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게이가 지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1999년 부터 2011년을 강타한 (이하 )을 제작한 청년필름의 대표이자, 퀴어영화 의 감독인 김조광수는 얼마 전 동성결혼발표로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를 차지했던 뜨거운 게이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6월 2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열리는 제 11회 서울 LGBT영화제(www.selff.org)의 신입 집행위원장이라는 이름표도 하나 더 붙이고 갑니다.
성난 얼굴로 깃발을 든 불타는 운동가가 아니라, 머리에 꽃을 달고 살며시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끄는 즐거운 청년. 그렇게 조금씩 나도 모르게 전진하는 영화인 김조광수와의 ‘인터뷰 100’은 시간의 트랙을 한참 벗어나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진촬영을 위해 다시 만난 그에게 좀 웃어보라고 했더니 “나 잘 웃지를 못해, 그게 참 슬퍼”라고 말합니다. 순간, 명랑쾌활하다고만 기억했던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쳐다보게 됩니다. 마냥 웃을 수는 없지만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하긴, 게이(gay)는 원래 그런 뜻이니까요.
100: ‘영화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정말 한국영화계 안에서 다향한 일을 해오셨는데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처음이시죠?
김조광수: 올해 초에 집행위원장 제의를 받고 고사했는데, LGBT영화제가 지난 3년간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이 끊기면서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결국 국내 유일의 성소수자 영화제가 사라지는 상황까지는 맞이할 수 없어서 승낙했죠. 물론 내가 일한다고 있던 빚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새로운 빚을 지게 해줄 수는 있지 않나며. (웃음) 완전 다른 업무에요. 이렇게 까지 일이 많을지는 몰랐죠.
“성소수자들의 기대, 이제는 즐긴다” 100: 그런데 꽤 재밌어하시는 얼굴인데요?
김조광수: 예. 재밌어요. 전 세계 따끈따끈한 퀴어영화를 한꺼번에 볼 수 있으니까. 또한 뜻하진 않았지만 이 기회로 한국의 퀴어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성소수자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점들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
100: 그런 기대나 기댐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김조광수: 1, 2년 전까지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즐기기로 했어요.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힘들 것 같아서 아예 즐긴다고 마음먹으니까 편안해지고 좋은 것 같아요.
100: 지난 몇 년 사이 김조광수라는 이름엔 ‘감독’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어요.
김조광수: 이송희일 감독의 의 작지만 의미 있는 흥행을 보면서 좀 더 많은 퀴어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감독을 물색을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어요. 제작은 하고 싶고 시장성도 나쁘지 않고 투자하겠다는 데도 있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내가 한번 해볼까 한 거예요. 모두 흔쾌히 해봐, 하더라고요. 물론 조건이 하나 있었죠. 영화는 주말에만 찍을 것. 주중 회사 일에 방해주지 말 것. (웃음) 그렇게 찍은 단편 로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되었죠.
100: 가 10대 게이소년의 첫사랑이야기라면 는 20대 게이청년들의 국방부를 뛰어넘는 사랑이야기인데, 자전적인 부분도 많죠?.
김조광수: 마흔도 넘어서 처음 감독을 한다는 게 부담스럽잖아요. 결국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보니 내 이야기를 내 방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좀 수다스럽고 발랄한 영화로 접근해서 하니까 완성도랑 상관없이, 저만의 특색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제작자로 살면서 대중적으로 뭘 좋아할까하는 고민 속에 꽃미남들을 캐스팅했고. (웃음)
100: 그나저나 아무리 흥행사로서의 본능이라지만 너무 꽃미남만 나오는 거 아닌가요? (웃음) 김혜성, 이현진, 이제훈등 이성애자 배우들과 퀴어 영화를 찍어나가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조광수: 아무래도 이성애자 배우들이 상대에 대한 감정을 끌어낼 때 저 사람이 여자다, 생각하는 조금 쉬운 방법을 택하려고 해요. 그러면 이성애를 넘어서기가 힘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동성애에는 그것과는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게 조금 어렵긴 했죠. 하지만 계속해서 이성애자 배우들하고 일하고 싶어요. 배우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연기가 깊어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는 거고. 퀴어 감독으로서는 동성애자 친화적인 배우들이 많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좋고.
100: 가장 최근작인 는 그전 작품들보다 어두운 작품이었어요. 청각장애인이자 게이라는 불편할 수 있는 조건을 한꺼번에 주인공에게 안겨주기도 했고.
