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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노래 한 곡을 들었다. 제목은 ‘타임머신’ 소년 취향의 만화스러운 제목과 재치 있는 가사, 어렵지 않은 멜로디에 미소가 지어졌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흘러나오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이것 봐라, 하고 다음 곡 ‘벽’을 듣는데 후렴구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재밌다 싶어서 트랙 리스트를 훑어보는데 ‘감자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어 재생시켰다. 결국 눈물을 못 참았다.

강백수의 데뷔 앨범 ‘서툰 말’에는 ‘내 얘기 같은’ 노래들이 가득하다. 이해하기 쉬운 가사, 흥얼거리기 쉬운 멜로디가 오롯이 전달돼 마음을 흔든다. 슬픈 감정이든, 웃긴 감정이든. 강백수를 직접 만나 대체 어떻게 가사를 썼기에 이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거냐고 묻자 되레 나이를 묻는다. 이십대 후반이라고 답하자, “이 앨범의 타깃층이 딱 그 나이 대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첫인상은 약간 의뭉스러워 보이지만 얘기를 할수록 점점 자기 자신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알려진 것보다 알려질 것들이 훨씬 많은 남자, 강백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Q. 인터뷰 전에 라디오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고 들었다. 무슨 방송인가?
강백수: 프로레슬러 겸 해설가 김남훈 씨가 진행하는 방송인데, 그냥 가서 편하게 얘기하고 얘기 듣다가 온다. 얼마 전엔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도 출연했다. 내가 거창한 주제로 강연할 재주는 없고, ‘굳이 큰 꿈이 있어야 하나’ 하는 얘기를 하고 왔다. 그냥 내키는대로 살면 어떨까 싶은 거지. 많은 일들이 그 때 그 때 즉흥적으로 생기는 것 같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Q. 예명 ‘강백수’(본명 강민구)랑 맥락이 통하는 얘기 같은데. 이름은 왜 그렇게 지었나?
강백수: 처음에 예명을 쓰기로 결정한 건 문학을 하는 강민구와 음악을 하는 강민구를 다른 사람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학계가 워낙 보수적이다 보니 시인이 음악하는 걸 탐탁치 않게 보거든. 음악 쪽으로 너무 발을 깊이 들이면서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백수는 놀고 먹는 백수가 아니라 ‘공무도하가’에 나오는 백수광부에서 따왔다. 머리가 하얗게 세서 잔뜩 취한 채로 물에 떠내려 가는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싶어서. 그렇게 떠내려가는 게 굳이 안타깝지는 않다.

Q. 그런데 앨범 첫 곡 ‘하헌재 때문이다’를 들어 보면 음악의 길로 떠민 하헌재 씨를 원망하는 것 같다. 아직도 그가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강백수: 인생이 꼬인 건 맞다. 너무 평탄하게 가는 것보다는 꼬여 있는 게 재밌다. 누가 꼬셨든 음악을 하게 된 건 결국 내 선택이다. 다른 거 할 자신도 없고, 다른 사람들 음악하는 걸 TV로만 볼 자신도 없고. 누구나 핑계거리 하나 삼아서 자기 삶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있지 않나. 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고.

Q. 그럼 음악을 하기 전에, 원래 꿨던 꿈은 뭔가.
강백수: 초등학교 때부터 누가 물으면 시인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시 쓰는 건 굳이 시인이 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가 꿈을 물어봤을 때 대답할 거리가 있어야 하니까 시인이라는 공식 장래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딱히 뭐가 되고 싶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무엇이 되는가보다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멜로디도 대중적이고, 가사도 재밌고, 네이버 뮤직 추천앨범으로까지 선정됐는데, 반응이 그리 폭발적이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참 아쉬운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강백수: 음악을 소개할 수 있는 플랫폼 자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인디뮤지션들은 TV 한 번 나가 보는 게 소원이라는 친구들도 있다. 한번이라도 들려줄 수 있으면 내 팬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네이버에 소개됐을 때 좋았던 건, 평론가들의 칭찬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고 들어보겠구나 하는 거였다.

