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터뷰에서 밝은 쪽보다는 슬픈 쪽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현빈
: 그런 게 있다. 비관적이거나 우울한 성격은 아닌데, 그런 쪽의 연기가 더 재밌다. 물론 그런 쪽으로만 연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일단 대본에 100% 충실하려고 한다.

슬픔을 생각하는 건 캐릭터의 리얼리티에 신경 쓰기 때문은 아닌가? <눈의 여왕>때 태웅이가 친구의 죽음으로 8년 동안 어머니를 보지 않았다는 설정에 대해서 계속 작가들에게 이유를 물어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빈
: 그렇다. 그런 부분에서 되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대본을 보면 대사나 지문을 읽으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이유가 있을 때 행동을 한다. 납득이 안 되면 해답이 돌아올 때까지 질문을 던진다. 연극할 때부터 배웠던 거라 그런 거 같은데, 사람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분명히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더 캐릭터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신경 쓰는 것 같다.

“지오와 준영이처럼 헤어졌다 다시 만나도 결국은 똑같을 것 같다”

지오가 녹내장에 걸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굉장히 드라마틱한 설정인데.
현빈
:16부까지 찍고 나서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아프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노희경 작가는 그런데도 ‘이 사람을 사랑하겠나’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 같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결말이 없다. 그래서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그 후의 상황은 시청자들에게 맡기니까. 녹내장도 그런 의미 같다. 사람들이 그 다음의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거. 거기서 지오가 말하지 않나. 녹내장은 불치병은 아닌데 완치도 불가능하고 3개월에 한 번씩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노희경 작가가 인생은 그렇게 계속 된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는 극의 중심을 이끌어야 한다. 특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후반부는 지오가 준영이에게 이별 선언을 하면서 드라마의 흐름이 바뀐다. 이런 상황에 대해 부담이 되거나 특별히 염두에 둔 건 없었나.
현빈
: 특별히 그런 건 없었는데, 우리가 촬영을 할 때 4부에 있는 싱가폴 신들하고 14-15부에 있는 빈탄 신들을 먼저 촬영했다. 그래서 14-15부를 찍으려고 1회부터 15회까지 내용을 알고 들어갔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준영이와 지오의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나도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반부에 이별 통보를 했을 때 앞부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야 뒷부분이 더 가슴 아플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리고 지오의 캐릭터가 현실적인 것처럼 준영이와의 사랑에 관해서도 현실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나도 저랬는데’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어떤 분들은 지오의 결별선언에 대해 욕을 하던데 (웃음) 그런 욕을 먹는 것도 되게 기분이 좋았다.

그 때 지오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현빈
: 남자들은 이해를 하더라. 여자들은 못하고. 나도 지오 이해한다. (웃음) 나도 예전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보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건이 안 되고, 그걸 충족 못 시켜주면 보내줄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좋은 이별은 없다고 본다. 예쁜 이별, 좋은 이별 이런 건 없다. 이별할 때는 둘 중의 하나는 무조건 나쁜 놈이 된다. 그래야 더 깔끔한 이별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 번 헤어진 관계는 다시 만나도 헤어지게 된다”고 말했던 걸로 안다. 지오와 준영이도 그렇게 될까?
현빈
: 그건 내 주변 사람들을 봤을 때 대다수가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던 건데,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헤어지고 나면 시간이 지난 뒤에 이젠 그 사람을 더 잘 아니까, 이런 부분은 주의하고 이런 부분은 잘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결국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같은 문제가 반복될 거고, 그 전의 한계에 다시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헤어지는 말이 한 번 나오면 되게 쉬워진다. 어떤 이유에서든 헤어지자는 얘기가 나오면 그 때부터는 “우리 헤어져, 그만 만나”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것 같다.

“<아일랜드>의 강국은 40살쯤 돼서 다시 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헤어진 상태에서도 계속 만난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현빈
: 굉장히 희한한 집단이다. (웃음) 나는 그렇게 못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면서 ‘가능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분명히 이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 만났다 헤어졌는데, 어느 순간 저 사람하고 만나고 있고, 또 그들은 모두 친구고…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내 옆에 있으니까 ‘아 되는구나’라는 생각은 든다.

연기자로 여러 연기를 하면서 뭔가 배우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 같다.
현빈
: 그렇다. 재밌기도 하고, 모험이다. 결과를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해답이 없으니까. 그 자체가 재밌다.

당신의 작품 선택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20대 중반에 노희경 작가와 인정옥 작가를 모두 거쳤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경력이다. (웃음) 연기자로서 뭘 갖고 싶나.
현빈
: 얻고 싶어서 얻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이 작품도 해보고 싶고, 저 작품도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단순히 따지면 캐릭터일수도 있다. MBC <내 이름은 김삼순>때 삼식이 캐릭터를 하고 나서,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드라마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 거다. 상황이나 스타일이 비슷한 작품보다는 그래도 이것 보다는 조금 다른 거, 대신 많이 변하지 않는 걸 하고 싶다. 다만 나이 들어 그 전에 했던 캐릭터를 다시 해보면 그건 그대로의 재미가 또 있을 거란 생각은 든다. 표현방식이나 뉘앙스가 다 달라질 테니까. MBC <아일랜드>의 경호원 역할은 40살쯤 돼서 다시 해보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멜로나 액션도 가능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부분에서 <친구>의 동수가 또 한 번의 모험일 것 같다. 당신은 동수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바라보나.
현빈
: 대본을 아직 보지 않아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장동건 선배의 동수와는 다른 동수를 표현하고 싶다. 물론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가장 큰 숙제다. 그런데 그건 내가 선택했으니까 해내야할 부분이다.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인터뷰에서 당신은 곤조가 있다고 하더라. (웃음) 당신과 같이 야구하는 사람들이 야구를 할 때도 잘 못하다가 계속 연습하더니 어느 순간 잘하게 됐다는 얘길 자기한테 하더라면서.
현빈
: 야구를 잘하진 못한다. 하지만 시합을 못 나가도 선배들과 같이 땀 흘리고 함께 모여 노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시합에 안 나갈 때는 계속 공하고 놀았는데, 그래서 나온 말인 거 같다. 내가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뭔가 머릿속에 들어있으면 딴 걸 못한다. 이젠 <친구>라는 작품이 정해졌으니까 모든 게 <친구>에 맞춰질 것 같다.

연기를 하면서 계속 다른 캐릭터들을 하나씩 얻어가는 것 같다. 집중해서 한 캐릭터를 자기 걸로 만들고, 다시 다른 캐릭터를 얻으러 도전하고.
현빈
: 그게 제일 좋다. 나는 작품 끝났을 때 내 이름보다 캐릭터 이름으로 불리는 게 되게 좋다. 그래서 내가 나이 들었을 때 사람들이 내 이름보다 수많은 캐릭터 이름들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뒤에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현빈
: 단지 돈 때문에 뻔한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안성기 선배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지금 안성기 선배가 그 나이가 돼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역할만 맡지는 않는다. 그 나이에 멜로나 액션도 가능한 배우, 어떤 캐릭터가 됐을 때 나이가 지긋한 배우가 필요하면 사람들이 거론하는 이름이 됐으면 좋겠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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