데 아카데미로부터 ‘잉투기’는 단독으로 개봉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같이 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CGV 무비꼴라쥬와 함께 뭉치게 됐다.

Q. 많은 아카데미 졸업 작품 중에 왜 ‘잉투기’였나.
여준영:
졸업 작품 네 편중에 세 편을 봤는데, 그 중 ‘잉투기’가 가장 상업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1호가 ‘잉투기’일 뿐 나머지 영화들도 개봉을 할 거다. 어떤 식으로 할지 아직 정해진 바는 없는데, 프레인이 재능기부를 하든 뭘 하든 해서 나머지 졸업 작품들도 함께 할 계획이다.

Q ‘잉투기’가 개봉하는 과정을 보면 과정과 결과 중 어떤 게 더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여준영:
‘잉투기’의 경우 과정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출발이 가장 중요한 영화다. 이게 첫 케이스이니 말이다.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먼 훗날, 이런 시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은 바람은 있다.

Q. ‘잉투기’는 엄태화 감독과 그의 동생인 배우 엄태구가 주연을 맡은 영화다. ‘류승완-류승범’ 형제의 닮은꼴 영화로 홍보되고 있던데.
여준영:
마케팅 포인트가 많은 영화가 아니다. 스타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감독도 신인이고. 그래서 정공법대로 ‘좋은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는 것에서 출발하자!’로 의견을 모았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잉투기’ 같은 스타일의 영화는 없었다고 본다. 어설프게 교훈을 주거나, 무조건적인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미화하지 않고 보여주는데, 그 지점에서 작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Q. 기자들 사이에서 당신의 홍보방식이 거론될 때가 있다. 정성이 담긴 메일을 직접 써서 보낸다든지, 배우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적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모든 일의 근간은 인간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준영:
일단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건 홍보를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홍보하자는 주의인데, 그랬을 때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나. 진심을 담는 방식 중에는 딱딱한 것보다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더 맞다고 본다.

Q. 그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하는 건데.
여준영:
부지런하거나 절실하거나!(웃음)

Q.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깝나?(웃음)
여준영:
부지런한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을 잘 못 챙긴다. 전화를 안 받아서 끊어진 인간관계도 상당하다. (핸드폰 보여주며) 지금 확인 안 한 문자만 123개다.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Q. 사람 관리를 굉장히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다. 왜, 당신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있지 않나. 회사 직원들을 위해 여성용 구두와 남성용 수트를 만든 일화 말이다.
여준영:
평소에 잘 못 챙기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렇게나마 내 마음을 전했던 거지. 그게 효율적이기도 하고.(웃음)

Q. 수입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50대 50’도 그렇고 두 번째 수입 영화 ‘아워 이디엇 브라더’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들이다. 뭔가 좋은 영화를 찾아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여준영:
프레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작품인데 아무 영화나 수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심끝에 선택한 첫 영화가 ‘50대 50’이었다. ‘아워 이디엇 브라더’의 경우 프레인 무비가 정기성을 갖게 됐다는데 의미가 있는 영화다. ‘50대 50’만 봐서는 프레인이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기 힘들잖아. 그걸 완성시켜 준 게 ‘아워 이디엇 브라더’였다. 착하고 좋은 영화들을 앞으로도 선보일 예정이다.

프레인이 마케팅하는 ‘잉투기’와 프레인의 세 번째 수입 영화 ‘머드’’
프레인이 마케팅하는 ‘잉투기’와 프레인의 세 번째 수입 영화 ‘머드’’
프레인이 마케팅하는 ‘잉투기’와 프레인의 세 번째 수입 영화 ‘머드’’

Q. 세 번째 수입 영화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여준영:
‘머드’라고 로튼토마토에서 99%를 받은 영화다. ‘그래비티’가 97%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다. 그런데 이 영화도 미국에서는 독립영화다. 언젠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만든 리얼라이즈픽쳐스 김호성 대표와 밥을 먹다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영화에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주 오래시간 꾸준히 해서 독립영화계에 대부는 되고 싶다”고.(웃음) 그랬더니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이 있다며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 분은 B급영화의 대부라는데, 한 번 만나볼 생각이다.(웃음)

