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제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이하 JIMFF) 개막식에서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제천영화음악상을 수상한 정성조 음악감독과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이장호 감독이 함께 기쁨을 나눈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중학교 밴드부에서 이 친구를 처음 만났다. 사실 내가 색소폰 잡는 거부터 가르쳤는데, 겨울방학 끝나고 오니까 이 녀석이 나보다 훨씬 잘 하는 거다. 그때부터 음악을 관뒀다. (웃음) 그래도 이 친구를 만난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며 지음(知音)을 축하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깊고 푸른 밤>, <영자의 전성시대>, <이장호의 외인구단>, <겨울 여자> 등 당대 흥행작들의 영화음악을 도맡아한 정성조 음악감독을 JIMFF에서 만났다. “언제까지나 현역 연주가”이고픈 정성조 음악감독은 여전히 매주 재즈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자신에게 연습과제를 내주는 등 아직도 연마를 멈추지 않는 연주가였다.

우선 4번째 제천영화음악상의 주인공이 된 것을 축하한다.
정성조 음악감독:
2006년 신병하, 2007년 최창권, 2008년 전정근 음악감독에 이어 받게 되어 영광이다. 조성우 집행위원장이 살아있는 사람이 이 상을 타는 건 처음이라 그러더라. (웃음)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내 자리는 연주하는 무대지 공로상 받을 군번은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딴따라들이 하는 걸 배우러 미국까지 왔다고들 했다”

처음에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피아노를 시작한 1950년대에는 지금처럼 쉽게 악기를 접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는데.
정성조 음악감독:
운 좋게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주변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연주를 배우기도 쉬웠고. 당시 미군들은 징병제라서 군악대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그래서 영어도 배우고, 음악도 배울 겸 맨날 미군부대를 들락거렸다. 그러니까 뭐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지. (웃음) 다행히 집에서 음악 하는 걸 지원해 주기도 했고.

서울고 재학 시절에는 재즈를 연주하는 천재로 소문이 날 정도였고, 프로 무대에도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에 데뷔했는데.
정성조 음악감독:
소위 말해서 음악계라 그럴까 연예계라 그럴까 거기에 빨리 등장하긴 했다. 10대에 일을 시작했으니까. 당시 일본에 계시던 작곡가 길옥윤 선생님께서 한국으로 돌아오셨는데, 고등학교 때 운 좋게 그분과 함께 플룻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6년 동안 그분을 모시고 일하게 되었다. 길옥윤 선생님과 패티 김 씨하고 공연이며, 방송이며 쫓아 다니느라 정신 없었지. 그래서 대학을 못 갔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학은 가긴 가야될 거 같은데 그때는 음대에서 색소폰은 전공으로 뽑지도 않고, 미팅 하는 애들은 너무 부럽고. (웃음) 그래서 고등학교 때 1년 정도 작곡을 공부한 게 생각나서 서울대 작곡과에 시험을 쳤다. 그런데 피아노 실기 시험을 볼 때 내 앞에 치는 애가 너무 잘하는 거다. 그래서 ‘아 난 이제 떨어졌구나’ 절망했지.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붙고 나서 보니까 그 친구가 금난새였다. (웃음)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1968년도에 전국 남녀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에서 은상을 탔다. 상도 상이지만 우선 그 시절에 그런 대회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정성조 음악감독:
그렇다고 해서 재즈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게 뭔지 관심도 별로 없었다. 근데 나는 재즈가 너무 하고 싶어서 대학에도 들어가 보고, 이것저것하면서 정신없이 음악을 했다. 광고 음악도 하고, 영화도 4-50편씩 작업하고. 그런데 계속 그 상태로 가면 그냥 평범한 뮤지션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뒤엎어 보자고 생각하고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하루에도 클럽을 두세 군데씩 돌아가며 연주했는데 그걸 다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

