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사람은 못하는 것엔 흥미를 잃는 법이다. 동그라미에 직선 몇 개 긋는 걸로 사람 얼굴을 완성하고, 잘 해보려 덧칠만 하다 결국 물로 종이를 뚫어버리는 수채화가다반사였던 내겐 그림이 그랬다. 그 후 그리는 건 못하니 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 반, 유럽 여행하는 기분 반으로 <서양 미술사>를 들었지만 강의가 끝나도 별 감흥은 받지 못했다. 역시나 그림과의 연은 없나 했다. 일에 매여 있다 한 그림을 보게 되기 전까진.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중략)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 중에서 특히 ‘착취’란 단어만 계속 보던 때 지인으로부터 크리스 나이트의 그림 하나를 소개받았다. 제목은 ‘The End of Inheritance’. 뭔 말인지 해석하기도 전에, 예쁘지만 세상 다 산 듯한 그림 속 인물을 넋 놓고 봤다. 캐나다 화가 크리스 나이트의 홈페이지(http://krisknight.com)를 채운 작품들엔이 그림처럼 하나같이 아늑한 색감 위로 정말 착취당한 듯 무표정한 얼굴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그 대비가 좋았다. 뛰기는 하는데 이유는 모르는 사람들, 팽창만 하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아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애써 웃으며 장황한 위로를 하는 것보다 가끔은 조용히 소진된 상태를 공유하는 게 솔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이 그림들은 아직도 힘이 되어 준다. 백 마디말 대신 내일은 또 오니까 일단 잠이나 자라고 누군가 토닥여주면 오히려 울컥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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