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말하는 대로’ 편에서 조커카드 사용법을 몰랐던 박명수는 당당하게 ‘조커’ 두 글자만을 썼고, 멤버들이 붙여놓은 육하원칙에 따라 벌칙을 받게 됐다. 방송 후에도 “내가 ‘조커’라고 쓴 게 왜 웃긴 거야?”라고 되물을 만큼 게임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명수는 5년 전만 해도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편에서 가짜 돈가방으로 멤버들을 속였던 ‘카이저흑채’였다. “패기도 없고 건강도 없는 형들”이라는 노홍철의 구박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박명수의 혼란은 현재 <무한도전>의 위기상황을 알리는 적색신호나 다름없다.
추격전과 상황극, 무도월드를 지탱하는 양 날개
을 힘겹게 지탱하는 양 날개는 추격전과 상황극이다."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ngV96AWiYQBppkNYDFBHycCKMU3zCSI.jpg" width="555" height="185" border="0" />
MBC 파업 이후 <무한도전>은 세 번에 한 번 꼴로 추격전을 선보였고, 그 때마다 추격전에 두뇌싸움을 얹거나(‘말하는대로’ 편), 스파이가 또 다른 스파이를 확보할 수 있는 장치를 추가하는(‘뱀파이어 전쟁’ 편) 등 포맷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게임이 복잡해질수록 멤버들은 미션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추격전의 고전적인 캐릭터인 ‘사기꾼’ 노홍철만이 수없이 소비될 뿐, 이제 캐릭터는 ‘개그학개론’이나 ‘언니의 유혹’과 같은 상황극에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무한도전> 특유의 추격전의 핵심이 추격전을 가장한 서로 물고 뜯는 캐릭터 싸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캐릭터가 실종된 추격전이 지루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현재 <무한도전>을 힘겹게 지탱하는 양 날개는 추격전과 상황극이다. 장기 프로젝트나 개인의 서사가 사라진 자리를 가장 빨리 채울 수 있는 것은 긴 호흡에 구애받지 않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무한도전>이 연속극이었다면, 지금의 <무한도전>은 짤막한 에피소드 모음집 같다. 장기 프로젝트의 양적인 감소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지난 1월 방송된 ‘박명수의 어떤가요’도 3개월에 걸쳐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대결의 촉발점이 된 두 주인공의 유치한 대화부터 대결 항목을 정하고 ‘달인’을 찾아가 배우는 과정, 본 대결에 임하는 모습까지 기승전결의 형태를 갖췄던 ‘하하 VS 홍철’ 편과 달리, 박명수와 멤버들 간의 단발적인 토크를 보여준 후 곧장 무대로 직행했던 ‘박명수의 어떤가요’는 개인의 소원성취 이상의 무언가를 남기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방송 바깥의 관계를 방송 안으로 끌어들여 서사를 구축하고 그것이 다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 혹은 제로에서 시작해 거대한 축제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묻어나오는 감동과 재미. 그것이 <무한도전>만의 고유한 미덕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거나 별명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캐릭터에 살을 덧붙인 멤버는 <무한도전>을 더 깊게, 얼떨결에 쇼에 참가했다가 ‘크루’가 된 게스트들은 <무한도전>을 더 넓게 파고들었다. 시작은 미약하고 과정은 다사다난하나 그 끝은 창대했다. 그러나 파업종료이후 이러한 호흡에 충실했던 방송은 ‘못.친.소 페스티벌’ 뿐이었다.
거창한 장치나 복잡한 규칙보단 일곱 남자
“세상에 우리 프로그램만 있다는 생각으로 더 당당하고 뻔뻔하게 갈 생각이다.” 2년 전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잇따라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경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정해놓은 틀 안에서 비슷한 패턴의 사건을 발생시키며 캐릭터를 육성하는 여느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는 달리, 매번 다른 콘셉트의 아이템을 활용해 예측 불가능한 결과물을 내놓는 <무한도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그래서 시청률에 상관없이 충성도 높은 시청자 층을 보유할 수 있었고, 제대로 된 <무한도전>을 볼 수만 있다면 MBC 파업으로 인한 결방을 감수하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7개월 동안 지켜봐 온 <무한도전>은 ‘마이웨이’를 걷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물론 7년 동안 매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순 없다. 도중에 주저앉을 수도 있고 결국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무한도전>은 무모한 정신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최근 유재석이 ‘전천후 잔소리꾼’이라는 자막이 등장할 만큼 채찍을 든 것도 이러한 답보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비록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지난 주 방송된 ‘숫자 야구’ 편은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한 에피소드였다. 파업 이후 단절된 호흡을 억지로 이어붙이는 대신 추억의 게임을 소환해 공감대를 형성했고, 구박하는 유재석과 게임에 약한 박명수와 정준하의 관계를 답답한 시월드에 비유하며 게임 안에서 캐릭터를 살렸다. 지금의 정체기를 감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게임에 짓눌리지 않는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6개월 전에 ‘조커’를 썼던 박명수가 본능적으로 상대편 금고를 발견하고 여는 히든카드가 되는 순간, 의도치 않은 서사까지 탄생했다. 거대한 해외 진출이나 복잡한 추격전이 아니어도 된다. ‘평균 이하’ 일곱 남자들이 자유롭게 까불며 놀 수 있는 단순한 놀이면 충분하다. <무한도전>의 ‘죽지 않아’ 정신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호기심이나 별 볼일 없는 대화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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