Q. 정지우 감독님과 함께 하는 ‘진루타 프로젝트’의 경우 독립영화보다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영화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여준영:
맞다. 정지우 감독님이 꿈꾸는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데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거다. 그게 대자본이 들어간 영화에서는 만들기 쉽지 않다. 너무 소자본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의 경우 관객들이 외면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중간에서 타협을 보고 싶은데, 문제는 기업들이 중간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거다. 사라진 중간시장을 활성화 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Q. ‘잉투기’는 잉여들의 투쟁기라고도 볼 수 있다. 과연 여준영이라는 사람에게도 잉여 시절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여준영:
젊은 친구들이 쓰는 ‘잉여’와는 다른 해석일지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에 ‘잉여’에는 자발적인 잉여와 수동적인 잉여가 있는 것 같다. 그랬을 때, 내 경우 자발적인 잉여였던 적은 없었다. 잉여라는 게, 시간이 할 일 보다 많은 상태이지 않나.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 없이 존재만 있는 상태 말이다. 나는 굉장히 오랜 기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대학 때의 나는 목표나 꿈이 없었다. 당시 운동권이 활발했는데 그런 참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렌지족들처럼 즐긴 것도 아니고. 중간에 서서 매일매일 과외를 했다.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멍하니 살다가 군대를 다녀와서 졸업을 했는데, 학점이 너무 안 좋다보니 원하는 곳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첫 직장도 성적을 보지 않은 곳이었다.(웃음) 환경이 나에게 할 일을 주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었고, 해야 할 일만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Q 지금은 어떤가? ‘잉여’ 시간이 있나?
여준영:
지금은 로망이지, 로망!(웃음) 잉여로울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결국 가치를 못 만들어내고 할일이 없어서 헤매는 사람이나, 할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나 불행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Q. 잉여 시간이 주어져도 마음 편히 즐기는 스타일은 아닐 것 같다.
여준영:
맞다. 아무것도 안할 때는 또 불안함을 느낄 테니까.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일이 너무 많아서 자기를 잃고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무것도 안 할 때의 불안함’과, 당장 직업이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무 것도 안 했을 때의 불안함’. 그 두 개가 완전히 다른 얘기인데 나는 두 쪽을 다 살아본 셈이다.

Q. 두 쪽 다 살아본 입장에서 어떤가. 그래도 전자가 낫나?(웃음)
여준영:
꼭 그렇지도 않다.

Q. ‘잉투기’의 주인공들, 넓게는 많은 20대들이 느끼는 불안은 후자에 가까울 거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 말이다.
여준영:
그런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나이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 같다.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도,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인지 모른다. 정체되면 안 된다는 불안함이 깔려 있으니까 여러 일을 벌이는 게 아닌가 싶다.

Q. 그렇다면 2005년에 프레인 대표직을 내려놓는 건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미래가 불안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여준영:
그때는 하루에도 생각이 여러 번 바뀌었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죽을래?’ 하다가, 이내 ‘남자가 회사를 차렸는데 꼴랑 이거 해놓고 쉬냐?’ 이러고.(웃음) 아직도 확실한 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몰려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여준영
여준영
Q. 어찌됐든 프레인 대표를 그만둔 뒤 영화와 매니지먼트, 공연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 건 당신의 선택이지 않나. 많은 인생의 후배들이 그런 당신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이직이나 진로 변경 등 현실을 바꾸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말하는 편인가?
여준영:
현실이 너무 힘들다면 도전해야겠지. 다만 위험한 건, 과연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 가다. 도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본다. ‘여기’가 싫어서 하는 도전과, ‘저기’가 좋아서 하는 도전. 지금 자기가 딛고 있는 환경이 좋은지/나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지금 여기보다 나은 곳인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여기를 벗어나면 해결 되는가’ 중엔 아닌 경우도 많거든.

Q. 당신은 어땠나? 명확하게 알고 도전을 해 온 것 같나?
여준영: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도전을 해 본 적이 없다.

Q. 당신이 해 온 것들이 도전이 아니라고?
여준영:
가령 영화는 프레인이라는 마케팅 회사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한 거다. 도전이라고 느꼈다면 안했을 거다. 도전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쪼개면 반은 리스크일 텐데,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게 용감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본다. 실패도 경험이다? 실패가 경험이 되기는 하지만 경험을 위해서 실패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리고 새로운 일을 하는 걸 모두 도전이라고 표현하는 건 잘못됐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전 중에는 그렇지 않은데 도전의 형식을 빌린 것들이 너무 많다.

Q. 도전의 형식을 빌린 것들이라. 공감 가는 말이다.
여준영:
지난주에 제주 올레길 8코스를 다녀왔다. 이전에도 갔던 곳인데 평소 지나가던 길에 ‘여기는 위험하니, 옆길로 가시오!’라는 팻말이 생겼더라. 그런데 팻말을 무시하고 그냥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옆길로 가면 멀리 돌아가야 하니까, 그냥 가던 길로 간 거지. 그런데 이걸 도전이라고 봐야 하느냐! 이건 도전이 아니라 그냥 취향이다. 위험한 걸 즐기는 취향 말이다. ‘도전은 옳고, 도전하지 않는 삶은 안주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사람들을 도전으로 내모는 건 아닌 것 같다. 노력을 해서 뭔가를 얻으면 가치가 더 크기는 하겠지만, 노력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거 아닌가.

Q.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한 것 중에서 후회되는 건 없나?
여준영:
없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못할 만한 것들을 포기했으니까. 이런 얘기, 너무 우울한가?(웃음) 사실 도전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도전하는 사람’으로 본다고 하니까 의외다. 나는 의외로 보수적이고, 조금이라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다.

Q. 이 얘길 듣는 사람들이야말로 의외라고 생각할 거다.(웃음)
여준영:
그렇지 않다고 말해 달라.(웃음) 도전이 무조건 아름다운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Q. ‘잉투기’를 ‘ing+투기, 우리는 싸우고 있다’ 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더라. 그래서 묻는 질문인데, 당신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게 있다면 뭔가?
여준영:
평생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존재는 시간인 것 같다. 시간과 많이 싸우고 있다. 여러 의미에서.

Q. 마케팅 하는 사람 입장에서 스스로를 PR한다면?
여준영:
내가 나를? 음…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