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영│“이상형은 잘금 4인방이 아니라 김갑수 선생님” -1
박민영│“이상형은 잘금 4인방이 아니라 김갑수 선생님” -1
많이 거론된 책은 일단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기를 좋아한다. 박민영과의 인터뷰 중 발터 벤야민의 이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와의 인터뷰가 KBS 종영 이후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진행된 건, 그녀의 스케줄 때문이었지만 그 폭발적인 인기와 대중의 반응이 지나가고 나서 차분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결과적으로 더 좋은 선택이었다. 그토록 잘 만든 드라마였던 에 대한 찬사와 잘금 4인방이 만들어간 로맨스에 대한 설렘을 걸러낸 자리에는, 화려한 데뷔와 슬럼프의 파고를 거치며 더 풍성하게 여물어온 박민영이라는 텍스트가 좀 더 명료한 의미로 남아있었다. 그 때늦은 독서를 의 독자와 함께 한다.

이 끝나고 바로 파리로 갔다. 잘 쉬었나.
박민영 : 쉬기보다는 관광을 했다. 파리에는 처음이라 구경할 게 너무 많은 거다. 생 제르망에 갔을 때는 갤러리가 많아서 갤러리를 신나게 뒤지기도 하고, 몽마르트 언덕에서는 혼자 깨방정을 떨었다. 혼자 막 방방 뛰고 날아다니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국 관광객이 단체로 오면서 나를 알아보는 거다. 그래서 뛰어서 도망쳤다. 계속 깨방정 떨면서. 같이 갔던 스태프들이 창피하다고 하더라.

“윤희를 안 만났으면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박민영│“이상형은 잘금 4인방이 아니라 김갑수 선생님” -1
박민영│“이상형은 잘금 4인방이 아니라 김갑수 선생님” -1
자신을 몰라보는 곳에 가니 더 자유로웠겠다.
박민영 : 원래 여행 가면 남 신경 안 쓰고 잘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백화점의 L모 매장에 들어갔는데 거기 직원 분이 날 알아보는 거다. 중국계 혼혈인이었는데 유튜브로 을 봤다며 아는 척을 했다. 당일에도 출근 전에 보고 왔다고. 정말 깜짝 놀랐다. 동양계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해외 사는 분이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드라마를 챙겨본다는 게 신기하더라.

그런 일화만으로 드라마가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은 시청률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작품성에 팬들의 지지도 큰 작품이었다.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의 작품이었나.
박민영 : 오랜만에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윤희라는 캐릭터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특별했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게, 이번 드라마를 끝내고서 캐릭터를 버리는 작업은 오히려 되게 쉬웠다. 이 아이가 나와 같이 성장하면서 아픈 적도, 기쁜 적도, 뿌듯한 적도 있는데 어쨌든 행복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 사랑도 많이 받았고, 결말 자체도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행복했기에 보내주기 쉬운 건가.
박민영 :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이 아이는 잘살고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며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차기작이 생각보다 더 일찍 시작하면서 시간이 촉박해 빨리 보내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단계별로 차츰 잘 보내고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일부러 재방송이나 다시보기 이런 건 피하고 있다. 보면 다시 감정이 올라오니까. 웬만하면 나중에 여유 생기면 그 때 보려고 한다. 반년 동안 올인한 작품이라 아직 여운이 남는다.

