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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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미술학도의 길을 걸었던 조근현 감독. 대중과 호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졸업 전시 이후 매체로서 힘이 없다고 느꼈다. 유학길에 오르면서는 영화로 눈을 돌릴까도 했다. 물론 집안 사정으로 영화 근처도 못 가보고 돌아왔고, 어찌어찌 생계 때문에 영화에 발을 담갔다. 그의 시작은 미술감독이다. ‘후궁’ ‘음란서생’ 등 수많은 작품에 그의 미술적 감각이 입혀졌다. 그리고 2012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6년’ 연출을 맡으면서 조근현 감독의 인생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다. 300만에 가까운 흥행을 만들었고, 연출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2년 후, 신작 ‘봄’을 들고 대중 앞에 섰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조각가 준구(박용우), 끝까지 삶의 의지를 찾아주려던 그의 아내 정숙(김서형) 그리고 가난과 폭력 아래 삶의 희망을 놓았다가 누드모델 제의를 받는 민경(이유영), 이 세 사람에게 찾아온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정치적 이슈의 중심에 있던 ‘26년’을 이끌었던 그의 차기작이란 점을 생각하면 참 의외다. 하지만 미술을 했던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근현 감독과 ‘봄’, 그를 만나 접점을 찾았다.

Q. ‘26년’을 기점으로 미술감독에서 연출자로 삶이 달라졌다.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인가.
조근현 감독 :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다가갔다. 미술 감독일 때는 생계니까 취향과 맞지 않아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물론 형편이 더 나아지진 않았지만, 좀 가릴 수 있는 것 같다.

Q. ‘26년’과 ‘봄’, 기분과 느낌은 굉장히 달랐겠다.
조근현 감독 : 비슷했다. ‘봄’과 ‘26년’은 어떤 면에서는 같은 지점이 있다. ‘26년’은 영화 자체가 이슈의 핵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나에 대한 평가가 있는 거다. 그런 데다가 주류 상업영화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또 어떤 실험적인 성격도 있다. 과연 이런 게 지금 관객들에게 호소 될까, 속된말로 먹힐까. 굉장히 궁금하다.

Q. 미술감독 출신이고, 미술학도였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보고, 충분히 끌렸을 것 같다. ‘봄’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 그런 이유였나.
조근현 감독 : 갑자기 왜 ‘봄’이냐 하면, 준구와 정숙의 모델이 부모님이다. ‘봄’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10년 넘게 투병생활 하시던 아버님이 위중한 상태였다. 어머니가 계속 간병을 하셨고. 실제 시나리오 속 정숙의 모습에 어머니가 있었다. 젊은 날 잘 나가셨던 분이 일찍 쓰러진 유사지점도 있었고. 이 시나리오에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생각하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배급사들이 다 거절했다. 그러다가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거다. 그래서 극장에서 못 보여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비를 들여 어머님을 모시고 갔다. 상을 탄다는 건 생각도 못 했고. 여하튼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Q. 어머님께서는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던가.
조근현 감독 : 시큰둥하셨다. (웃음) 디테일한 부분은 실재하고 다르다고. 어려서 기억했던 상황, 목격했던 것들, 대화 내용이 나한테 재해석된 거였다. 낭만적인 게 아니었던 거지. 그런 부분에서 어머니가 ‘이렇게 네가 생각했구나, 근데 네가 왜 애를 썼는지 마음은 알겠다’고 하더라. 요즘에 그런 말씀 한다. 네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서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지 않으냐고. 생각지도 않게 상도 받고. 그렇게 위안으로 삼고 있다. 못 보여드린 게 한이 된다.

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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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개인적으로 처음 조근현 감독이 ‘봄’을 연출했다고 해서 놀라긴 했다. ‘천지인’ 분쟁했던 동생과 안기부 재직했던 아버지 그리고 ‘26년’ 당시 만났던 조근현 감독의 성향을 봤을 때 뭔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조근현 감독 : 동생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송이 끝났다. 그것도 시시하게. 동생이 소송을 취하했다. 너무 시달렸고, 투여되는 시간이 아깝고 소모적이었다. 이렇게 끝나버릴 줄이야. (웃음) 차라리 소송 중이면 이슈화할 수 있는 소재다. 억울한 지점이나 기업이 얼마나 부도덕한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지금 말고 나중에는 좀 더 거시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밝고 경쾌하게 할 수도 있고, 블랙 코미디 쪽으로 풀 수도 있을 것 같다.

Q. ‘26년’은 영화적 특수성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는 게 캐스팅의 조건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조건이 있었나.
조근현 감독 : 기본적으로 유명한 배우에 대한 욕심은 없다.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 깨야 하는 과정이 많이 필요하다. 여러모로 일정 기준을 넘어가면 빨리 결정하는 게 완성도를 봤을 때 유리하다. ‘26년’도 모든 캐스팅이 일주일 안에 끝났는데, 이것도 결정은 4일 정도였다. 그러면 배우들도 많이 생각하게 되고, 고차원적 고민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장에서 별다른 대화를 안 한다. 이미 그런 이야기를 해왔으니까. 당연히 빨리 찍게 된다. ‘봄’은 25회 차에 끝냈다. 장마 한복판에 찍어서 그 정도다. 미술, 촬영도 한참 전에 결정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뭘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다.