1979년에 한국인 최초로 버클리 음대에 유학을 갔다. 유학생활은 어땠나?
정성조 음악감독: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다 놀라더라. 이민 생활 몇 십 년 만에 딴따라들이 하는 걸 배우러 여기까지 온 사람 처음 봤다고. (웃음) MIT나 하버드 대학 간다는 사람은 봤어도 버클리 음대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던 거다. 아직도 생각나는 게 처음 레벨 테스트 때 색소폰을 연주했더니 선생이 “동양에서 왔는데 왜 서양음악을 하냐”고 그러는 거다. 그래서 “우리도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배운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더라. 그때는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를 때니까. 거기다 돈도 없으니까 살기도 정말 불쌍하게 살았지. (웃음)

미국의 수많은 음대 중에서 버클리를 고집한 이유가 있는가?
정성조 음악감독:
고등학교 때 <다운비트>라는 미국 음악잡지를 거의 외우도록 봤었다. 폐지로 버려지는 미군 부대 잡지를 모아다가 명동에서 파는 거였는데 하루 종일 골목을 뒤지면 <다운비트>가 한 권씩 나오고 그랬다. 그 날은 횡재한 거지. 그런데 그 잡지 맨 끝에 늘 버클리 대학 광고가 실렸다. 거기서 배운 사람들이 다 레이 찰스, 퀸시 존스 같은 내 우상들인 거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아 내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여길 꼭 가야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음악의 틀을 깨고 싶었다”

한국에서의 음악생활에 매너리즘을 느껴 가게 된 유학인데, 어떤 전환점이 되었나?
정성조 음악감독:
거기서 엄청나게 얻은 게 많다. 룸메이트 중에 브라이언이라고 기타 치는 녀석이 있었는데, 5천 달러만 모으면 뉴욕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타만 연주하겠다는 친구였다. 난다 긴다 하는 연주가들이 다 모이는 뉴욕에서 말이다. 5천 달러에서 집에 가는 차비만 남기고,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기타만 연주하면서 자기를 시험해보겠다는 거였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깨끗하게 물러나겠다고 굉장히 심플하게 말하더라. 그때 좀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정서는 ‘하면 된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라’ 이런 식인데 얘네들은 최선을 다할 줄도 알지만 물러날 때도 알고. 그 당시의 내겐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렇게 문화적인 충격을 받고 돌아온 한국은 어떻던가?
정성조 음악감독:
1983년 가을, 4년 만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한국도 완전히 달라졌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도 신문지가 아닌 비닐봉투에 담아주고, 전화번호도 국번도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변하고. (웃음) 떠나기 전에는 양담배만 갖고 있어도 현행범으로 잡혀가는 시절이었으니까 ‘진짜 우리나라 맞아?’ 그랬었다. 한참을 일도 없고, 그렇게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래도 색소폰만은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 불었다. 연주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연주는 계속해야 된다. 하루, 일주일 이렇게 연습 안 하려면 아예 손을 떼야지.

그러다가 어떻게 영화음악을 시작하게 했나?
정성조 음악감독:
오비캐빈이라는 데서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공연하는 걸 보고 광고음악 의뢰가 들어와서 하다보니까 그게 또 소문이 나서 영화 음악도 하게 되었다. <겨울여자>가 100만 관객동원이라는 대히트를 치고 나니까 그 때부터는 영화음악일이 계속 들어오더라.

그럼 특별한 의도 없이 우연히 영화음악을 시작하게된 건가.
정성조 음악감독:
그건 아니다. 이런 말 하면 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데, 전 세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영화음악의 틀을 깨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를 접목시키고 싶기도 했고. 전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좀 더 영화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능적인 음악이랄까? 당시 한국에는 영화 장면에 따라서 적합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기능적인 음악이 없었다. 감독이 만든 그림에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음악으로 맞춰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 작업이 참 재밌더라. 그런데 영화음악이 재밌는 게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그렇게되면 나조차도 뭘 만들었는지 기억 못하고. (웃음) 서른 살 때 쓴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으로 시작되는 ‘난 너에게’는 얼마 전에 MBC <공포의 외인구단>에서도 또 나오고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주는데, 사실 그 노래는 전력투구해서 만든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화가 흥행하니까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해주더라.

