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이라는 흔하디흔한 표현이 어떤 이의 인생을 만나면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수식이 되기도 한다. 배우 고현정의 지난 삶은 참 영화, 같았다. 엄마 말 잘 듣던 키 큰 소녀는 어느 날 “수영복 입고 띠 두르고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갔고, 이내 전 국민이 알만한 유명배우가 되었으며,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마였던 SBS <모래시계>의 주인공으로 잊을 수 없는 명징한 기억을 시청자들의 가슴에 남겼다. 그러다 돌연 결혼을 발표했고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아이 둘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간 옛사랑은 10년간의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이혼을 알렸다. 그로부터 6년, 고현정은 이제 겨우 한 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어놓은 배우지만, 그녀의 인생 스크린 위로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드라마틱해서 오히려 클리세 같이 느껴지는 그런 일들이 말이다.
한 번의 긴 이별 끝에 만난 연인에 대한 마음이 이럴까? 10년의 공백을 지나 다시 만난 고현정은 되도록이면 똑같은 헤어짐을 반복하지 않고 싶은 배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선 분명하고 또록또록한 연기도 그러하거니와, 특유의 드세지 않으면서도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대체할 배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다. 누이 같은 포근함과 형 같은 든든함이 공존하고 감성과 이성의 추를 공평하게 품고 걸어가는 이 배우의 발걸음은 확신에 차 있지만 무겁지는 않다. 싫고 좋고가 홍해 갈라지듯 분명하고, 세상사 이치를 이야기 할 땐 몇 갑자 산 신령님의 지혜와 달관이 부럽지 않은 여자, 때론 7살 소년 같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마음을 움직였던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이야기 할 때는 이내 눈가가 발갛게 붉어지는 소녀. “좋아하는 영화는 꼭 두, 세 번 이상 보고, 어떤 영화는 설거지하면서, 딴 일 하면서도, 마냥 틀어놓고 있어도 좋다”는 고현정. 다음은 그녀가 직접 고른 그 반복의 리스트, 사랑의 블랙홀들이다.
1. <노팅힐>(Notting Hill)
1999년 │ 감독 로저 미첼
“결혼생활 할 때 보스턴에 가서 두 달 정도 혼자 있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 때 주구장창 이 영화만 틀어놨던 것 같아요. 홀로 타지에 있는 저에게는 더 없는 위로를 준 영화였죠.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다루면서 크게 무리수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갖잖아요.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그런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고. (웃음) 내가 줄리아 로버츠가 되면 감사하고, 휴 그랜트여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그들의 친구나 가족이 되어도 너무 행복 할 것 같은 느낌. 배우, 연출, 촬영, 음악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최고의 영화예요.”
영화 홍보 차 런던에 온 미국배우 안나와 노팅힐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영국남자 윌리엄. 우여곡절 끝에 ‘스타의 연인’이 된 윌리엄과 안나의 설레는 사랑을 담은 현대판 동화. 특히 윌리엄이 노팅힐의 거리를 걷는 가운데 여러 번의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
2.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년 │ 감독 존 카사베츠
“<글로리아>, <오프닝 나이트> 등 존 카사베츠 감독 영화를 거의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마음 어떤 부분을 가장 세차게 흔들었던 영화였어요. 특히 혼자 된 후 1년 반 사이에 본 이 영화는 그냥 단순히 영화 한 편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이 여자의 상태를 너무나도 이해하고 알겠다고 할까. 제가 진짜 우리 애들이랑 그런 상황이었던 적이 있기도 하구요. 지나 롤랜드의 히스테릭 한 동시에 천진하기까지 한 연기는 볼 때 마다 놀라워요.”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 닉에게는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고, 남들보다 조금 예민한 아내. 그의 눈에는 그런 아내가 그저 ‘평범하지 않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랑과 절제의 기준을 묻는 존 카사베츠의 수작. <형사 콜롬보>로 우리에게 익숙한 피터 포크가 남편으로, 감독의 실제 부인인 지나 롤렌즈가 아내 메이블로 등장해 아찔한 연기를 선보인다.
3. <와니와 준하> (Wanee & Junah)
2001년 │ 감독 김용균
“화면도 색감도 너무 예쁘고 따뜻한데 어쩐지 아픈 느낌이 있는 영화예요. 순한 듯 보이지만 확 터지는 순간도 있고요. 용기 있게 사는데 그렇게 산다고 부르짖으며 유난 떨지 않는 캐릭터들도 좋고, 톤이나 온도도 적당하게 딱 맞는 영화랄까. 특히 과거와 현재, 미래가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 한 순간 속에 공존 해 있는 게 느껴져요. 언제라도 볼 때마다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죠.”
와니와 준하는 같이 산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도, 간섭하지도 않지만 결코 덜 사랑하거나 소홀하지 않은 ‘쿨’한 사랑.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와니의 이복동생 영민의 귀국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황기석 감독의 서정적인 촬영과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들어간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표현된 애니메이션은 ‘순정’을 표방한 이 영화를 더없이 풍성한 손길로 채색한다.
