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노규민 기자]
연기 경력 62년의 ‘국민배우’ 안성기가 자신이 걸어온 ‘연기 인생’과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지난 19일 경기대 서울캠퍼스에서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열린 특강에서다. 1950년대 아역 배우로 데뷔해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 된 그는 일제강점기의 암흑기부터 오늘날의 전성기까지 한국영화가 걸어온 길과 미래를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들려줬다.
안성기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해 ‘한많은 청춘’ ‘바람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남부군’ ‘투캅스’ ‘무사’ ‘실미도’ ‘라디오스타’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도 받았다.
안성기는 이날 “2019년은 한국영화를 상영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군 생활 등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62년간 영화 현장에 있었으니 실감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 영화의 어제는 영세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죠. 오늘날에는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영화는 동경의 대상이자 명예로운 일이 됐습니다.”
1919년 한국영화가 처음 상영됐지만, 대다수 작품이 일본인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영화 제작에 또 제동이 걸렸다. 안성기는 그 시대에 만들어졌던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건 전쟁 이후였다. 안성기가 자신이 한국영화의 처음부터 연기를 한 거나 다름없다고 하는 이유다.
안성기는 쉬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다. 최근 10년 동안에도 ‘7광구’ ‘부러진 화살’ ‘타워’ ‘신의 한수’ ‘화장’ ‘동행’ ‘사냥’ 등 숱한 작품에 출연하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
“나는 해마다 열심히 했는데도 내가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최근에는 박서준, 우도환과 ‘사자’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올 여름에 개봉해요. ‘사자’에서는 조금 더 에너지 있게 나올 테니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하하. 지금도 ‘종이꽃’이라는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데, 저예산 영화들도 늘 해야 합니다. 후배들이 ‘저 선배 어디까지 가나’ 하면서 나를 보고 있을 겁니다. 나는 같은 장르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송해 선배님을 보고 있으니까요.”
1970년대 유신체제에 들어서면서 ‘영화’에 대한 검열이 심해졌다. 시나리오를 다 써놓고도 만들지 못하는 작품이 수두룩했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사실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더 그랬다.
안성기는 군 생활 등 공백 기간을 거친 후 1978년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을 찍었다. 그는 “‘영화를 평생 해야 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지만 시작이 좋지 않았다. 검열도 심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인식도 안 좋았다”고 했다.
그러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성인 배우로 재평가받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안성기는 “1970년대에 나왔다면 바로 창고로 들어갈 영화였다.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개봉했다”고 떠올렸다.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사회적으로 현실성 있는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죠. 우리 영화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하고 싶었고 관객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1970년대에는 대부분 사랑 이야기였는데, 그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고래사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남부군’ 등에 출연한 것도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고, 사랑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거였죠. 그래서 내가 멜로를 잘 못 해요. 가까이서 여배우를 보면 어색해 죽겠어요. 하하.”
1990년대가 되면서 한국영화의 소재가 다양해졌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해외에서 공부했던 인재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었다. 영화판이 커졌다. 안성기는 “1980년대에는 뭔가에 억눌려 아등바등하면서 활동했던 분들이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야 했는데 변해버린 영화판에서 적응을 못해 잊혀져간 연출자가 많다. 그래서 지금 60~70대 감독들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찬욱, 봉준호 같은 좋은 감독들이 부디 80세까지 영화를 만들어서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그럼 훗날에도 깊이 있고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1990년대 후반 ‘쉬리’라는 걸작이 탄생하면서 영화는 점점 더 산업화됐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세계 속에 당당히 자리했다. 해외 유명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내가 이래 봬도 1000만 배우예요. ‘실미도’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죠. 처음엔 믿기지 않았습니다. 50년 가까이 영화를 해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후배들이 ‘이 기록이 깨질까요?’라고 물었을 때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두 달 뒤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1000만을 돌파했고, 해마다 1000만 영화가 나왔습니다. 하하.”
준비했던 주제 강연을 마친 후 안성기는 특강 참여교수와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며 진솔하게 소통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영화를 계속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랬다면 더 많이 벌었을 것”이라며 “내가 맡은 인물과 영화에 몰입하려면 해마다 한 편씩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수많은 광고 제의를 거절한 이유도 털어놨다.
