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작가 조셉 캐슬먼(조나단 프라이스)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른 새벽에 스톡홀름에서 수상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그의 아내 조안(글렌 클로즈)도 같이 전화를 들고 축하를 받는다. 기쁨에 넘친 조셉은 아내와 함께 침대에 올라 마치 젊은이처럼 팔짝 팔짝 뛰다가 조안이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한다. 조셉의 심장이 안 좋아 혹 마비가 올지 몰라서였다. 그 뒤로 영화에서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동시에 진행된다. 남편의 영광이 아내와 아들 데이빗(맥스 아이언스)에게는 오히려 불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전기 작가 나다니엘(크리스챤 슬레이터)과 나누는 조안의 대화가 이상하더라니…
감독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사람이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을 두고 갖가지 생각을 품게 되는데, 이를테면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무정하고 치사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안달이 나 분노를 품은 아들, 흥밋거리를 파헤쳐 대중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비열한 작가 그리고 묻힌 재능을 감수한 채 온 평생 승승장구하는 남편을 지켜봐야만 하는 아내가 있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점은 개성 강한 네 인물의 성격과 이야기를 잘 버무려넣는 것이다. 가족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비욘 룬게 감독은 멋진 작업을 해냈다. 개연성을 끌어내는 데 한 장면도 어색하지 않았다. 책 펼치는 소리, 호두, 심장 약, 노벨상 메달 등등이 갖는 상징성과 슬쩍 슬쩍 지나가는 대사들마저 주의 깊게 듣고 보아야 했는데, 오래 만에 이렇게 집중하며 좇아가야 하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는 잔잔하게 진행되지만 메시지는 의외로 분명했다. 또한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조안의 묘사가 뛰어났다. 이야기로 보아서는 사실 조안이 끝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수용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노벨상 시상식과 축하 파티를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었고, 아들의 재능을 위해 진즉에 진실을 밝힐 수 있었고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조셉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도 있었다. 한평생 딴 여자에게 눈을 돌리느라 바빴던 남편에게 애정이 남아있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어떤 상황에 몰리더라도 싸구려로 전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존심을 지켜냈다.
주체이론의 대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그녀의 명저 ‘젠더 트러블’에서 이제까지 주체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준으로 여겨왔던 남성·여성·이성애자·동성애자·양성애자 등등의 도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주체란 수행적으로 구성되는데, 한 인간이 누구인지 물어볼 때 그가 무엇이 되는지(is)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는지(do)가 기준이 된다. 조안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두고 씨름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찾아낸다. 영화의 마지막, 비행기 장면에서 조안의 얼굴에 떠오른 은은한 미소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 그녀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 때 엉큼한 의도를 숨긴 채 은근슬쩍 곁에 다가온 나다니엘은 조안에게 혼 구멍이 난다. “수틀리면 법정에서 보게 될 겁니다.” 그녀의 품위가 다시 한 번 빛나는 대사였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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