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에 넌 어느 게 하고 싶냐?” 영화 <페이스 메이커>에서 만호(김명민)가 지원(고아라)에게 던진 물음이다. 국가대표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될 만큼 자질도, 실력도 있지만 440cm라는 자신만의 벽에 부딪친 지원. 하지만 남달리 예쁜 얼굴 탓에 광고와 화보 사진 촬영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지원은 어딘지 모르게 고아라와 닮아 있다. 2003년 14살의 나이로 데뷔하자마자 KBS <반올림>의 옥림이로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은 광고나 화보의 화려한 이미지만을 옥림이에 더했을 뿐 그가 배우로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 주진 못했다. 지원이 고민에 빠졌던 만호의 물음은 “지원이와 사람이 다르고, 분야가 다를 뿐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을만큼 고아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정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이기에 고아라에게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9년 KBS <맨땅에 헤딩>과 몇 년간의 해외 활동은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었고, 이어진 1년간의 짧은 휴식과 매진했던 학교생활은 그 고민에 대해 내린 답을 온전히 가슴 안에 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자신만의 답을 실행하는 데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연초부터 나란히 개봉한 <페이스 메이커>와 <파파>에 휴식도 없이 출연을 결정했고, 촬영 중 입은 햄스트링과 아킬레스건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파파>에서는 한국어 대사만큼이나 많은 영어 대사를 위해 촬영 내내 영어로만 말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서 앳된 얼굴의 옥림이를 지우고 피부색이 다른 다섯 동생을 거느린 소녀 가장 준의 책임감과 불안감을 인상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었다. “<반올림> 이후 정신없이 달려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고아라에게 지금은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배우로서 저 푸른 하늘로 몸을 띄우기 전 다시 도움닫기를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아래는 그런 고아라의 고민의 시간 동안 그를 지켜줬던 언제 또 봐도 좋을 영화들이다.




1.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년 | 미셸 공드리

“고등학생일 때 처음 본 영화에요. 그 때 나도 이런 영화를 한번쯤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강하게 들었죠. 어찌나 깊이 인상이 박혔는지 아직도 제 마음 속에서는 최고로 꼽고 있어요. 특히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뿜어내는 빛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아마도 내 생애에서 두고 두고 틈날 때마다, 생각날 때마다 계속 볼 것 같아요.”

한창 사랑할 때는 한 오라기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울 만큼 소중하지만, 이별 한 후에는 그 하나하나가 가슴을 찌르는 송곳 같은 것이 사랑했던 기억들이다. 그래서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서로 사랑했던 기억들을 버리려 기억을 지우는 회사를 찾는다. 자신의 의지대로, 혹은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은 차차 사라져가지만, 마음은 그 순간들을 저장하고 있는 걸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잊은 채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를 지우려 했던 과거를 알게 된다. 이 섬세한 감정 연기를 코믹 연기의 대가 짐 캐리가 해냈다는 것이 이채로우면서도, 단순히 코미디로만 짐 캐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2. <인셉션> (Inception)
2010년 | 크리스토퍼 놀런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맬(마리옹 꼬띠아르)의 짙게 드리워진 사랑으로 비롯되어 엉켜버리고 만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가슴 깊이 와 닿았어요. 특히 맬의 팽이가 빙빙 돌면서 끝나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누구나 잊지 못할 명장면이 아닐까요? 내 생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어찌나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봤는지 7번이나 극장에 가서 봤지 뭐예요.”

타인의 꿈에서 정보를 훔쳐내는 코브는 다국적 기업의 후계자 피셔(킬리언 머피)에게 새 생각을 심어달라는 제안을 받고,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쫓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해결해줄 것을 조건으로 삼는다. 피셔의 꿈에 들어간 코브는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투성이 과거가 만들어낸 괴물들을 맞닥뜨린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놓쳐버린 코브의 아내 맬처럼 모호하기만 한 꿈의 세계지만, 그 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상상력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한 크리스토퍼 놀런의 세계관은 놀라울 만큼 단단하다. 관객은 지금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는 이 현실조차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이것은 현실인가, 꿈인가.



