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을 품은 여성들이 모이는 산부인과는 그 자체로 이야기의 보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산모와 아기의 가족과 개인사가 얽혀들면서 SBS 의 수많은 사연들은 무한 팽창한다. 장애아를 가진 산모, 손주를 안기 위해 며느리의 목숨은 안중에 없는 시어머니, 미성년자 임신과 낙태까지.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수만큼 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모습을 바꿔 등장한다. 그러나 생명과 인간성, 사회의 윤리와 도덕까지 결코 쉽지 않은 개념들이 얽혀있는 사건들은 그 무게에 비해 매회 너무 쉽게 종결되거나 가치판단을 미루기도 한다. 가 새로운 메디컬 드라마의 탄생을 알릴지, 그저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나열에 그칠 것인지 김선영, 윤이나 TV 평론가가 말한다. /편집자주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여자의 일생은 보통 세 가지 이름으로 요약된다. 딸과 아내와 어머니. SBS 는 그러한 생이 압축된 장소로서 가장 드라마틱한 여성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산부인과를 배경으로 한 메디컬드라마다. 기존 메디컬드라마에서 절대적 능력을 지닌 신의(神醫) 캐릭터는 대개 남성이었고 병원이라는 배경 또한 그들이 장악하는 수술실처럼 배틀과 권력 투쟁의 남성적 공간으로 그려질 때, 는 그 특수한 여성적 공간을 중심으로 여성 메디컬드라마의 한 가능성을 마련한다. 하지만 그곳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우호적이기만 한 공간인지는 아직 판단이 어렵다. 2회의 부제를 빌려 말하자면 여성을 바라보는 이 드라마의 태도엔 ‘비밀이 많다.’
여성 메디컬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 vs <산부인과>│산부인과에 간 여자들" />의 가장 독특한 점은 원톱 주인공이자 절대 실력자인 산과 과장 서혜영(장서희)이라는 캐릭터가 의사와 환자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에피소드의 성격을 요약하는 매회의 부제는 혜영의 상황과 일치하며, 임산부로서 뱃속의 태아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은 그녀를 찾는 여성 환자들의 고민과 많은 부분 중첩된다. 혜영의 환자들은 대부분 약자로서의 여성들이다. 1회의 윤진(현영)은 여성 연예인들이 겪는 온갖 루머들을 감내해야 하는 주인공으로 장애아를 낳고 이혼까지 당한다. 2회의 한 산모는 “애 낳는 기계” 취급을 받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5회의 상미(김혜지)는 성폭행을 당했는데도 오히려 ‘왜 남자를 따라갔느냐’는 질문을 받는 가출 소녀다.
혜영 역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산부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보호자 없이는 중절수술조차 불가능하며, 외부의 시선으로는 유부남과 “적당히 놀다가 순순히 떨어져주는 여자”에 미혼모일 뿐이다. 혜영과 환자들 간의 이러한 관계, 즉 정서적 유대감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에 대한 공감, 그리고 똑같이 입덧으로 괴로워하고 하혈을 하는 물리적 유대감은 여성 메디컬드라마로서 의 성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리하여 혜영이 눈물 흘리는 상미를 말없이 안아주고 구순열 태아를 사산한 산모의 손을 잡아주는 장면에 흐르는 공감의 정서는 기존 메디컬드라마에서 의사와 환자들이 나누던 인간적 유대관계보다 더 밀도 높은 여성들 특유의 유대감을 전해주게 된다.
여성은 모성으로 완성되어야만 할까
하지만 이 드라마가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종종 이중적인 면이 감지된다. 여자의 일생 가운데 아내나 어머니의 이름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들은 불완전한 존재처럼 그려진다는 점 때문이다. “여자가 평생 아이 하나 못 낳는 게 그게 어떤 건지 알아?”라는 불임클리닉 의사 재석(서지석)의 말이나, “남자들이 총으로 전쟁을 치르듯 여자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산부인과에서 치르는 피와의 전쟁”이라는 혜영의 말에는 산부인과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러한 드라마의 이중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혜영의 임신 모티브라는 점은 큰 아이러니다. 임신은 분명히 그녀가 환자들을 더 잘 이해하고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해주는 계기이자 에 여성 메디컬드라마로서 개성을 부여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미 의사로서 완벽한 실력과 책임감을 지닌 혜영에게 모성의 획득이 단 하나 남은 성장의 단계처럼 그려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희생과 양보라고는 모르고 그래서 결혼도 안한’ 혜영은 아이를 원치 않는 서진(정호빈) 때문에 수술을 결심하지만, 그녀 자신의 말대로 “모든 걸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그 아이를 결국은 낳게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기에는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상식(고주원)과의 멜로 플롯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전개 과정에서 가 진정한 여성 메디컬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열지 아니면 저출산 시대의 모성 예찬 드라마로 남게 될지의 운명이 달려있을 것이다.