김조광수: 원래 이건 시간적으로 이전의 이야기기 때문에 조금 우울하고 무거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죠. 민수라는 캐릭터 혹은 광수라는 나란 사람이 밝아지기 까지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에요. 사람들은 오해하는데 나도 처음부터 밝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나 역시 너무나 우울한 사춘기를 보낸 끝에 밝아졌죠. 그러니 당신도 그렇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100: 하지만 여전히 김조광수의 영화는 그 어떤 퀴어영화보다 즐거운 영화긴 해요.
김조광수: 내가 만들 영화는 성소수자들에게 건강한 판타지를 줬으면 좋겠어요. 멜로 영화의 경우 이성애자들 역시 현실을 목도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그래서 혹 이거 너무 판타지 아니냐고 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극장 안에서 판타지를 마음껏 꿈꾸라고. 그리고 현실에 가서 그 해피엔딩을 이뤄내는 것을 다시 꿈꾸라고.
“새로운 것들을 찾고 그걸 만들어 가는 사람이 진짜 청년” 100: “코믹 연기를 곧잘 한다는 주위의 격려”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웃음)
김조광수: 예, 처음엔 연기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너무 키도 크고 잘생긴 애들과 너무 개성이 넘치는 애들이 많은 거예요. 나처럼 어중간한 애들을 굳이 쓰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과랑 멀어졌고.
100: 한양대 학생회를 거쳐서 전대협에서도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야였어요?
김조광수: 제가 애국한양가무단 출신이라. 율동패를 담당했죠. (웃음) 공연할 때 지도하고 조직화도하고, 전국에 있는 연극영화과, 영화동아리를 담당했죠. 출범식 때면 아이들 수백 명 모아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100: 의심이나 폄하의 뜻이 아니라, 학생운동 안에서 문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겐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동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말하자면 슈퍼스타가 되지 않는 이상 경험하기 힘든, 엄청난 대중 앞에 선다는 즐거움도 있었지 않았나요?
김조광수: 어머 어머 어머, 나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시작은 아니었지만 이후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가 되게 컸죠. 대학교 2, 3학년, 무대에서 연기자로서 주목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아이가 집회에서 율동하는 걸 누군가 집중해서 바라봐준다는 것.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웃고 울고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났어요. 그래서 학생회장도 한 것 같아요. 대단한 의지나 능력보다는 학생회장을 하면 또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 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니까.
100: 그런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마음이 혹 불온한 건 아닐까 고민하진 않았고요?
김조광수: 아뇨. 전혀요.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감지하고 나서 더 즐겼어요. 그 안에 고민이나 신심을 담기 위해 노력하자. 어쨌든 나는 즐기면서 하니까 억지로 하는 얘들보다 훨씬 열심히 할 수 있잖아요. (웃음) 그게 나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죠.
100: 당시 개봉에 대해 는 “스크린 운동권, 스크럼 짜고 충무로 첫발”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 만큼 ‘영화 제작소 청년’에서 탄생된 청년필름은 ‘대학가 운동권 출신 영화집단’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 집단의 창립작이 파격 멜로영화 라는 데 의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김조광수: 사실 나를 제외한 청년필름의 누구도 조직운동가 출신은 아니었어요. 그저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고 학생운동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을 뿐이에요. 외부에서 그냥 그런 이미지로 비춰진 거죠. 어떤 걸 첫 작품으로 할까, 했을 때 정지우 감독이 세기말에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이 가진 모순과 이중성을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이야기 해보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가 만들어졌어요. 주인공이 노동운동을 하거나 하층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외라고 느낄 수 있지만 본질은 똑같았다고 생각했어요.