Q. 가사들이 너무 디테일해서, 경험담이 아니고서는 이런 가사를 쓸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강백수: 맞다. 다 경험담이다.

Q. 경험담을 가사로 쓴다는 게 민망하진 않았나.
강백수: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이파리 하나만 보고 산다. 바로 눈앞의 것만. 난 그게 더 재밌다. 사회적 메시지를 이야기할 때 이 사회 구조 전체를 얘기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이나 인물 한 명에만 초점을 맞춰 얘기하는 게 더 재밌고 와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이나 영화가 그렇듯이. IMF를 돌이켜 볼 때,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한국이 IMF에 얼마를 꿨느냐가 아니라 아버지가 은행에서 얼마를 대출받았냐는 거니까. 그런 걸 노래 가사에 담으면, 그게 하나의 기록이 된다.

Q. 노래 속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1991년, 1999년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로 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강백수: 늘 생각은 하는데…. 사실 돌아간다고 해서 크게 다르게 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아쉽게 놓친 것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니까. 과거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안 힘들게, 어머니를 건강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지난 주로 돌아가 로또를 사겠지만…(웃음)

Q. ‘타임머신’ 뮤직비디오에 아들과 아버지가 데면데면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도 그런 편인가?
강백수: 다른 집 아들보다는 살가운 편인 것 같다. 그래도 부자간이라는 게 안 친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냥 어색하다. 그 어색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엄마한텐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는데, 아버지랑은 대화를 해도 몇 마디 지속이 안 되고.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 얘길 할 줄 모르는 거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제일 안 친한 사람이 아버지다. 나도 아버지가 ‘타임머신’ 들으시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민망하니까.

Q. ‘아무 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돼버렸다’는 가사가 있다. 딴따라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강백수: 딴따라는 쓸모없어야 한다. 그게 딴따라의 쓸모다. 우린 살면서 항상 가치 창출을 해야 하는데 유일하게 거기에서 자유로운 순간이 예술을 접하는 순간이다. 사람을 쉬게 해준다는 거지. 내가 만드는 음악들도 뭔가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내 노래를 듣는 동안만큼은 편안했으면 좋겠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해결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옆에서 “야, 나도 그래. 에이씨 그냥 마셔” 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음악이었으면 한다. 딴따라가 쓸모없다는 건 부모님한테 하는 얘기다. 부모님한테 좀 더 쓸모 있는 아들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내 인생은 충분히 재밌는데 부모님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Q. 부모님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강백수: 원래 효도 잘 하는 애들은 이런 얘기 안 한다. 얼마 전에 선배 가수 김대중 씨를 만났는데, “니가 불효를 십년만 더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시더라. 우리가 홍대의 양대 불효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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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벽’에서는 옛 여친의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을 보고 ‘가수가 판검사를 어떻게 이겨’라고 울부짖는다. 가수는 정녕 판검사를 이길 수 없는 건가.
강백수: 당연하지. 그런데 가수가 좋은 점은 판검사랑 같이 링 위에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예를 들어 대기업 직원은 사람들이 판검사랑 같은 링에 올리는 느낌이지 않나. 누가 더 낫네 아니네 어쩌구 저쩌구. 노래 가사엔 없지만, 판검사도 가수를 못 이긴다. 싸울 기회가 아예 없으니까.

Q. 연말 가요대상을 타는 것(‘벽’), 김태희랑 술 마시는 것(아이해브어드림), 1991년으로 돌아가는 것(타임머신) 세 개 중 하나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 같아요?
강백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1위는 당연히 91년이고. 부수적인 것들을 다 빼고 딱 그 순간만 생각한다면 가요대상 타는 것보다는 김태희랑 술 마시는 게 낫지. 상대가 안 되지.(웃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없다.