4.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년 │ 감독 시드니 루멧
“DVD도 아니고 비디오로 처음 본 영화에요. 신분을 숨긴 채 끊임없이 쫓기고 떠도는 가족이야기라니, 소재만으로도 놀랍고 충격적이었고, 그런 상황을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정적으로 풀어나가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연출력도 놀라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리버 피닉스가 살아온 실재 인생하고도 많이 닮아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저는 기본적으로 ‘가족의 무게’를 다루는 영화에 많이 끌리는 것 같아요.”
반전운동 중 우연한 사고로 FBI에 쫓기는 몸이 된 부모를 따라 아기 때부터 도피의 삶을 익힌 남매. 이들은 마치 훈련 받은 군사들처럼 이름을 바꾸고, 머리색을 바꾸고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에 익숙하다. 세상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들에게 가족은 마지막 은신처이자 벗어나지 못할 굴레다. 하지만 아들 대니에게 발견된 음악적 재능은 15년간 이어온 이 기나긴 도주의 종말을 알린다. 극중 대니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 8번은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삶과 겹쳐지면서 서글픈 레퀴엠처럼 울려 펴진다.
5. <굿바이 칠드런> (Au Revoir Les Enfants)
1987년 │ 감독 루이 말
“나치가 유태인 학생을 색출하러 교실에 들이닥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동시에 처연한 순간이에요. 거의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한 학생의 눈길을 눈치 챈 장교가 주인공 아이 앞으로 다가서죠. 그런데 이 녀석은 당황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짐을 챙겨서 따라나가요. 그 어린 것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어떤 원망도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니. 정작 영화를 볼 때는 안 우는데, 이렇게 다시 생각할 때 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해요.”
‘40년이 지났지만 죽는 날까지 1월 아침의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의 시대, 교장 신부의 묵인 하에 한 프랑스 외곽의 수도원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게 된 유태인 소년은 그곳 기숙사에서 친구를 만나 남다른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잠복의 시대는 곧 끝나고, 비정한 현실의 표피 위로 끌려 나온 소년은 세상의 무기력한 방관 속에 죽음의 길로 향한다. 1987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고현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올 상반기 개봉을 앞둔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고현정과 홍상수감독이 <해변의 여인>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제천과 제주를 오가는 이 영화에서 고현정은 섬에서 나이 많은 화가 남편과 살아가는 어딘가 사연 있는 여자, ‘고순이’로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꽤나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은데 자신의 삶을 지극히 평범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고순이와 동질감을 느낀다는 고현정은 오는 5월에 방영을 시작하는 MBC <선덕여왕>에서는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을 택한” 미실, 이라는 또 다른 페르소나를 만날 예정이다.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우리는 이제 겨우 한 편의 영화를 보았고, 세 편의 드라마를 만났으며, 몇 마디의 인터뷰를 읽었을 뿐이다. 단지 그 정도가 전부다. 누가 이 여자를 안다고 말하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한 번의 긴 이별 끝에 만난 연인에 대한 마음이 이럴까? 10년의 공백을 지나 다시 만난 고현정은 되도록이면 똑같은 헤어짐을 반복하지 않고 싶은 배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선 분명하고 또록또록한 연기도 그러하거니와, 특유의 드세지 않으면서도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대체할 배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다. 누이 같은 포근함과 형 같은 든든함이 공존하고 감성과 이성의 추를 공평하게 품고 걸어가는 이 배우의 발걸음은 확신에 차 있지만 무겁지는 않다. 싫고 좋고가 홍해 갈라지듯 분명하고, 세상사 이치를 이야기 할 땐 몇 갑자 산 신령님의 지혜와 달관이 부럽지 않은 여자, 때론 7살 소년 같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마음을 움직였던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이야기 할 때는 이내 눈가가 발갛게 붉어지는 소녀. “좋아하는 영화는 꼭 두, 세 번 이상 보고, 어떤 영화는 설거지하면서, 딴 일 하면서도, 마냥 틀어놓고 있어도 좋다”는 고현정. 다음은 그녀가 직접 고른 그 반복의 리스트, 사랑의 블랙홀들이다.
1. <노팅힐>(Notting Hill)
1999년 │ 감독 로저 미첼
“결혼생활 할 때 보스턴에 가서 두 달 정도 혼자 있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 때 주구장창 이 영화만 틀어놨던 것 같아요. 홀로 타지에 있는 저에게는 더 없는 위로를 준 영화였죠.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다루면서 크게 무리수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갖잖아요.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그런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고. (웃음) 내가 줄리아 로버츠가 되면 감사하고, 휴 그랜트여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그들의 친구나 가족이 되어도 너무 행복 할 것 같은 느낌. 배우, 연출, 촬영, 음악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최고의 영화예요.”