100: 사실 영화에 있어 제작자는 하는 일에 비하면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과연 그게 천성적으로 잘 맞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김조광수: 천성적으로는 (웃음) 안 맞았죠. 영화제 갈 때 마다 약간의 질투나 아쉬움이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모두 감독에게만 집중하잖아요. 아! 내가 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과 노력이 있었는데 왜 나는 몰라주는 거야, 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처음엔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감동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허전한 마음이 조금씩 커지더라고요. 물론 질투심에 울고불고는 안했지만. (웃음) 그러다가 첫 번째 연출한 단편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는 어머, 감독으로 오면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정말로 만끽했어요. 관객들이 영화와 나를 바로 연결시켜서 이해해주니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100: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즐거워지신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그러나 지난 10년간을 돌이켜보면 항상 제작비 구하러 다니시던 모습이 선해서 눈물이… (웃음) 그렇게 꾸려온 청년필름도 벌써 13년째네요. , , 등 그 사이 많은 영화들을 만들어오면서 사실 대표로서는 견디기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시간들도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조광수: 포기 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구성원들이 잡아줬어요. 중간에 이제 영화 그만두겠다고 이야기 한 적 있었는데 그래도 이만큼 왔는데 우리를 믿고 좀 더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며칠 동안 도망간 적도 있었는데 갑자기 떠나더라도 후배들에게 보다 나은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것도 좀 강박인데 동성애 운동할 때도, 영화하는 후배들에게도 뭔가 비전 같은 걸 제시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 같아요. 나로 인해서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이 내 못난 모습 때문에 희망을 꺾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 같은.
“아이들이 성소수자라고 우울하게 살지 않았으면” 100: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컸죠?
김조광수: 예, 작년 11월, 12월이 제일 힘들었어요. 빚이 정말 쌓일 대로 쌓였고 더 이상 끌어올 데도 없는데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들기 시작하는 거죠. 당시 촬영하던 이 흥행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개봉하면 당신들 빚 싹 갚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너는 늘 그렇게 말했다면서 안 믿는거죠.
100: 그러다 이 결국 박스오피스에서 터졌을 때, 그 희열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겠네요.
김조광수: 어휴, 말도 못하죠. 그리고 일단 대중영화를 만든다고 시작한 사람인데 수백만의 관객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짜릿함도 처음 느껴봤죠. 좋은 영화 만들었다는 칭찬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갈증이 그때 확, 해소되는 기분이랄까.
100: 3년 전 청년필름 10주년 영화제 트레일러에서 박해일 씨가 했던 “10년이 지났지만 10년이 또 지난다고 해도 나는 청년”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김조광수: 이제 ‘중년필름’ 아냐? 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웃음) 물론 생물학적 세대를 나타내는 단어지만 정신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들을 찾고 그걸 만들어 가는 사람이 진짜 청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죠.
100: 청년스러움을 유지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요?
김조광수: 노력한다기보다 기본적으로 아직 철이 없어요. 감독데뷔도 다른 영화사 대표들은 다 말렸어요. 만약에 못하면 체면도 안서고 득 될게 뭐있냐고. 그런데 안됐을 때를 걱정하는 거,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 그게 기성세대잖아요. 저는 여전히 그런 두려움은 없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아직 철이 없는 것, 그게 저의 청년스러움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100: 지금이야 대한민국이 다 아는 대표 게이 영화인이 되었지만 사실 어머니에게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기 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조광수: 오래 걸렸죠, 마음먹었다 되돌아서고 마음먹었다 되돌아서고… 몇 년이 걸린 것 같아요. 정말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고, 안 할 수 있다면 안하고 싶죠. 모든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자로 살고 싶은 마음일거예요. 특히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나 편하자고 부모님 괴롭히는 게 아닐까. 결국 커밍아웃으로 부모님도 나도 다 행복해지는 길인데도 그 과정은 어쨌든 힘드니까요. 그 이후도 몇 년간은 어려웠어요. 나는 그래도 몇 년의 기간 동안 준비를 했는데 엄마는 준비 없이 당한 일이잖아요. 부모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이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동시에 감싸줘야 하는 위치니까요.
100: 결혼을 결심한 애인도 얼마 전 커밍아웃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 똑같은 과정을 옆에서 다시 목격한 심경은 어떠셨어요?
김조광수: 그 과정을 보면서 결심한 게 동성애자 가족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성소수자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나만 이런 괴로움을 겪는 것 같은 외로움에 봉착해있어요.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주변에 털어놓을 사람도 없죠, 조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그 과정이 짧아지고 좀 편해질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지금 그럼 가족모임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100: 하지만 커밍아웃은 엄마 끝나면 아버지, 아빠 끝나면 친척, 친구, 직장….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거다, 라는 말을 했는데요. 한 개인의 운동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 고난의 행군에 총대를 메고 앞장서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조광수: 처음부터 난 이렇게 살아야지, 의도한 삶은 아니에요. 그런데 살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것도 있고, 어느 순간 그걸 즐기게 됐고, 즐기게 된 이후에는 그걸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해서 더 행복하게 살고 싶고요.