Q. 노래 가사에 캘빈클라인 팬티가 유독 자주 나온다. 이전 EP 앨범에는 ‘CKP’라는 노래도 있고. 팬티가 그렇게 중요한가?
강백수: 반드시 그 브랜드여야 한다.(웃음) 캘빈클라인 팬티라는게, 되게 웃긴 물건이다. 20대 초반에 부릴 수 있는 가장 찌질한 허세지. 사실 입어보면 캘빈클라인이나 유니클로나 똑같거든. 남자들은 왜 캘빈클라인 을 샀을까. 이유는 하나다. 그 이유는 나도 알고 기자님도 알 테고.(웃음) 젊은이들의 연애 관계에서 이게 꽤 재밌는 소재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Q. 그 이유랑 관련된 또 하나의 노래가 밤을 허락하지 않는 여자친구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꽉 막힌 도로와 엮은 ‘내부순환로’다.
강백수: 내부순환로 길 자체가 워낙 답답하다. 지금도 아비규환일 걸.(인터뷰한 날은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는데 느낌이 비슷했다. 허탈하게 돌아오는데 비는 오지, 차는 막히지, 소변은 급하지.(웃음) 결국 터널 옆에 차를 세워놓고 비 맞으면서 노상방뇨를 했다. 차에 다시 앉았는데 옷도 다 젖고 열받아 죽겠더라. 그래서 만든 노래다.

Q. ‘주정가’에는 술 먹고 고백하는 남자가 나온다. 취중고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나.
강백수: 어차피 할 고백이라면 상관없는데, 안 할 얘기를 했다면 문제지. 상대방이 오케이 하면 문제가 더 커진다. 사귈 마음이 없었는데 사귀어야 하니까. 거절을 당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Q. ‘주정가’ 내레이션을 맡은 여자 목소리는 전형적인 혀 짧은 목소리다. 취향이 이런 쪽인가?
강백수: 그건 철저히 상술이다.(웃음) 그래야 남자들이 더 들을 것 같아서. 난 오히려 그 반대다. 섹시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Q. ‘뒤통수도 예쁜 그대’, ‘나쁜 노래’ 등 유독 가사 분위기가 어두운 곡들의 멜로디가 밝다.
강백수: 블랙코미디를 좋아한다. 슬픈 얘기를 우울하게 분위기 잡고 말하는 건 좀 쑥스럽다. 여자친구한테 차였을 때도, ‘힘들다. 술한잔 사주라’보다 ‘야, X됐어. 나 차였어’ 이게 훨씬 더 편하지 않나. 남자애들의 특성인 것 같다.

Q. ‘뒤통수도 예쁜 그대’까지 듣고 나면, 어린 나이임에도 꽤 많은 일을 겪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힘든 일을 밝게 얘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강백수: 누구나 많은 일들 겪으면서 지낸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시든 가사든 뭔가 쓰고자 하는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기도 했고.

Q. ‘감자탕’은 정말 흔한 경험을 슬프게 표현한 곡이다. 창피하지만, 이 노래 듣고 울었다. 울리려고 작정하고 만든 것 같다.
강백수: 그런데 이 노래를 듣다가 우는 분들만큼이나 웃는 분들도 많다. ‘손톱 밑에 들깨가루가 낀다’는 가사를 보고 웃는 사람도 있다.

Q. 못생기고 감자탕 발라주는 여자, 예쁘고 감자탕 발라줘야 하는 여자 중 누구?
강백수: 무조건 예쁜 여자.(웃음) 예쁘지 않은데 감자탕만 발라줘도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엄마다.(웃음)

Q. ‘아이해브어드림’에서는 1억이 생기면 1억원 어치 술을 마시겠다고 했는데, 설마 그럴 리는 없지 않나? 술 먹고 남는 돈으로 뭘 할 건가.
강백수: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런데 지금도 먹고는 사니까, 여기 1억이 추가되면 좀 더 좋은 걸 먹고 남는 돈으로 술을 마시지 않을까. 나에게 술은 레저와 같다.(웃음) 누구나 레저에 투자를 하지 않나.

Q. 프로필을 보면 가수 외에도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지면에 칼럼을 연재 중이기도 하고. 요즘은 글 쓸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보통 글은 언제 주로 쓰세요?
강백수: 틈날 때 마다 메모를 한다. 그 메모를 하루 날 잡고 시간 내서 정리한다. 요즘도 이틀에 한번 정도는 혼자 카페에 두 세 시간씩 앉아서 글을 쓴다. 낮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Q. 시인에게 무례한 부탁이긴 하지만, 용기내서 부탁드린다. 삼행시 한 편만….
강백수: 정말 무례한 부탁이다.(웃음)
강백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그라운드도 없고
수월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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