“돈을 벌려면 광고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1980년대에 커피광고 하나만 했어요. 돈 욕심이 별로 없었어요.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죠. 1990년대에는 휴대전화 통신사 광고를 찍게 됐는데 액수가 상당히 컸어요. 고민하다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자식들을 키우는 처지에서 필요 때문에 하나씩 했고요. 커피 회사와는 지금까지도 관계를 맺고 있는데, 내가 오래가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돈을 많이 벌면 뭐해요? 영화 하는 거랑 상관이 없는데…그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오래 하고 싶을 뿐입니다.”
안성기는 1990년대부터 앞장서서 목소리를 냈던 스크린 쿼터부터 스크린 독과점 문제 등 영화계의 현안에 대해서도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게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관객을 선택하는 식이 됐다”며 “영화인들은 늘 고민하고 있다.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쪼록 관계자들끼리 타협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습니다. 우리는 기획력이 좋아요. 기획하는 사람들이 ‘이건 됐다’ 싶으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쪽을 바라보거든요. 되는 걸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것에 도전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다양한 소재의 영화가 나올 수 있습니다.”
경기대학교는 지난해 서울캠퍼스 평생교육원 문화예술(엔터테인먼트)계열에 실무 중심의 심화교육을 하는 예술학사 학위과정을 개설했다. 연극, 영화, 방송, 뮤지컬 배우를 양성하는 연기 전공과 패션, 방송, 모델테이너 등 전문가를 양성하는 모델 전공이 있다. 2019학년도부터는 서울캠퍼스 내에서 국내 최초로 한류대학원도 운영한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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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안성기가 19일 오후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 을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이승현 기자 lsh87@
“제가 1957년부터 영화에 출연했으니 (제대로 만든 걸로 치면)처음부터 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돌아가신 신성일 형님이 날 볼 때마다 ‘야. 안성기. 네가 내 선배다’ 그러셨어요. 내가 그분보다 오래 했고 데뷔 연도로 치면 나보다 빠른 분이 거의 없으니까요. 10년 후에는 전 지구상에서 제일 오래된 영화인이 돼있지 않을까 싶네요. 해외에서 상을 타면 이 말을 꼭 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상을 꼭 타야 하는데…하하. ”연기 경력 62년의 ‘국민배우’ 안성기가 자신이 걸어온 ‘연기 인생’과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지난 19일 경기대 서울캠퍼스에서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열린 특강에서다. 1950년대 아역 배우로 데뷔해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 된 그는 일제강점기의 암흑기부터 오늘날의 전성기까지 한국영화가 걸어온 길과 미래를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들려줬다.
안성기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해 ‘한많은 청춘’ ‘바람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남부군’ ‘투캅스’ ‘무사’ ‘실미도’ ‘라디오스타’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도 받았다.
안성기는 이날 “2019년은 한국영화를 상영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군 생활 등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62년간 영화 현장에 있었으니 실감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 영화의 어제는 영세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죠. 오늘날에는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영화는 동경의 대상이자 명예로운 일이 됐습니다.”
1919년 한국영화가 처음 상영됐지만, 대다수 작품이 일본인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영화 제작에 또 제동이 걸렸다. 안성기는 그 시대에 만들어졌던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건 전쟁 이후였다. 안성기가 자신이 한국영화의 처음부터 연기를 한 거나 다름없다고 하는 이유다.
안성기는 쉬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다. 최근 10년 동안에도 ‘7광구’ ‘부러진 화살’ ‘타워’ ‘신의 한수’ ‘화장’ ‘동행’ ‘사냥’ 등 숱한 작품에 출연하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
“나는 해마다 열심히 했는데도 내가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최근에는 박서준, 우도환과 ‘사자’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올 여름에 개봉해요. ‘사자’에서는 조금 더 에너지 있게 나올 테니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하하. 지금도 ‘종이꽃’이라는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데, 저예산 영화들도 늘 해야 합니다. 후배들이 ‘저 선배 어디까지 가나’ 하면서 나를 보고 있을 겁니다. 나는 같은 장르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송해 선배님을 보고 있으니까요.”
연기경력 62년의 국민배우 안성기가 19일 오후 경기대 서울캠퍼스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승현 기자 lsh87@
한국영화는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안성기는 “1960년대에는 한국영화가 한 해에 200편 넘게 만들어졌다”며 “당시 정부에서 지원도 많이 해줘 영화가 활성화되다 보니 좋은 배우와 감독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그때의 필름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아역 때 70편 정도 했는데 필름이 30편 정도만 남아 있다더라. 필름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가를 못 받는 원로 감독들이 많다”고 아쉬워했다.1970년대 유신체제에 들어서면서 ‘영화’에 대한 검열이 심해졌다. 시나리오를 다 써놓고도 만들지 못하는 작품이 수두룩했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사실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더 그랬다.