100: 결국 큰 목표라기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행보인 셈이네요.
김조광수: 그게 기본이죠. 그런데 사실 큰 목표도 있어요. (웃음) 무지개빌딩을 짓고 싶어요. 퀴어 센터, 인권 센터 같은 거. 빨주노초파남보 층마다 색깔이 다른.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장기적인 목표죠. 내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이 후배들이 그런 식으로 아름다운 청소년기를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난 그럼 좋은 남자 만나야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왜 나는 남자를 좋아할까? 고쳐볼까? 이런 생각으로 낭비하지 말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고칠 수 있다면 지금도 모든 성소수자들이 고칠 텐데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증명이 된 것이기 때문에 우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이.
“어린시절부터 다이애나와 찰스의 로열웨딩을 꿈꿨어요” 100: 지난 10년간 게이에 대한 많은 인식의 변화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특히 김수현 작가가 공중파 드라마 SBS 에서 게이커플을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키고 구체적인 고민을 보여주었던 건 놀라운 변화였죠?
김조광수: 놀라웠죠. 기본적으로 김수현은 대가족주의자인데, 그런 사람이 가족 안에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였잖아요. 그건 퀴어에 대한 인식의 폭과 세대의 폭을 확 넓히는 일이었어요. 특히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지켜주신 건 엄청난 감동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작년에 공로패를 전달해 드렸어요. 처음에는 안 받으시겠다고 했는데 이메일로 간곡히 부탁드렸더니 와서 받는 건 너무 쑥스럽다고 하셔서 댁으로 보내드렸어요.
100: 워낙 많은 이슈를 낳았던 드라마지만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지도 궁금하네요.
김조광수: 몇몇 사람들은 때문에 불편하다는 말도 했어요. 사람들이 자꾸 관심을 가지니까 숨기 어렵다는 거죠.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많이 싸웠어요. 너는 누릴 것만 누리고 조금도 불편한 걸 못 참는구나. 누군가 이런 선구적인 일들을 안 해줬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태양 아래서 놀 수 있었겠냐고. 2, 30년 전처럼 골방 숨어 있었을 거라고. 정말 이기적인 아이라고. 그러나 그런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수현 선생님을 경배하는 수준이었어요. 방송하는 날이면 거의 대관수준으로 같이 보면서 울고, 웃고. 다만 아쉬움이 있었다면 좀 더 과감하게 하셨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30대들인데 설마 이제 자는 거야? 벌써 100번은 잤을 텐데! 같은. (웃음)
100: 첫 장편이 될 은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요.
김조광수: 게이와 레즈비언이 결혼압박이 들어오니까 둘이 위장결혼을 하려고 해요. 게이는 어머니가 집 사준 돈을 들고 외국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을 꾸고, 레즈비언은 아이를 입양을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결혼식 날 축의금 내주러 온 남자와 눈이 맞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죠. 노래와 춤이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 같아요. 지금 캐스팅 중인데 배우들 좀 추천해줘요. (웃음)
100: 최근 동성결혼 발표로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장식하셨죠?
김조광수: 정말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다가오셔서 결혼하신다는 그 분이시죠? 축하해요, 라고 해주시는 일반인이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나를 알아보고 싫어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직접 다가와서 싫은 티까지는 안내니까. (웃음) 이런 관심이 오히려 저는 기뻐요.
100: 혹시 어린시절부터 늘 꿈꿔온 결혼식의 로망이 있나요?
김조광수: 다이아나와 찰스! 당연히 로열웨딩이죠. 이번에 윌리엄을 보면서도 나도 어서 저런 거해야 하는데, 했죠. (웃음) 사실 온 매체가 다 동원된 성대한 결혼식에 대해서는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해 약간의 편견이 있던 사람들이 매체에서 나의 결혼식을 접하게 된다면 좀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해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도 지지하는구나, 아마 내가 편견이 있었나보나 느끼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100: 언제쯤이 될까요? 꼭 참석하겠습니다. (웃음)
김조광수: 내년 LGBT 영화제가 열리는 6월 쯤? 내가 아는 사람들 총출동 시킬 테야.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사회보고 축가는 아이돌이 부르고 주례는 영화제 위원장님이 하는 식이라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변했구나 하고 느낄지도 모르잖아요. 영화 개봉하듯이 잘 준비해야지. 제작보고회 하는 것처럼 기자회견도 하고, 홍보대행사 정해서 보도자료 뿌리고 대한민국 매체 다 불러서. 아! 엄정화 언니가 나와서 노래불러주면 좋겠어요.
