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넓은 치마폭으로 컵라면을 사수하기 위해 길 한가운데 풀썩 앉아버린 소녀. 그야말로 뚜껑 같은 단발머리를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큰 눈을 요리조리 굴리던 그는 신선한 발견이었다. 그것이 2005년의 일. 이후 처음 등장하던 순간의 임팩트를 유지하긴 어려웠고, 소녀의 이름 앞에 얹혔던 ‘유망주’란 수식어는 자연스레 빛이 바랬다. 하지만 MBC 속 황보라는 누구라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반짝거리는 구슬 같다. 귀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모습을 볼 수는 없고, 투덜대면서도 매번 아랑(신민아)을 돕고 마는 얼치기 무당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다만, 그건 능청스러운 연기로 빚은 결과물이 아니다. “방울이는 아줌마처럼 걸쭉한 말투를 쓰잖아요. 그런데 제가 하니까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다고 하더라고요”라 말해놓고 “맞아요? 확실해요, 진짜?”라 재차 확인하는 황보라의 천진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는 고르게 깎아 만든 게 아닌, 울퉁불퉁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함이기도 하다.

유망주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그 이후
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지난날의 재능이나 한계, 노력에 관한 이야기에도 애써 다듬거나 꿰맨 흔적은 없다. “어릴 땐 미술을 오래 했지만 엄마의 강요 때문이었어요. 저는 제가 소질이 없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거든요. 늘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길거리 캐스팅이 된 거죠. ‘이거다. 기회가 왔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거예요.” 명쾌하고 단순한 시작일수록 과정은 어려운 법. 결국 그는 오랜 연습생 생활을 견딘 끝에 SBS 공채 탤런트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알았어요. 춤과 노래에도 재능이 없다는 걸. 그래도 주어진 건 견뎌야 하니까 견뎠던 거예요.” 그렇게 배우가 된 황보라에겐 딛고 올라갈 다음 스텝이란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일을 예감하는 혜안보다는 오늘을 풍성하게 만드는 성실함이 소중했다. “왕뚜껑 소녀로 알려진 후 열심히 하니까 시트콤을 찍게 되고, 또 그다음이 있고. 물론 잘 안 될 때도 있었지만,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충실하게 채워진 현재야말로 미래를 담보한다. 그는 120부작이 넘는 아침 드라마를 찍으며 자신의 대사가 없을 때도 카메라를 의식해야 한다는 걸 비로소 배웠다. “이런 인물도, 저런 인물도 연기할 수 있으니”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정성 들여 쓴 손 편지 뒷면에 자국이 남듯, 그런 배움은 또렷이 남아 지금의 황보라를 만들었다. 현재에 다다른 그는 배우라는 직업과 그것을 둘러싼 일들에 대해 고민 중이다. “인터뷰에 오기 전 생각을 해봤어요. 사람들이 배우 황보라를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일상의 황보라를 보고 싶어하는 건지. 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있어요.” 씨익 웃으며 말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황보라가 끝내 연기만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채는 배우로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

“이 기회에 타이트하게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해요”
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황보라│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라
그래서 서른 살, 7년 전과는 달라진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는 일도 지루하진 않을 것 같다. “예전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을 안 썼거든요. 그런데 하면서는 반응이 좋으니까 일부러 더 찾아보고 그래요. 그런 걸 보면서 진짜 더 잘해야겠구나, 이 기회에 타이트하게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해요.” 첫인상을 지워내고 두 번째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새겨 넣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 속 방울이의 활약에 대해 “이제 시작이죠!”라던 황보라의 대답이 믿음직하게 느껴지던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그가 매끈하게 겉치레한 답안을 내놓는 사람은 아닐 테니. “박태환 선수가 런던올림픽 수영 400m에서 탈락했을 때 기도를 했어요. 만약 박태환 선수를 본선에 올라가게 해주시면 진짜 착하게 살겠다고요. 뭐 착하게 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쁘게 산 건 없지 않을까요?” 이대로, 충분하다.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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