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것은 때로 불쾌하다. 대게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수는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만큼 꺼리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의 문제적 작가 임상수가 던지는 질문은 곱씹어 볼 의미가 있었다. “저는 큰돈을 투자받아서 영화를 찍고 돈을 벌어줘야 하는 명백한 상업영화 감독이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 보다 내가 하고 싶은 정치적, 사회적 코멘트를 해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지점이 있죠. 물론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것을 한 번도 머리에서 버린 적이 없어요. 다만 일체의 감상을 배제한 냉혹한 리얼리스트고 싶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맨 얼굴을 영화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내 작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불편해하더라도 그건 “우리들의 생얼이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임상수가 전작 <하녀>부터 좀 달라진 듯하다. 스스로 “<하녀>의 정신적 후속작”이라 밝힌 <돈의 맛>도 마찬가지다. <돈의 맛>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남다른 위치를 갖는다면 보다 풍부해진 유머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을 발밑에 두고 좌지우지하는 최상류층을 바라볼 때도 특유의 이죽거리는 태도는 유효하지만 예전보다 풍경은 덜 건조하고 다소 노골적일 정도로 유머가 더 드러난다. “<하녀>는 작품의 속성상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캐릭터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었어요. ‘우리 모두는 하녀다’라는 전제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대중들은 다소 상징에 약하기 때문에 ‘무슨 소리야, 나는 은이 같은 하녀가 아니야’라고 반응한 거죠. 관객과 소통하는데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그게 대중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돈의 맛>에서 영작으로 대표되는 보통 사람들, 월급쟁이들의 먹고 살기 힘듦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임상수라는 작가가 세상을 보고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바람난 가족>이나 <오래된 정원>에서처럼 세상 전체를 멀리서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재벌가의 화려한 저택 같은 극도로 양식화된 공간 안으로 바짝 다가왔다. <돈의 맛>은 인공의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 같은 고전 서사로 그려낸다. “예전에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연출에 있어 어떤 강박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나만의 스타일을 독특하게 보여 줘야겠다 같은. 핸드 헬드도 많이 쓰고 아주 어렵게 설계를 해서 롱테이크 신이나 원 신 원 컷도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녀>도 그렇고 <돈의 맛>은 분명히 그런 생각이 별로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찍자, 고전적인 방식으로 정석대로 찍자고 생각한 것 같아요. 머리에 딱 하고 떠오르는 어떤 것들만 특징적으로 스타일이 보일 수 있게 찍으면 되지 전체를 다 스타일리시하게 찍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이제 그렇게 찍어도 충분히 제 색깔이 나오고 이야기하려는 걸 전달할 수 있겠구나 라는 자신감이 좀 생긴 것 같아요.” 임상수 감독이 추천한 영화들은 이번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난니 모레티를 비롯해 함께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거나 칸에서 수상한 적 있는, 이른바 ‘칸이 사랑한 감독들의 영화’다.




1. <아들의 방> (The Son`s Room)
2001년 | 난니 모레티

“난니 모레티의 작품 중에 이 영화를 좋아해요. 어떤 사고로 10대 아들을 잃고 난 뒤 한 부부가 겪게 되는 마음의 여정을 그린 영화예요. 자극적이지도 않고 담담한데 감독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네요.”

누군가 겪은 상처를 두고 무게의 경중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이를 잃는 상실의 슬픔은 가장 무거운 고통 중 하나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정신상담의 조반니(난니 모레티)의 가정은 순식간에 발밑이 무너지고 만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묵묵히 견뎌내는 아버지의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다. 2001년 54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2. <사이드웨이> (Sideways)
2005년 | 알렉산더 페인

“일종의 루저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가 습작으로 쓴 소설이 있어요. 여행 중에 잠깐 만났던 여자, 사실 잊어버리는 게 정석인 여자한테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데 뒤늦게 그 여자가 연락을 해요. 그 여자가 네 소설 너무 길어서 다 읽고 연락하느라 늦었다, 소설 속 얘기 네가 다 경험한 거야? 라고 하는데 약간 눈물이 났어요. (웃음)”