글,사진. 백은하 기자 one@
편집. 장경진 three@
편집. 이지혜 seven@
성난 얼굴로 깃발을 든 불타는 운동가가 아니라, 머리에 꽃을 달고 살며시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끄는 즐거운 청년. 그렇게 조금씩 나도 모르게 전진하는 영화인 김조광수와의 ‘인터뷰 100’은 시간의 트랙을 한참 벗어나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진촬영을 위해 다시 만난 그에게 좀 웃어보라고 했더니 “나 잘 웃지를 못해, 그게 참 슬퍼”라고 말합니다. 순간, 명랑쾌활하다고만 기억했던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쳐다보게 됩니다. 마냥 웃을 수는 없지만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하긴, 게이(gay)는 원래 그런 뜻이니까요.
100: ‘영화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정말 한국영화계 안에서 다향한 일을 해오셨는데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처음이시죠?
김조광수: 올해 초에 집행위원장 제의를 받고 고사했는데, LGBT영화제가 지난 3년간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이 끊기면서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결국 국내 유일의 성소수자 영화제가 사라지는 상황까지는 맞이할 수 없어서 승낙했죠. 물론 내가 일한다고 있던 빚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새로운 빚을 지게 해줄 수는 있지 않나며. (웃음) 완전 다른 업무에요. 이렇게 까지 일이 많을지는 몰랐죠.
“성소수자들의 기대, 이제는 즐긴다” 100: 그런데 꽤 재밌어하시는 얼굴인데요?
김조광수: 예. 재밌어요. 전 세계 따끈따끈한 퀴어영화를 한꺼번에 볼 수 있으니까. 또한 뜻하진 않았지만 이 기회로 한국의 퀴어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성소수자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점들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
100: 그런 기대나 기댐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김조광수: 1, 2년 전까지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즐기기로 했어요.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힘들 것 같아서 아예 즐긴다고 마음먹으니까 편안해지고 좋은 것 같아요.
100: 지난 몇 년 사이 김조광수라는 이름엔 ‘감독’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어요.
김조광수: 이송희일 감독의 의 작지만 의미 있는 흥행을 보면서 좀 더 많은 퀴어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감독을 물색을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어요. 제작은 하고 싶고 시장성도 나쁘지 않고 투자하겠다는 데도 있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내가 한번 해볼까 한 거예요. 모두 흔쾌히 해봐, 하더라고요. 물론 조건이 하나 있었죠. 영화는 주말에만 찍을 것. 주중 회사 일에 방해주지 말 것. (웃음) 그렇게 찍은 단편 로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되었죠.
100: 가 10대 게이소년의 첫사랑이야기라면 는 20대 게이청년들의 국방부를 뛰어넘는 사랑이야기인데, 자전적인 부분도 많죠?.
김조광수: 마흔도 넘어서 처음 감독을 한다는 게 부담스럽잖아요. 결국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보니 내 이야기를 내 방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좀 수다스럽고 발랄한 영화로 접근해서 하니까 완성도랑 상관없이, 저만의 특색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제작자로 살면서 대중적으로 뭘 좋아할까하는 고민 속에 꽃미남들을 캐스팅했고. (웃음)
100: 그나저나 아무리 흥행사로서의 본능이라지만 너무 꽃미남만 나오는 거 아닌가요? (웃음) 김혜성, 이현진, 이제훈등 이성애자 배우들과 퀴어 영화를 찍어나가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조광수: 아무래도 이성애자 배우들이 상대에 대한 감정을 끌어낼 때 저 사람이 여자다, 생각하는 조금 쉬운 방법을 택하려고 해요. 그러면 이성애를 넘어서기가 힘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동성애에는 그것과는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게 조금 어렵긴 했죠. 하지만 계속해서 이성애자 배우들하고 일하고 싶어요. 배우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연기가 깊어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는 거고. 퀴어 감독으로서는 동성애자 친화적인 배우들이 많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좋고.
100: 가장 최근작인 는 그전 작품들보다 어두운 작품이었어요. 청각장애인이자 게이라는 불편할 수 있는 조건을 한꺼번에 주인공에게 안겨주기도 했고.