3. <엽기적인 그녀> (My Sassy Girl)
2001년 | 곽재용

“언제 봐도 좋은 영화 중 최고는 단연 <엽기적인 그녀>가 아닐까요?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찍어보고 싶을 만큼 재미있고, 또 예쁜 스토리를 가진 영화에요. 특히 엽기적인 그녀(전지현)의 본 모습을 고치려 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견우(차태현)의 캐릭터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견우와 그녀가 올랐던 동산의 아름다운 풍경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동안 보지 못했는데, 요즘 갑자기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에요.”

<엽기적인 그녀>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물꼬를 시원하게 터트린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까. 지하철에서의 오바이트라는 엽기적인 첫 만남부터 하이힐이 불편하다고 견우와 신발을 바꿔 신고 낑낑거리는 견우를 보며 ‘나 잡아봐라’를 외치는 그녀의 이야기를 만화의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 같은 견우의 시각으로 맑고, 아름답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린 <엽기적인 그녀>는 관객들에게 두고 두고 지워지지 않는 짙은 인상을 남겼다. 이미 11년 전의 영화이면서도 아직도 세간에 회자되는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 같은 영화.



4. <아더 크리스마스> (Arthur Christmas)
2011년 | 베리 쿡, 사라 스미스

“혹시 <아더 크리스마스>라는 애니메이션 아세요? 잘 모르시는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즈음에 극장에서 본 영화인데, 제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운적은 없거든요. 이 영화가 슬픈 내용도 아니고, 가슴을 에이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보면서 울어버렸어요. 산타 패밀리의 일원 아더가 단 한 명의 아이에게 선물을 배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따뜻한 내용이 가슴 깊숙한 곳을 건드렸나 봐요.”

산타클로스를 믿는다고 말하면 비웃음을 사게 된 나이에도 크리스마스에는 왠지 산타클로스만 떠올리면 즐거워진다. <아더 크리스마스>는 단 하룻밤 만에 2억 명의 아이들에게 선물 배달하는 것을 완수했지만, 단 1명의 아이만 빠뜨려버린 산타 패밀리가 귀찮음 탓에 마저 배달할 것을 거부하는 와중에 막내인 아더가 처음으로 선물을 배달하겠다고 나서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 <월레스와 그로밋> 등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름을 알린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답게 기발한 상상력 또한 곳곳에서 웃음을 던져준다.



5. <하울의 움직이는 성> (Howl`s Moving Castle)
2004년 | 미야자키 하야오

“원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특히 좋아해요. 거의 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웃음) 그 중에서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특별히 더 좋았던 영화였어요. 모자를 만드는 소피는 장인이라고 해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노인으로 변할 만큼 꿈을 잃어버린 사람 같기도 하잖아요. 그런 소피가 하울을 만난 뒤 조금씩 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잖아요. 정말 언제 봐도 새삼 깨달을 것이 많은 영화에요.”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대작뿐만 아니라 <빨강머리 앤>, <미래 소년 코난> 등 기억 속 추억의 애니메이션을 끊임없이 만들어온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특유의 아름다운 그림과 치밀한 묘사,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작품을 위해 꾸준히 전달하는 반전과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 등의 메시지는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힘을 보여준다.




<페이스 메이커>와 <파파>를 통해 화려한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 다가서고 싶어 하는 고아라는 이것이 스타트 라인에서 막 발을 뗀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지도, 조급하지도 않다. 8년 전 운명처럼 <반올림>을 만난 후 “한 번도 배우의 길을 의심해보지 않았”고 “이제 시작하는 입장”이라고 말하는 고아라에게 잠깐의 부침과 잠깐의 영광은 고아라를 뒤흔들 만큼 거센 바람은 아니다. <페이스 메이커>의 지원이나 <파파>의 준처럼 자신을 뒤흔드는 캐릭터,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감독, “<페이스 메이커>에서 만난 김명민이나 <파파>를 함께 한 박용우처럼 인생까지 닮고 싶은 배우”가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만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이다. 이미 스스로 페이스 메이커를 가지고 있는 고아라의 얼굴에 레이스에서 막 출발한 마라토너의 설렘과 결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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