영화 홍보 차 런던에 온 미국배우 안나와 노팅힐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영국남자 윌리엄. 우여곡절 끝에 ‘스타의 연인’이 된 윌리엄과 안나의 설레는 사랑을 담은 현대판 동화. 특히 윌리엄이 노팅힐의 거리를 걷는 가운데 여러 번의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
2.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년 │ 감독 존 카사베츠
“<글로리아>, <오프닝 나이트> 등 존 카사베츠 감독 영화를 거의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마음 어떤 부분을 가장 세차게 흔들었던 영화였어요. 특히 혼자 된 후 1년 반 사이에 본 이 영화는 그냥 단순히 영화 한 편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이 여자의 상태를 너무나도 이해하고 알겠다고 할까. 제가 진짜 우리 애들이랑 그런 상황이었던 적이 있기도 하구요. 지나 롤랜드의 히스테릭 한 동시에 천진하기까지 한 연기는 볼 때 마다 놀라워요.”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 닉에게는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고, 남들보다 조금 예민한 아내. 그의 눈에는 그런 아내가 그저 ‘평범하지 않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랑과 절제의 기준을 묻는 존 카사베츠의 수작. <형사 콜롬보>로 우리에게 익숙한 피터 포크가 남편으로, 감독의 실제 부인인 지나 롤렌즈가 아내 메이블로 등장해 아찔한 연기를 선보인다.
3. <와니와 준하> (Wanee & Junah)
2001년 │ 감독 김용균
“화면도 색감도 너무 예쁘고 따뜻한데 어쩐지 아픈 느낌이 있는 영화예요. 순한 듯 보이지만 확 터지는 순간도 있고요. 용기 있게 사는데 그렇게 산다고 부르짖으며 유난 떨지 않는 캐릭터들도 좋고, 톤이나 온도도 적당하게 딱 맞는 영화랄까. 특히 과거와 현재, 미래가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 한 순간 속에 공존 해 있는 게 느껴져요. 언제라도 볼 때마다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죠.”
와니와 준하는 같이 산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도, 간섭하지도 않지만 결코 덜 사랑하거나 소홀하지 않은 ‘쿨’한 사랑.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와니의 이복동생 영민의 귀국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황기석 감독의 서정적인 촬영과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들어간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표현된 애니메이션은 ‘순정’을 표방한 이 영화를 더없이 풍성한 손길로 채색한다.
4.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년 │ 감독 시드니 루멧
“DVD도 아니고 비디오로 처음 본 영화에요. 신분을 숨긴 채 끊임없이 쫓기고 떠도는 가족이야기라니, 소재만으로도 놀랍고 충격적이었고, 그런 상황을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정적으로 풀어나가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연출력도 놀라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리버 피닉스가 살아온 실재 인생하고도 많이 닮아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저는 기본적으로 ‘가족의 무게’를 다루는 영화에 많이 끌리는 것 같아요.”
반전운동 중 우연한 사고로 FBI에 쫓기는 몸이 된 부모를 따라 아기 때부터 도피의 삶을 익힌 남매. 이들은 마치 훈련 받은 군사들처럼 이름을 바꾸고, 머리색을 바꾸고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에 익숙하다. 세상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들에게 가족은 마지막 은신처이자 벗어나지 못할 굴레다. 하지만 아들 대니에게 발견된 음악적 재능은 15년간 이어온 이 기나긴 도주의 종말을 알린다. 극중 대니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 8번은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삶과 겹쳐지면서 서글픈 레퀴엠처럼 울려 펴진다.
5. <굿바이 칠드런> (Au Revoir Les Enfants)
1987년 │ 감독 루이 말
“나치가 유태인 학생을 색출하러 교실에 들이닥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동시에 처연한 순간이에요. 거의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한 학생의 눈길을 눈치 챈 장교가 주인공 아이 앞으로 다가서죠. 그런데 이 녀석은 당황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짐을 챙겨서 따라나가요. 그 어린 것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어떤 원망도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니. 정작 영화를 볼 때는 안 우는데, 이렇게 다시 생각할 때 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해요.”
‘40년이 지났지만 죽는 날까지 1월 아침의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의 시대, 교장 신부의 묵인 하에 한 프랑스 외곽의 수도원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게 된 유태인 소년은 그곳 기숙사에서 친구를 만나 남다른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잠복의 시대는 곧 끝나고, 비정한 현실의 표피 위로 끌려 나온 소년은 세상의 무기력한 방관 속에 죽음의 길로 향한다. 1987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고현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올 상반기 개봉을 앞둔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고현정과 홍상수감독이 <해변의 여인>에 이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제천과 제주를 오가는 이 영화에서 고현정은 섬에서 나이 많은 화가 남편과 살아가는 어딘가 사연 있는 여자, ‘고순이’로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꽤나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은데 자신의 삶을 지극히 평범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고순이와 동질감을 느낀다는 고현정은 오는 5월에 방영을 시작하는 MBC <선덕여왕>에서는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을 택한” 미실, 이라는 또 다른 페르소나를 만날 예정이다.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우리는 이제 겨우 한 편의 영화를 보았고, 세 편의 드라마를 만났으며, 몇 마디의 인터뷰를 읽었을 뿐이다. 단지 그 정도가 전부다. 누가 이 여자를 안다고 말하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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