김조광수: 원래 이건 시간적으로 이전의 이야기기 때문에 조금 우울하고 무거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죠. 민수라는 캐릭터 혹은 광수라는 나란 사람이 밝아지기 까지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에요. 사람들은 오해하는데 나도 처음부터 밝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나 역시 너무나 우울한 사춘기를 보낸 끝에 밝아졌죠. 그러니 당신도 그렇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100: 하지만 여전히 김조광수의 영화는 그 어떤 퀴어영화보다 즐거운 영화긴 해요.
김조광수: 내가 만들 영화는 성소수자들에게 건강한 판타지를 줬으면 좋겠어요. 멜로 영화의 경우 이성애자들 역시 현실을 목도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그래서 혹 이거 너무 판타지 아니냐고 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극장 안에서 판타지를 마음껏 꿈꾸라고. 그리고 현실에 가서 그 해피엔딩을 이뤄내는 것을 다시 꿈꾸라고.
“새로운 것들을 찾고 그걸 만들어 가는 사람이 진짜 청년” 100: “코믹 연기를 곧잘 한다는 주위의 격려”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웃음)
김조광수: 예, 처음엔 연기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너무 키도 크고 잘생긴 애들과 너무 개성이 넘치는 애들이 많은 거예요. 나처럼 어중간한 애들을 굳이 쓰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과랑 멀어졌고.
100: 한양대 학생회를 거쳐서 전대협에서도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야였어요?
김조광수: 제가 애국한양가무단 출신이라. 율동패를 담당했죠. (웃음) 공연할 때 지도하고 조직화도하고, 전국에 있는 연극영화과, 영화동아리를 담당했죠. 출범식 때면 아이들 수백 명 모아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100: 의심이나 폄하의 뜻이 아니라, 학생운동 안에서 문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겐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동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말하자면 슈퍼스타가 되지 않는 이상 경험하기 힘든, 엄청난 대중 앞에 선다는 즐거움도 있었지 않았나요?
김조광수: 어머 어머 어머, 나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시작은 아니었지만 이후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가 되게 컸죠. 대학교 2, 3학년, 무대에서 연기자로서 주목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아이가 집회에서 율동하는 걸 누군가 집중해서 바라봐준다는 것.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웃고 울고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났어요. 그래서 학생회장도 한 것 같아요. 대단한 의지나 능력보다는 학생회장을 하면 또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 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니까.
100: 그런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마음이 혹 불온한 건 아닐까 고민하진 않았고요?
김조광수: 아뇨. 전혀요.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감지하고 나서 더 즐겼어요. 그 안에 고민이나 신심을 담기 위해 노력하자. 어쨌든 나는 즐기면서 하니까 억지로 하는 얘들보다 훨씬 열심히 할 수 있잖아요. (웃음) 그게 나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죠.
100: 당시 개봉에 대해 는 “스크린 운동권, 스크럼 짜고 충무로 첫발”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 만큼 ‘영화 제작소 청년’에서 탄생된 청년필름은 ‘대학가 운동권 출신 영화집단’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 집단의 창립작이 파격 멜로영화 라는 데 의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김조광수: 사실 나를 제외한 청년필름의 누구도 조직운동가 출신은 아니었어요. 그저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고 학생운동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을 뿐이에요. 외부에서 그냥 그런 이미지로 비춰진 거죠. 어떤 걸 첫 작품으로 할까, 했을 때 정지우 감독이 세기말에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이 가진 모순과 이중성을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이야기 해보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가 만들어졌어요. 주인공이 노동운동을 하거나 하층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외라고 느낄 수 있지만 본질은 똑같았다고 생각했어요.
100: 사실 영화에 있어 제작자는 하는 일에 비하면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과연 그게 천성적으로 잘 맞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김조광수: 천성적으로는 (웃음) 안 맞았죠. 영화제 갈 때 마다 약간의 질투나 아쉬움이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모두 감독에게만 집중하잖아요. 아! 내가 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과 노력이 있었는데 왜 나는 몰라주는 거야, 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처음엔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감동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허전한 마음이 조금씩 커지더라고요. 물론 질투심에 울고불고는 안했지만. (웃음) 그러다가 첫 번째 연출한 단편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는 어머, 감독으로 오면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정말로 만끽했어요. 관객들이 영화와 나를 바로 연결시켜서 이해해주니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100: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즐거워지신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그러나 지난 10년간을 돌이켜보면 항상 제작비 구하러 다니시던 모습이 선해서 눈물이… (웃음) 그렇게 꾸려온 청년필름도 벌써 13년째네요. , , 등 그 사이 많은 영화들을 만들어오면서 사실 대표로서는 견디기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시간들도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조광수: 포기 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구성원들이 잡아줬어요. 중간에 이제 영화 그만두겠다고 이야기 한 적 있었는데 그래도 이만큼 왔는데 우리를 믿고 좀 더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며칠 동안 도망간 적도 있었는데 갑자기 떠나더라도 후배들에게 보다 나은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것도 좀 강박인데 동성애 운동할 때도, 영화하는 후배들에게도 뭔가 비전 같은 걸 제시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 같아요. 나로 인해서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이 내 못난 모습 때문에 희망을 꺾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 같은.