글 김선영
겨우 갖게 된 아기가 구순염일 가능성이 있다. 입술만 갈라져 있다면 성형수술로 나아질 수 있지만, 입천장까지 갈라져 있다면 성형수술로도 흉터를 없애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장애 유무에 따라 아이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기한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날, 정밀 초음파 검사를 할 때 아기는 끝까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결국 특별한 이유 없이 사망하고 만다. SBS 에서 선택의 문제는 단지 산모와 산모의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의료진을 포함해 다양한 이유로 산부인과를 찾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태아에게까지 주어진 것이다. 산부인과에서는 “산모와 아기, 두 사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그 선택의 결과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글. 김선영(TV평론가)
산부인과, 사연 많은 그곳에서 vs <산부인과>│산부인과에 간 여자들" />집안의 병력이 재벌 시댁에 알려질까 두려워 다운증후군에 걸린 태아를 출산할 때 죽여줄 것을 부탁하는 전직 아나운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일까 두려워 태아의 혈액형 검사를 요구하는 여인,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아내의 숨을 연장해 가며 태어날 아기를 기다려야 하는 남편, 파충류 같은 피부로 태어난 쌍둥이 중 한 아이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숨겨야 하는 아빠. 는 산모와 태아 중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이렇게 싸우는 동안 생존확률은 50%에서 20%로 내려갔다”는 서혜영(장서희)의 일갈처럼, 짧은 시간 안에 그 선택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산 자의 선택이 죽어가는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장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혜영은 무조건적으로 환자를 우선하는 선택을 하고, 소아과 의사인 이상식(고주원)도 마찬가지다. 에서 의사들은 직업에 대한 고뇌나 의문 없이 당위에 따라 움직인다. 이상식이 끊임없이 서혜영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에서 의사들은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거나, 너무나 쉽고 당연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오히려 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보다 ‘산부인과에 찾아온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인간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흥미로워진다. 그 인간성은 선한 본성일 때도 있지만 대개 이기적이고, 악하며,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듯, 안에는 추악하고 더러우며 연약한 모습들도 존재한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며느리를 두고 대를 이을 걱정부터 하는 시부모와, 임신 중독의 위험성도 무시하고 좋은 사주에 맞춰 아기를 낳고자 하는 산모, 서로를 속이는 부부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산부인과로 모여들고, 이들의 각기 다른 사연은 를 ‘이야기’가 풍성한 드라마로 보이게 한다. 그렇게 생과 사를 가르는 선택의 문제들 사이로 산부인과에서만 볼 수 있는 질병들이나 불임, 태아 자살, 부부나 연인 사이의 문제, 미성년자의 임신과 출산 같이 다양한 이야기들이 겹쳐질 때, 의 사연들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실생활에 관련된 드라마로서 현실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나가야 하는 의사들의 사연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는 마치 산부인과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보인다.
진짜 산부인과의 이야기를 보여줄 순간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의 선택은, 이 드라마의 가제였던 ‘산부인과 여의사’가 말해주듯, 서혜영이라는 의사의 존재다. 서혜영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환자를 생각하며 현명한 선택을 하는 의사다. 하지만 막장드라마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혜영은 처음부터 불륜과 임신, 낙태라는 문제를 제 안에 끌어안고 있었다. 는 그녀에게 역시 잔인한 선택의 문제를 던져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서혜영은 다른 산모의 아기를 위해서는 열이 나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서라도 일을 하고, 책임지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 대한 문제는 미뤄왔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 앞에 정면으로 맞설 시기가 왔다. ‘산부인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두 목숨으로 인한 책임감과 또 그로 인한 모순까지 제 안에 간직하고 있는 의사가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산부인과’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글 윤이나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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