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인 MBC 구애정(공효진), KBS 이소영(장나라), 노순금(성유리), SBS 공아정(윤은혜)의 일상은 봄날의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사회에서 늙은이로 취급되는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고, 부모의 경제력에 기댈 수도 없으며, 설사 직장이 있다 해도 결혼이라는 다음 산을 넘어야 한다. ‘캔디’나 ‘신데렐라’로 규정될 수 있었던 과거의 드라마 여주인공들과 달리, 이들은 보다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며 살아간다. 왜 그들은 드라마에서마저 달콤한 로맨스를 즐기지 못할까. 봄은 왔지만 현실은 따뜻해지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 속 여주인공들의 고민을 조명했다.1. 일과 사랑, 사랑과 일 – 구애정
집안의 가난을 탓하며 반대할 부모님도 없다.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구애정은 남에게 비치는 이미지가 커리어와 직결된 입장에서 같은 업계에 있는 독고진(차승원)과 편하게 연애할 수 없는 처지다. 엄청난 비호감 이미지를 벗어던지려 후배 아이돌과 덤블링 대결까지 한 구애정이 독고진과 사귀게 된다면 소속사 대표와의 갈등은 물론, 대중에겐 “왕자님이 구해준 비호감 신데렐라”로 다시 직업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 사랑을 믿고 현실을 버리기엔 구애정은 아버지, 오빠, 조카까지 책임져야할 가장이다.
점점 독신 여성과 가정을 책임지는 여성이 늘어나는 요즘, 자신의 일터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독고진에게 “나는 설레면 안 된다”고 말하는 구애정은 지금 20-30대 여성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여성들은 “직장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의 환상 보다는 직장에서 연애를 할 때 겪게 될 수많은 문제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셈이다. 그건 구애정이 “윤필주 씨처럼 괜찮은 사람은 저 같은 사람을 안 좋아하겠죠”라고 웃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터의 가까운 사람은 마음에 들지만 다가설 수 없고, 직장 밖에서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는 나를 좋아할 것 같지 않다. 같은 직장 안에서 나에 대해 공감해줄 수 있는 독고진 같은 남자, 아예 이 힘든 일을 안해도 될 것 같은 믿음을 주는 윤필주. 정말 여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과 사랑, 사랑과 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직장에는 독고진도 윤필주도 없다. 2. 나이와 취업의 상관관계 – 이소영
동안의 여자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능력있고 예쁜 여자가 ‘동안이기도’ 할 때만이다. 사회가 알아줄만한 학력도 없고, 신용불량자인 30대 여자라면 동안은 그저 나이 어린애로 무시당하기 좋은 조건일 뿐이다. 부모님 약 값을 신경 써야 하는 여성은 여느 남자 가장들 못지않게 돈에 절박하지만, 외모와 나이라는 조건 때문에 두 배로 힘들다. 의 이소영은 직장 상사에게 “동안이니 재취업도 잘 될 거다”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들으며 잘리고, 회사 상사보다 나이가 많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재취업도 안 된다. 결국 나이를 속이고 회사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 나이도 어린 게”라는 모욕을 듣는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대로 취업을 걱정해야 하고, 어리면 어린대로 멸시를 견뎌야 한다. 이런 이소영의 모습은 직장에서 “여자 나이 서른이면 한 번 꺾인 할머니”라는 폭언을 들었을 법한 직장 여성들에게 공감을 얻었을 듯 하다.
그러나, 나이가 많든 적든 사는 게 힘든 이소영을 구해주는 건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이다. 무리한 비용 절감에 항의하는 것도, 옷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을 받으러 현장에서 발로 뛰는 것도 최진욱(최다니엘)이다. 정작 이소영은 주변 남자들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알고 보면 똑부러지게 자기 주장을 하던 이소영이 이렇게 잊혀진다면 를 보는 이소영 또래의 여성들은 더더욱 씁쓸하지 않을까. 3. 부모없는 하늘 아래 – 노순금
자녀 한 명을 대학까지 보내는 데 2억 원이 넘는 현실이다. 만약 당신이 부모 없이 대학에 가야 한다면, 당신은 등록금과 사교육비 때문에라도 대학에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은 가사관리사로 일하게 된 노순금 이야기를 통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노순금이 100억짜리 로또에 당첨돼 인생역전의 가능성을 얻는 건 차라리 현실적인 꿈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도박에 손을 대 자식의 발목을 잡는 인생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로또밖에 없어 보인다.
물론 로또의 꿈을 꾸지 않아도 되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서 부모는 여주인공에게 늘 힘과 기운을 주는 존재였다. 여주인공들은 서울에 올라와 힘든 생활을 하거나, 부모 없이 살아가지만 부모가 준 정신적인 따뜻함에 힘을 내기도 하고, 때론 부모가 최소한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1년에 이르러 노순금 같은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20대가 부모에게 기댈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드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점에서 복권에 당첨된 노순금이 아버지의 도박 중독을 막기 위해 다시 가사관리사가 되는 것은 이해가 된다. 1번가 가사관리사들과 함께 복권 추첨을 보며 소주를 들이키던 노순금이 복권 당첨으로 1800만 원짜리 옷을 입게 되지만, 동시에 가사관리사로 살아가며 지금까지 그나마 유지되던 가족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려는 셈이다. 이제 20대 여성은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할 상황이 된 것일까. 4. 결혼밖에 난 몰라 – 공아정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결제일이 다가오는 카드명세서와 같다. 이른바 ‘결혼적령기’를 넘긴 남녀에게 결혼은 언제나 마음의 부채고, 빨리 결제해야할 무엇이 된다. 특히 “시집 잘 가면 팔자 편다”는 식의 교육 아닌 사회의 시선은 여자들에게 결혼이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지게끔 만들기도 했다. 의 공아정은 이런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심리가 극단까지 간 여자다. 5급 공무원이라는 좋은 직업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이 큰 트라우마고, 자신도 좋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 끝에 재벌 3세 현기준(강지환)과 가짜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괜찮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곧바로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가 되는 공아정을 보면 “오죽했으면….”하는 동정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결혼 연령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들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결혼 안하느냐”는 압박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에서 공아정의 결혼관은 “걔는 결혼 했는데 내가 안 했다는 게 너무 싫어. 내가 못나고 부족한 것 같아서 미치겠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는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친구가 재벌 3세와 결혼을 하면 내가 인생의 회의를 느낀다는 의 묘사는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공아정은 직장에서도 현기준(강지환)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얼떨결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마치 직장을 놀이터처럼 알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현실의 고민이 드러나지 않으니 유소란(홍수현)이 “어떻게 니가 나보다 조건 좋은 남자랑 결혼을 하냐”며 울먹이는지도 와닿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끊임없이 결혼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여성에게 결혼, 특히 ‘괜찮은 남자’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가 좀처럼 시청자에게 와닿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는 이유다.
글. 한여울 기자 six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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