“아이들이 성소수자라고 우울하게 살지 않았으면” 100: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컸죠?
김조광수: 예, 작년 11월, 12월이 제일 힘들었어요. 빚이 정말 쌓일 대로 쌓였고 더 이상 끌어올 데도 없는데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들기 시작하는 거죠. 당시 촬영하던 이 흥행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개봉하면 당신들 빚 싹 갚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너는 늘 그렇게 말했다면서 안 믿는거죠.
100: 그러다 이 결국 박스오피스에서 터졌을 때, 그 희열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겠네요.
김조광수: 어휴, 말도 못하죠. 그리고 일단 대중영화를 만든다고 시작한 사람인데 수백만의 관객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짜릿함도 처음 느껴봤죠. 좋은 영화 만들었다는 칭찬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갈증이 그때 확, 해소되는 기분이랄까.
100: 3년 전 청년필름 10주년 영화제 트레일러에서 박해일 씨가 했던 “10년이 지났지만 10년이 또 지난다고 해도 나는 청년”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김조광수: 이제 ‘중년필름’ 아냐? 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웃음) 물론 생물학적 세대를 나타내는 단어지만 정신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들을 찾고 그걸 만들어 가는 사람이 진짜 청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죠.
100: 청년스러움을 유지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요?
김조광수: 노력한다기보다 기본적으로 아직 철이 없어요. 감독데뷔도 다른 영화사 대표들은 다 말렸어요. 만약에 못하면 체면도 안서고 득 될게 뭐있냐고. 그런데 안됐을 때를 걱정하는 거,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 그게 기성세대잖아요. 저는 여전히 그런 두려움은 없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아직 철이 없는 것, 그게 저의 청년스러움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100: 지금이야 대한민국이 다 아는 대표 게이 영화인이 되었지만 사실 어머니에게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기 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조광수: 오래 걸렸죠, 마음먹었다 되돌아서고 마음먹었다 되돌아서고… 몇 년이 걸린 것 같아요. 정말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고, 안 할 수 있다면 안하고 싶죠. 모든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자로 살고 싶은 마음일거예요. 특히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나 편하자고 부모님 괴롭히는 게 아닐까. 결국 커밍아웃으로 부모님도 나도 다 행복해지는 길인데도 그 과정은 어쨌든 힘드니까요. 그 이후도 몇 년간은 어려웠어요. 나는 그래도 몇 년의 기간 동안 준비를 했는데 엄마는 준비 없이 당한 일이잖아요. 부모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이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동시에 감싸줘야 하는 위치니까요.
100: 결혼을 결심한 애인도 얼마 전 커밍아웃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 똑같은 과정을 옆에서 다시 목격한 심경은 어떠셨어요?
김조광수: 그 과정을 보면서 결심한 게 동성애자 가족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성소수자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나만 이런 괴로움을 겪는 것 같은 외로움에 봉착해있어요.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주변에 털어놓을 사람도 없죠, 조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그 과정이 짧아지고 좀 편해질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지금 그럼 가족모임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100: 하지만 커밍아웃은 엄마 끝나면 아버지, 아빠 끝나면 친척, 친구, 직장….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거다, 라는 말을 했는데요. 한 개인의 운동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 고난의 행군에 총대를 메고 앞장서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조광수: 처음부터 난 이렇게 살아야지, 의도한 삶은 아니에요. 그런데 살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것도 있고, 어느 순간 그걸 즐기게 됐고, 즐기게 된 이후에는 그걸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해서 더 행복하게 살고 싶고요.
100: 결국 큰 목표라기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행보인 셈이네요.