본인이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무엇인가?
정성조 음악감독: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고, 1980년대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짜임새 있는 구성인데다가 음악이 영화 분위기랑 잘 맞아 떨어지게 나왔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음악을 포기하는 건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음악인으로선 최초로 광고 음악을 만들고, 버클리 음대에 한국인 최초로 유학도 갔다온데다 실용음악과까지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했다.
정성조 음악감독:
실용음악과는 지금 서울예대 유덕형 학장이랑 같이 1987년도에 만들어낸 이름이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좀 더 새롭게 음악을 가르치는 과를 만들고 싶었다. 학과 이름을 둘이서 고민했는데, 처음에 나온 게 상업음악과다. 그런데 입에 안 붙고 뭔가 이상한 거다. 그래서 응용음악과를 할까 하니까 응용미술과 표절한 거 같고. (웃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실용적인 음악이란 뜻에서 실용음악과가 탄생했다. 이렇게 실용음악과가 인기 있을 줄 알았다면 그 말에 특허라도 낼 걸 그랬다. 그랬으면 지금쯤 빌딩 몇 채는 지었을 텐데. (웃음)

서울예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어땠나? 연주가로서 굉장히 욕심이 많았는데 후학을 기르는 것이 쉽진 않았을 거 같다. (웃음)
정성조 음악감독:
학교에서 아이들을 7-8년 가르치다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난 아직도 한창 같은데 왜 여기 박혀서 억울하게 청춘을 보내나?’ 현역에 더 있고 싶었다. 그래서 1995년에 학교를 나와 KBS 관현악단장을 맡게 되었다.

사실 KBS 관현악단장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공영방송 행사에 자유로운 연주가의 세계와는 다른 직장인의 생활이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11년 동안이나 역임했다.
정성조 음악감독:
말도 못하게 힘들었다. 원래는 월급 같은 걸 떠나서 우리나라 방송음악을 바꾸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완성을 못하더라도 다음 사람이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발판이 되고자 한 거지. 근데 막상 KBS에 가보니까 관료주의가 굉장하더라. 방송국 사장이나 문화부 장관이면 모를까 관현악단장 정도 되가지고는 그런 큰 그림을 못 그리겠더라.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다시 아이들을 가르친 지가 벌써 5년째다.

정통 클래식에서 출발해 재즈, 광고음악, 영화음악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왔는데 요즘 대중음악도 듣는가?
정성조 음악감독:
클래식하는 친구들은 가끔 가요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도 하는데, 잘 만든 가요 안에는 사회가 다 들어있다. 새로운 시대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대중음악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 음악을 들을 시간 자체가 별로 없다. 일주일에 두 번씩 ‘올댓재즈’ 클럽에서 연주하고, 또 사흘은 학교에서 열 시간 정도 수업하고. 그리고 나름대로 공부도 계속하고 있으니까. 학위를 따고 그런 공부는 아니고, 기간을 정해놓고 내가 좋아하는 심포니를 통째로 다 외우자 이런 식이다. 요즘엔 ‘시벨리우스 심포니’를 외우고 있다.

공로상을 받는 위치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뮤지션으로서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정성조 음악감독:
아직도 할 게 무지하게 많다. 주변에서도 “나이 먹었으니까 이제 대충해, 뭘 아직까지 색소폰을 불어?” 이러는 사람도 있다. 근데 그렇게 말하는 건 이미 땅 속에 들어가 있는 거나 다름없다. 같이 음악한 친구들도 지금은 연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들도 다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연주가들인데 아무도 음악을 안 한다. 물론 다들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지만 자기가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음악을 쉽게 포기하는 건 죽은 거나 다름없다.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연주할 거다.

‘올댓재즈’ 클럽에서의 연주도 계속 할 건가?
정성조 음악감독:
물론이다. 주말마다 공연을 하는데 올댓재즈에서 한 지도 벌써 27년이 됐다. 좀 더 팬시한 데서도 하고픈데, 이제와서 딴 데로 옮겨서 또 27년씩 할 자신이 없어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웃음)

글. 제천=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제천=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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