안성기는 군 생활 등 공백 기간을 거친 후 1978년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을 찍었다. 그는 “‘영화를 평생 해야 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지만 시작이 좋지 않았다. 검열도 심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인식도 안 좋았다”고 했다.
그러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성인 배우로 재평가받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안성기는 “1970년대에 나왔다면 바로 창고로 들어갈 영화였다.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개봉했다”고 떠올렸다.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사회적으로 현실성 있는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죠. 우리 영화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하고 싶었고 관객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1970년대에는 대부분 사랑 이야기였는데, 그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고래사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남부군’ 등에 출연한 것도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고, 사랑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거였죠. 그래서 내가 멜로를 잘 못 해요. 가까이서 여배우를 보면 어색해 죽겠어요. 하하.”
1990년대가 되면서 한국영화의 소재가 다양해졌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해외에서 공부했던 인재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었다. 영화판이 커졌다. 안성기는 “1980년대에는 뭔가에 억눌려 아등바등하면서 활동했던 분들이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야 했는데 변해버린 영화판에서 적응을 못해 잊혀져간 연출자가 많다. 그래서 지금 60~70대 감독들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찬욱, 봉준호 같은 좋은 감독들이 부디 80세까지 영화를 만들어서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그럼 훗날에도 깊이 있고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1990년대 후반 ‘쉬리’라는 걸작이 탄생하면서 영화는 점점 더 산업화됐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세계 속에 당당히 자리했다. 해외 유명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내가 이래 봬도 1000만 배우예요. ‘실미도’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죠. 처음엔 믿기지 않았습니다. 50년 가까이 영화를 해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후배들이 ‘이 기록이 깨질까요?’라고 물었을 때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두 달 뒤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1000만을 돌파했고, 해마다 1000만 영화가 나왔습니다. 하하.”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 주제로 강의하는 배우 안성기./ 이승현 기자 lsh87@
안성기는 “내가 가끔 우리나라는 큰 동네다. 나라가 아니라고 농담한다. 그래서 가능한 수치다. 해외에서도 인구의 4분의 1이 영화를 본다는 것에 놀라워한다”며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잘만 만들면 된다. 나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준비했던 주제 강연을 마친 후 안성기는 특강 참여교수와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며 진솔하게 소통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영화를 계속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랬다면 더 많이 벌었을 것”이라며 “내가 맡은 인물과 영화에 몰입하려면 해마다 한 편씩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수많은 광고 제의를 거절한 이유도 털어놨다.
“돈을 벌려면 광고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1980년대에 커피광고 하나만 했어요. 돈 욕심이 별로 없었어요.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죠. 1990년대에는 휴대전화 통신사 광고를 찍게 됐는데 액수가 상당히 컸어요. 고민하다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자식들을 키우는 처지에서 필요 때문에 하나씩 했고요. 커피 회사와는 지금까지도 관계를 맺고 있는데, 내가 오래가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돈을 많이 벌면 뭐해요? 영화 하는 거랑 상관이 없는데…그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오래 하고 싶을 뿐입니다.”
안성기는 1990년대부터 앞장서서 목소리를 냈던 스크린 쿼터부터 스크린 독과점 문제 등 영화계의 현안에 대해서도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게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관객을 선택하는 식이 됐다”며 “영화인들은 늘 고민하고 있다.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쪼록 관계자들끼리 타협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습니다. 우리는 기획력이 좋아요. 기획하는 사람들이 ‘이건 됐다’ 싶으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쪽을 바라보거든요. 되는 걸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것에 도전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다양한 소재의 영화가 나올 수 있습니다.”
경기대학교는 지난해 서울캠퍼스 평생교육원 문화예술(엔터테인먼트)계열에 실무 중심의 심화교육을 하는 예술학사 학위과정을 개설했다. 연극, 영화, 방송, 뮤지컬 배우를 양성하는 연기 전공과 패션, 방송, 모델테이너 등 전문가를 양성하는 모델 전공이 있다. 2019학년도부터는 서울캠퍼스 내에서 국내 최초로 한류대학원도 운영한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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