<사이드웨이>는 와인 애호가인 마일즈(폴 지아매티)가 단짝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의 총각파티를 겸해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여인과 보내는 시간을 그린 영화다. 소소한 일상의 풍경 속에 스며든 삶의 비밀과 해학을 드러내는데 능숙한 솜씨를 가진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이번 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3. <다른나라에서> (In another country)
2012년 | 홍상수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다음 약속 때문에 30분 정도 밖에 못 봤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역시 실력자구나, 생각이 많고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 갖다 대고 찍는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을 싸악 몰입시키는 힘 같은 게 있잖아요. 카메라랑 배우가 있으면 다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데 이건 과연 무슨 힘일까, 영화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안느라는 이름의 세 여인(이자벨 위페르)이 차례로 해변 마을 모항으로 내려온다. 모항엔 부모 대신 펜션을 지키는 딸(정유미)과 항상 해변을 서성이는 안전요원(유준상)이 있고 그들이 안느와 얽히는 이야기를 다룬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홍상수 감독의 <다른나라에서>도 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다.



4. <비밀과 거짓말> (Secrets & Lies)
1996년 | 마이크 리

“마이크 리를 좋아해요. 알코올 중독자인 뚱보 누나와 그 누나의 딸로 거리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조카, 그리고 자기 처와 가족이 있는데 사내의 이야기가 나와요. 여기저기 들볶이는 남자를 보는 감독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어요.”

<비밀과 거짓말>은 흑인 여성 호텐스(마리안느 장-밥티스트)가 백인 친어머니 신시아(브렌다 블레신)를 찾는 과정에서 가족 간의 비밀이 밝혀지고 오랜 앙금이 풀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1996년 4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5.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8년 | 데이빗 크로넨버그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감독인 것 같아요. 마약같이 사람을 확 홀리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누구나 다 좋아하거나 모든 영화가 다 좋지는 않은 점이 오히려 매력적인 것 같아요. <이스턴 프라미스>는 특히 강렬하죠. 사우나 신 같은 건 정말! 저도 배우들을 그런 돌바닥에 발가벗겨서 굴리면서 찍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웃음)”

병원에 실려 온 14세 소녀가 아기를 낳고 사망한다. 이를 지켜본 간호원 안나(나오미 왓츠)는 아기의 친척을 찾으려다 러시아어로 쓰인 일기장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러시아 마피아의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와 만난다. <폭력의 역사>에서도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비고 모텐슨의 서늘한 연기가 또 한 번 빛을 발한 영화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코스모폴리스>로 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돈의 맛>에서 가장 섬?한 순간은 영작이 윤철과 싸우는 장면이다. 마치 우리가 돈의 맛을 많이 본 자들에게 이길 방법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만약 거기서 불쌍한 영작이가 윤철을 후려 팼으면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 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 시각에서는 그건 조금 감상적인 가짜 카타르시스라는 거죠. 영작이와 우리는 그 정도 가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즐거워하기 보다 더 바닥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어요. 그게 우리의 진실이니까. 거기에 내려갔을 때 우리가 영화 속이 아니라 진짜 현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건강한 분노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냉정한 현실 인식은 임상수 감독이 영화, 나아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다르지 않다. 왜 영화인가 라는 질문에 그가 들려 준 답은 냉혹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문장들이다. “친구들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이성 유인설’이에요. 예술가가 되면 사람들이 섹시하게 느껴요. 아하하하. 그런데 누구나 다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 수는 없고 성공적인 예술가는 될 수 없어요.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모여서 도태된 위에 진짜 좋은 예술 작품이 태어나고 그래야 좋은 예술을 세상 사람들이 즐길 수 있어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황폐한 거리에서 쓸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지망생들이 있고 그들이 많아야 더 좋은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건데 그게 참 잔인하죠. 현실적으로 그 좌절자가 되기를 누구한테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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