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이하, JIFF)의 ‘디지털 삼인삼색’은 개성 있는 감독들에게 디지털 단편영화 제작비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따로 회고전을 열 정도로 JIFF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한국의 홍상수,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 감독이 각각 <첩첩산중>, <코마>,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를 내놓았다. “5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가이드 라인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정수완 수석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세 감독들은 서로 다른 영화들을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묘하게도 ‘어떤 방문’이라는 제목 아래 유연하게 묶인다. <첩첩산중>에서 전주로 훌쩍 떠난 미숙의 이틀 밤은 홍상수 감독의 여전히 날이 선 지식인 ‘진상’ 유머를, 어느 날 갑자기 방문한 재일교포 3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본인 여자의 <코마>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만의 색깔을 보여줬다. 서구의 자본이 남기고 간 상흔으로 인해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 역시 외부에서 온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른 듯 닮은 세 감독들과 문성근, 정유미, 나카무라 유코, 키타무라 카즈키 등 출연배우들의 기자회견이 2일 오전 11시, 전주국제영화제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한국어와 일어, 영어가 교차하는 범세계적이었던 시간은 함께 전주를 찾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귀여운 아들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 주변의 재일교포 3세들은 외부의 규정에 혼란스러워 하더라”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소감을 말해 달라.
홍상수
: 외국 감독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하나의 좋은 기회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단편 영화를 만든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가와세 나오미: 제작비가 환율 때문에 많이 낮아져서 촬영을 이틀 만에 끝내야 했다. (웃음) 여기 와서 보니 세 감독이 생각지도 못하게 같은 콘셉트로 영화를 찍어서 놀랐다. 이것도 인연이 아닐까?
라브 디아즈: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필리핀에 다국적 기업이 와서 환경을 파괴하고, 필리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비전문배우를 기용했다.

필리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도 불구하고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는 유독 흑백이다.
라브 디아즈
: 물론 필리핀은 아름답지만 그 뒤에는 슬프고 어두운 역사가 있다. 그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슬픔을 나타내려고 일부러 흑백 톤으로 작업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재일교포 3세를 남자 주인공으로 했다. 평소에 한일 관계에 관심이 있었나?
가와세 나오미
: 주변에서 재일교포 3세들을 많이 만난다. 재일교포 1세나 2세는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있고, 그로 인한 자기 내부의 혼란이 많다. 이에 반해 재일교포 3세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적은 반면에 외부에서 오는 “넌 한국인이야”라는 규정에 오히려 힘들어 하더라. 그들의 그런 심리를 표현하고 싶었고,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판소리도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즐거운 작업이었다.

일본에서 드문 여성 감독으로 사는 것이 힘들 것 같다.
가와세 나오미
: 여성이기 때문에 가정과 일에 대한 균형을 잡는 것이 힘들다. 현장에서는 감독이지만 집에서는 가사 노동도 해야 되고. 그래서 하나의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어서 늘 아쉽다. 이것이 여성감독의 가장 어려운 부분 아닌가 싶다.

키타무라 카즈키는 한국에서 , 등의 일본 드라마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데 팬들의 인기를 체감했나?
키타무라 카즈키
: 한국은 두 번째 방문인데 늘 일정이 빡빡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안타깝다. 이번에도 영화제 일정을 소화하고 바로 일본으로 촬영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팬들의 인기를 아쉽게도 실감하진 못했다. (웃음)

“이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경우, 이전의 영화와 달리 <첩첩산중>에서는 여성의 시점으로 밀착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변화가 보였다.
홍상수
: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산해서 그렇게 만들진 않았다. 미숙(정유미)이라는 여자는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아직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테스트 중인 여자의 힘든 며칠을 그린 거라 더욱 그 인물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가까워 보였던 것 같다.

배우들은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이 어땠나?
문성근
: 감독에게 출연 제의가 와서 무슨 역할인지 묻지도 않고 한다고 했다. (웃음) 촬영 당일 오전에 대본을 받고, 그 자리에서 다음 장면을 연기하고… 즉흥적으로 감독과 장단을 맞춰 가며 연기하는 것도 배우로서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배우로 한 단계 발전하는 기회인 것 같다.
정유미: 홍상수 감독님과 문성근 선생님과 함께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음주 장면에서 배우들에게 직접 술을 마시게 하는데 어땠나?
정유미
: 술에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웃음) 술을 마셔서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진짜로 그렇게 하는 게 그 상황에 맞다고 본다.

홍상수 감독과 <오, 수정> 이후 십여 년만에 다시 만났는데 변한 것은 없었나?
문성근
: <해변의 여인>에 목소리 출연은 했었다. (웃음) 홍상수라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는데, 같은 것을 봐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워낙 남다르게 느껴서 늘 흥미롭다. 그런데 그게 나이를 들어가면서 좀 바뀐 것 같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이 관대해졌달까? 원숙해졌달까? 그래서 앞으로 활동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초창기 작품들은 보다보면 아픈 경우가 많은데 이제는 그것 말고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게 느껴져서 좋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웃음)

글. 전주=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전주=이원우 (four@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