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포스터. / 사진제공=찬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포스터. / 사진제공=찬란
나비의 생태를 연구하는 어느 생물학자가 자신이 왜 나비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따져도 답을 찾지 못했던 그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이유를 알게 됐다. 어린 아들에게 모빌을 사주려 아기용품 가게에 들렀다가 자신이 가진 최초의 기억이 아기침대에 누워 모빌을 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말하자면 그 때 보았던 나비 모빌 덕분에 나비 전문가의 인생이 결정됐다는 뜻이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글이다. 좀 억지스러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세상엔 그런 일도 있으려니 했다.

특이한 영화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아주 별난 프랑스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사실 관계라든가 사건의 개연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인물 묘사와 변화무쌍한 화면들의 이어붙임이 얼마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줬는지 모른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감독 실벵 쇼메)이 왜 매력적인지 묻는다면 우선 그런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콩쿠르 상 수상자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한다. 프루스트는 그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과연 기억이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만들 수 있을까? 영화는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려면 독약과 진정제, 모두 먹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스틸 / 사진제공=찬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스틸 / 사진제공=찬란
주인공 폴(귀욤 고믹스)은 한심한 남자다. 33세 노총각에 이모들 집에 얹혀살고,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려고 연습을 열심히 하지만 준우승만 한두 차례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이모들의 댄스 교실에서 따분한 반주나 해주는 처지다. 그의 삶에서 가장 대책 없는 부분은 말을 도통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 때 겪었던 충격이 말문을 막아버린 까닭이다.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음.” 어느 날 폴의 책상에서 발견된 쪽지다. 말이 좋아 책상이지 죽은 엄마 사진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모빌 아래 어린 시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괴상한 책상이다. 뒤집어 말해 폴의 책상은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해보는 공간인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은 매번 헛수고에 머물렀지만….

엄마는 과연 어디 있을까? 대답은 간단한데, 폴의 머릿속 저 깊은 기억 속에 어머니가 숨어 있다. 사실 그곳에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있고 심지어 비극적인 부모의 죽음까지 들어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곳까지 찾아가는가이다. 마담 프루스트(앤 르니)의 등장은 폴에게 축복이다. 그녀는 아파트에 불법으로 정원을 가꾸며 사람들에게 정체불명의 약초를 제공해 생계를 이어가는 자유분방한 여인이다. 특히 공원 중앙의 한 그루 나무를 지키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그녀가 얼마나 자연친화적인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폴은 프루스트 부인이 그를 위해 특별하게 제조한 차를 마신 후 자신의 과거로 여행을 시작한다.

폴이 과거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설수록 애니 이모(베르나르데 라퐁)와 안나 이모(엘렌 뱅상)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폴이 빵을 사러 나간다면서 5시간이나 있다 돌아오고, 넋이 빠진 채 한참을 앉아 있고, 춤 반주를 하다 말고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간다. 혹시 마약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스틸 / 사진제공=찬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스틸 / 사진제공=찬란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폴이 억지로 끌어내게 될 기억이 과연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저명한 심라학자 주디스 허먼은 자신의 대표작 ‘트라우마’에서 괜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다가 자칫 상처를 건드려 심각한 외상장애를 입히게 될까 걱정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를 건드려선 안 된다는 뜻일 텐데, 아마 수많은 임상을 거쳐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내놓은 견해일 것이다. 폴의 이모들이 갖는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심리학자들의 모든 우려를 거슬러 실벵 쇼메 감독은 자신 있게 덧붙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억을 회복해서 왜 오늘의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만일 겁이 나서 덮어두고 산다면 오늘의 나는 공허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프루스트 부인을 만나기 전까지 폴의 하루하루 삶이 한심했던 이유다.

내게도 최초의 기억이 있기는 있다. 유치원생이었는지 아니면 보다 더 어릴 때였는지 몰라도 집에 들어와 보니 아버지가 방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는데 아마 그날따라 유난히 햇빛이 환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먼 훗날 독일유학 중에 뷔르쯔부?이라는 도시에 들러 영주의 성을 산책했던 일도 기억난다. 독일 날씨답지 않게 해가 유난히 환하게 내리쬐어 장원의 모래들이 온통 반짝였던 날이었다. 이어서 넥카 강 언덕으로 올라가 유서 깊은 카페에 들러 와인을 한 잔 했다. 강 건너 아름다운 뷔르츠부르크 성과 반짝이는 넥카 강을 내려다보며 야외 카페에 앉아 마음 잘 맞는 친구와 나눈 와인은 그야말로 최고의 행복을 나에게 선사했다. 누가 다시 나에게 그 시절을 가져다주겠는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오랜만에 만나보는 수준 높은 코미디였다. 엉뚱한 대사와 묘한 상황들도 흥겨웠고 의외의 결말도 무척 재미있었다. 프루스트 부인이 죽기 전에 폴에게 던지는 충고는 실로 간단하다. “네 인생을 살거라(Vis ta vie)!”

감독의 용기 있는 선언에 한 표 추가!

박태식(영화평론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