트위터에 ‘윤희야 고맙다. 내 곁에 와줘서’라고 썼는데 단순히 윤희라는 역할을 맡아서 좋았다는 뜻은 아닌 거 같다.
박민영 : OST의 ‘찾았다’의 가사이기도 하다. 노래 마지막에 (믹키)유천 씨가 내레이션으로 ‘고맙다, 내 곁에 와줘서’라고 하는데, 그게 내 마음을 제일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우선 윤희라는 아이를 통해 나 자신도 벽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됐다. 연기에 대한 슬럼프를 겪고, 이 길이 맞는 것인지 고민했던 방황의 시기를 거친 뒤 잡은 작품이라 윤희를 연기하며 되게 많은 치유를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고, 또 그만큼 애정이 있었기에 치열하게 연기할 수 있었고 그 진심이 시청자들에게 전해져 좋은 평가를 받게 된 것도 고마웠다. 마지막 컷을 촬영한 다음 많이 울었는데 내 캐릭터는 물론이거니와 같이 일해 준 스태프들, 배우들, 감독님, 작가님, 나를 뽑아준 모두가 고마워서 울었다. 과연 이 작품을 안 만났으면 다시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건 결국 윤희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박민영 : 대리만족을 많이 느꼈지. 윤희가 정말 멋있던 장면이 몇 가지 있다. 처음으로 정약용(안내상) 선생님에게 성균관에 남겠다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그럴 때 굉장히 빛났고, 선준(믹키유천)과 술 먹고 걸어가며 학문에 눈 뜬 경험에 대해 말할 때도 그랬다. 등대에 등불이 하나하나 켜지듯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거니까. 그리고 정약용 선생님께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데 그 가르침 그대로 ‘여자이기 때문에 관원이 될 수 없다면 남자들이 만든 조선은 왜 이 모양이냐’고 질문할 때 참 통쾌하고 멋진 아이다 싶었다. 사실 작품과 캐릭터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나. 내가 윤희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아인이도 자기가 여배우면 윤희 역할을 꼭 했을 거라고”
박민영│“이상형은 잘금 4인방이 아니라 김갑수 선생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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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흔치 않은 작품에 흔치 않은 캐릭터였다.
박민영 : 여배우로서 맡을 수 있는 역할 중 이렇게 입체적인 캐릭터가 흔치 않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정말 다양해보이지만 사실 분류하면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신데렐라거나, 팜므파탈이거나, 질투에 눈먼 나쁜 애. 그런데 윤희는 거기서 조금 더 발전된 입체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유)아인이도 그러더라. 자기가 여배우면 윤희 역할을 꼭 했을 거라고.

그렇게 만족스러운 캐릭터인 만큼 윤희가 착 붙는 시점이 있었을 거 같다.
박민영 : 3, 4회? 그 때부터 연기하기는 수월해졌다. 1, 2회 땐 좀 헤맸고. 아직 캐릭터를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해서 인위적으로 목소리 톤이나 감정을 잡아가야 했고, 그 이후부터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감독님도 내게 맡겨주셨고, 작가님도 내게 많이 맞춰주신 거 같고. 그래서 점점 더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떤 신들, 가령 아버지가 사실은 남동생이 아닌 내게 글을 읽어주는 거였다는 걸 알게 되는 장면에선 나도 주체 못할 정도로 몰입하게 됐다.

그런 몰입 때문에 연기자로서의 박민영 역시 많이 발전했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마지막 회에서 좌의정(김갑수)과 붙는 신에서 이 배우가 안 밀린다는 느낌이었다.
박민영 : 그 신을 찍을 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하늘같은 대선배 김갑수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좌상이었다. 또 윤희는 어디서나 당당한 아이고. 그리고 김갑수 선생님께서 워낙 유쾌하시다. 아까 말한 차를 마시며 맞붙는 신의 경우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다 컷이 나면 선생님께서 ‘자, 원샷’ 이러신다. 하하. 그 뜨거운 걸 진짜 원샷할 때까지 기다리시고. 그래서 전에는 그렇게 대답 안 했는데, 요즘은 잘금 4인방 중 누가 이상형에 조금 더 가깝냐고 물으면 김갑수 선생님이 이상형이라고 대답한다. 하하. 그런 분위기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주눅 들거나 어려울 때는 없었다.

그렇게 즐거운 작업을 하고, 스스로 납득할만한 연기도 하고, 대중의 사랑도 얻었다. 그 덕에 스스로 벽을 넘었다고 했는데 그 벽이란 어떤 거였나.
박민영 : 내게 있어 벽은… 여러 가지 의미다. 하고 싶은 연기를 하는 것에 있어 대중의 인지도나 인기가 필요한데, 그게 부족해서 겪은 문제도 있었고. 그런 것들이 결국 나의 자만과 나태함에서 온 결과니까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것이지 않나.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안 할 거라는 교훈을 얻었지만 지금 당장은 막막한 상태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은 알겠지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생기고. 이 때 다시 한 번 해보자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윤희에게서 배웠다. 윤희도 그렇지 않나. 어떻게 저렇게 사건 사고가 많을까 싶게 산 넘어 산이지. 뭐 하나 해결해서 좋다고 하면 어느새 또 추문에 걸리고, 이제 됐다고 하면 금등지사 찾으라 하고, 이제 됐나 하면 선준이가 고백하고. 이건 나 뿐 아니라 20대라면 충분히 공감할 거 같다. 20대는 아직 완전하지 않지 않나. 완전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겪게 되는 시행착오가 많을 것이고 현실의 벽 앞에서 타협할지, 내 꿈을 이뤄나갈지 고민해야 하고.

글. 위근우 eight@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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