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오피셜 시크릿’ 포스터. /사진제공=퍼스트런
영화 ‘오피셜 시크릿’ 포스터. /사진제공=퍼스트런
국가기밀을 다루는 사람은 맘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다. 집권층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속이고,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킬까 개인을 사찰하고, 국가 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음모 등을 가림막 없이 대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록 국가기밀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실체를 고발한 J. 어산지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피셜 시크릿’(감독 개빈 후드)은 영국 정보부에서 실제로 있었던 내부고발 사건을 다루는 흥미진진한 스릴러다.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판을 한번 크게 벌여 미국 경제에 활력을 주려 했는지, 무기상들의 압력을 못 이겼는지, 아니면 실제로 카다피가 대량학살 무기를 갖고 미국을 위협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했다. 여기서 문제는 명분이었다. 대량살상 무기의 존재 여부가 우선 중요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두는 게 안전했다. 이에 미국을 전적으로 받쳐줄 나라가 필요했고 영국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동맹국이었다. 이런 상황에 맞춰 영국정부통신본부(GCHQ)에서 중국어 번역가로 활동하던 캐서린(키이라 나이틀리)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이사국들의 약점을 알아내려 불법 도청을 하라는 지시였다.

실정법에 따르면 캐서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다뤘던 정보의 외부유출은 1989년에 대처 수상이 제정한 공무상 비밀 엄수법(Official Secrets Act) 1조 1항을 위반하는 행동이어서다. 그러니 동료의 말대로 그저 못 본 척 시키는 대로 하면 될 터다. 그러나 캐서린은 영국의 협조를 요청하는 미국국가안보국(NSA) 고위 간부인 프랭크 코자의 이메일을 반전운동가인 친구에게 넘겨줬고 이 일로 기소를 당하고 만다. 영화는 캐서린이 피고발인 신분으로 재판정에 출두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관객은 프랭크 코자라는 이름을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영화 ‘오피셜 시크릿’ 스틸. /사진제공=퍼스트런
영화 ‘오피셜 시크릿’ 스틸. /사진제공=퍼스트런
‘오피셜 시크릿’은 전형적인 스릴러지만 고발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사건의 진행을 긴장감 넘치게 끌어가고 곳곳에 아슬아슬한 반전을 배치해 관객이 미처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스릴러 영화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기자 마틴 브라이트(맷 스미스)의 개입과 노련한 인권변호사 벤 에머슨(랄프 파인즈)의 변론 진행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대중을 유린하는 정치가들의 위선을 속 시원하게 폭로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은 비열한 인간들이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매스컴에 나와 내뱉는 거짓말이란!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신문사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상황 전개였다. 잘못하다가는 신문사가 위험에 빠질지 모를 기사를 활자화하기까지, 그 조사과정과 절차 그리고 언론인들이 보여주는 결단력은 비록 언론과 무관한 관객이라도 충분한 이해가 가능했다. 설득력이 절로 생성되는 세련된 연출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캐서린이 변호사들과 준비하는 변론 과정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호사들은 캐서린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을 이끌어낸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빚어질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을 머리에 그려볼 때 공무상 비밀 엄수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기꺼이 유죄판결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법을 따를 때 나는 무죄입니다.” 이런 소신을 가진 인물이 있다면 변호인들은 절로 신이 날 것이다. 이 장면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줬다. 실제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따지기 전에 감독의 뛰어난 해석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오피셜 시크릿’ 스틸. /사진제공=퍼스트런
영화 ‘오피셜 시크릿’ 스틸. /사진제공=퍼스트런
정치가들은 정치적 행동으로 세상의 위기를 전부 해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빠져있다. 그래서 위험한 조작과 추악한 거래와 뻔뻔한 거짓을 일삼는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독재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구라트 같은 고대 문명을 파괴하고 죄 없는 어린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더라도 전쟁은 결코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전쟁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이라크 국민들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 열강의 위정자들과 자본가들이다. 진실을 밝힌 캐서린의 용기는 그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영화에는 실제 인물인 캐서린 건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덕분에 영화의 리얼리티가 물씬 살아났다. 그리고 마지막 재판 장면은 달리 해석할 필요가 없는 통쾌한 결말을 제공했다.

‘오피셜 시크릿’에서 얻은 소득은 강대국들이 어떤 나라인지 그 정체를 알았다는 것이다.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 최강국으로서 가진 힘을 불법, 합법 가리지 않고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빚어진 파괴와 희생에 대해 국가 차원의 사과 한 마디 없었다. 그러고서도 스스로 ‘인권국가’라는 자랑을 수시로 해댄다. 여기서 우리나라 역시 강대국에게 맥을 못 추는 나라라는 사실이 차갑게 다가왔다. 결말은 시원했지만 영화관을 나오는 마음은 서늘했던 이유다. 아마 요즘 나라 안팎의 사정이 마음의 방향을 그렇게 몰고 간 모양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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