김조광수: 그게 기본이죠. 그런데 사실 큰 목표도 있어요. (웃음) 무지개빌딩을 짓고 싶어요. 퀴어 센터, 인권 센터 같은 거. 빨주노초파남보 층마다 색깔이 다른.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장기적인 목표죠. 내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이 후배들이 그런 식으로 아름다운 청소년기를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난 그럼 좋은 남자 만나야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왜 나는 남자를 좋아할까? 고쳐볼까? 이런 생각으로 낭비하지 말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고칠 수 있다면 지금도 모든 성소수자들이 고칠 텐데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증명이 된 것이기 때문에 우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이.
“어린시절부터 다이애나와 찰스의 로열웨딩을 꿈꿨어요” 100: 지난 10년간 게이에 대한 많은 인식의 변화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특히 김수현 작가가 공중파 드라마 SBS 에서 게이커플을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키고 구체적인 고민을 보여주었던 건 놀라운 변화였죠?
김조광수: 놀라웠죠. 기본적으로 김수현은 대가족주의자인데, 그런 사람이 가족 안에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였잖아요. 그건 퀴어에 대한 인식의 폭과 세대의 폭을 확 넓히는 일이었어요. 특히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지켜주신 건 엄청난 감동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작년에 공로패를 전달해 드렸어요. 처음에는 안 받으시겠다고 했는데 이메일로 간곡히 부탁드렸더니 와서 받는 건 너무 쑥스럽다고 하셔서 댁으로 보내드렸어요.
100: 워낙 많은 이슈를 낳았던 드라마지만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지도 궁금하네요.
김조광수: 몇몇 사람들은 때문에 불편하다는 말도 했어요. 사람들이 자꾸 관심을 가지니까 숨기 어렵다는 거죠.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많이 싸웠어요. 너는 누릴 것만 누리고 조금도 불편한 걸 못 참는구나. 누군가 이런 선구적인 일들을 안 해줬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태양 아래서 놀 수 있었겠냐고. 2, 30년 전처럼 골방 숨어 있었을 거라고. 정말 이기적인 아이라고. 그러나 그런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수현 선생님을 경배하는 수준이었어요. 방송하는 날이면 거의 대관수준으로 같이 보면서 울고, 웃고. 다만 아쉬움이 있었다면 좀 더 과감하게 하셨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30대들인데 설마 이제 자는 거야? 벌써 100번은 잤을 텐데! 같은. (웃음)
100: 첫 장편이 될 은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요.
김조광수: 게이와 레즈비언이 결혼압박이 들어오니까 둘이 위장결혼을 하려고 해요. 게이는 어머니가 집 사준 돈을 들고 외국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을 꾸고, 레즈비언은 아이를 입양을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결혼식 날 축의금 내주러 온 남자와 눈이 맞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죠. 노래와 춤이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 같아요. 지금 캐스팅 중인데 배우들 좀 추천해줘요. (웃음)
100: 최근 동성결혼 발표로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장식하셨죠?
김조광수: 정말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다가오셔서 결혼하신다는 그 분이시죠? 축하해요, 라고 해주시는 일반인이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나를 알아보고 싫어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직접 다가와서 싫은 티까지는 안내니까. (웃음) 이런 관심이 오히려 저는 기뻐요.
100: 혹시 어린시절부터 늘 꿈꿔온 결혼식의 로망이 있나요?
김조광수: 다이아나와 찰스! 당연히 로열웨딩이죠. 이번에 윌리엄을 보면서도 나도 어서 저런 거해야 하는데, 했죠. (웃음) 사실 온 매체가 다 동원된 성대한 결혼식에 대해서는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해 약간의 편견이 있던 사람들이 매체에서 나의 결혼식을 접하게 된다면 좀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해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도 지지하는구나, 아마 내가 편견이 있었나보나 느끼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100: 언제쯤이 될까요? 꼭 참석하겠습니다. (웃음)
김조광수: 내년 LGBT 영화제가 열리는 6월 쯤? 내가 아는 사람들 총출동 시킬 테야.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사회보고 축가는 아이돌이 부르고 주례는 영화제 위원장님이 하는 식이라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변했구나 하고 느낄지도 모르잖아요. 영화 개봉하듯이 잘 준비해야지. 제작보고회 하는 것처럼 기자회견도 하고, 홍보대행사 정해서 보도자료 뿌리고 대한민국 매체 다 불러서. 아! 엄정화 언니가 나와서 노래불러주면 좋겠어요.
글,사진. 백은하 기자 one@
편집. 장경진 thre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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