Q. 좀 더 구체적으로 각 배우은 어떻게 캐스팅한 건가.
조근현 감독 : 우선 배우한테 부모님 이야기를 한 건 정숙, 서형 씨가 유일했다. 다른 배우들한테는 그런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준구의 경우 예술가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봤고, 유명한 배우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박용우 씨가 물망에 올랐는데, 과거 ‘후궁’ 할 때 ‘굉장히 섬세하다’는 김대승 감독의 말이 생각났다. 궁금해서 만났는데, 정말 그런 지점이 보였다. 그래서 하자고 매달린 입장이 됐다. 이런 이야기로 설득했다. 누드모델이 나오니까 흔히 할 수 있는 오해, 예술인으로서의 길 이외에 다른 것을 포장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작업자로서 고군분투하려는 모습을 담는다는 것에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Q. 그럼 서형 씨는.
조근현 감독 :
서형 씨는 스스로 자기를 검증하는 것에 빠졌다. 계속 센 역, 지르는 역으로 굳어지니까 내 제안이 매혹적이긴 하나 스스로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내 어머니가 모델이기 때문에 당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거다, 그 말에 흔들렸던 것 같다. 서형 씨가 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매달리는 심정으로 부모님 이야기를 꺼낸 거다. 서형 씨는 잘 모르는데 가능성이 높다고 봤던 지점은 조상경 씨의 권유가 컸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했을 때 그 친구가 연기하지 않을 때의 모습을 얘기해줬다. 그러면서 60년대 한복이 잘 어울릴 거라고. 그래서 이 사람부터 만나보자고 했던 것 같다.

Q. 누드모델을 하는 여배우를 찾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 같다. 전신노출이라는 게 쉽진 않으니까.
조근현 감독 :
몇몇 이름이 난 배우들하고 접촉했는데 거절하더라. 그래서 오디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랬는데 제작사에서 매니지먼트로 보낸 시나리오를 읽고, 이 친구가 찾아왔던 거다. 공식적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슬쩍 보여줬는데 거기서 바로 ‘합시다’가 된 거다.

조근현 감독
조근현 감독
Q. 그리고 ‘26년’ 배우들하고 끈끈했나 보다. 처음 한혜진 씨가 나올 때만 해도 ‘아~ 그냥 친하게 지냈나 보다’였는데, 줄줄이 다 나오는 거 보고 놀랐다.
조근현 감독 :
이경영, 김의성 등 다른 배우들도 ‘뭐 없느냐’고 했는데 정말 할 만한 게 없더라. (웃음) 사실 캐스팅 할 무렵에는 그런 카메오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진구 씨가 ‘캐스팅하는 것 같던데 왜 자기 안 부르느냐’면서 ‘카메오라도 달라’고 생떼를 부려서. ‘26년’ 배우들하고 지금도 돈독하다. 단체 ‘카톡’방이 있는데 혜진 씨는 영국에서 뜬금없이 메시지를 올리기도 하면서 근황을 전한다. 캐스팅 당시에는 카톡방이 있었던 건 아닌데, 진구 씨가 자랑한 거다. 아마 혜진 씨 출국 전날이었었을 거다. 그 전날까지도 촬영하다 잠깐 우리 현장 와서 몇 시간 찍어주고 갔다. 슬옹은 딱 2시간밖에 안 찍는데 멀리서, 그것도 한창 뜨거울 때 왔다. 그리고 수빈 씨는 제대로 임팩트를 가져간 것 같다.

Q. 보기 드문 현상인 건 분명하다.
조근현 감독 :
현장에서 그 모습을 보고 배우들이 부러웠나 보더라. 서형 씨, 유영 씨도 다음 영화 카메오 하겠다고. 그래서 이 친구들을 어디에 넣어야 하나 싶다. (웃음) 재밌을 것 같다. 이렇게 릴레이식으로 가게 된다면.

Q.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게 원래 조각할 때 얼굴은 그리지 않는 건가.
조근현 감독 : 전신조각은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 두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전신은 다루고자 하는 게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여체의 신비로움, 아름다움이다. 물론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특정한 이름을 거론한 작품이라면 굉장히 디테일해야 한다. 그러니까 극 중 준구는 평생 전신 조각만 하는 사람인데, 마지막에 얼굴을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황이 된 거다. 그리고 풍성한 몸매를 조각하는 조각, 마른 몸매를 조각하는 조각, 크게 두 부류가 있다. 그에 따라 작가들이 성격도 다르다. 그래서 대사나 상황, 작업실 등은 배우가 결정되고 나서 정해졌다.

Q. 미술학도의 꿈은 왜 접은 건가.
조근현 감독 :
이야기를 하자면 길다. 회화를 전공했고, 사실화 인물화를 오래 했다. 미술적인 은사님이 박제동 화백이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었고, 대학교 때는 선생님이 운영하는 화실에서 배웠다. 미술을 배우는 입장에서 스승이었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회화가 대중하고 호흡을 해야 한다, 대중이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건 옳지 않다는 게 각인됐다. 그랬는데 졸업 전시에서 아무도 안 오는 거다. 당시 내 기억에 영화 ‘사랑과 영혼’이 개봉됐는데, 그 영화에는 돈을 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보는 거다. 미술은 공짜인데도 안 보고. 시야를 넓혀 보니 이미 대중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유학은 이미 예정돼 있었고, 뉴욕으로 가면서 내 마음속의 대안은 영화도 있었다. 회화로 가지만, 타진을 해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애초에 예술품이라는 게 태생적인 소명을 가진 건데 아무도 안보는 게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 무렵 아버님이 쓰러졌다. 영화 근처도 못 가보고 (유학을) 중단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생계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됐다.

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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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이 영화가 조근현 감독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겠다.
조근현 감독 :
‘봄’은 영화가 예술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돌아보는 의미도 있다. 내 영화가 예술이라고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를 하려면, 나에게 있어 예술이 뭔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지점이 많이 반영됐다.

Q. 영화 속에서 박용우는 죽기 전에 가장 찬란한 봄을 맞는다. 그리고 이유영 역시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모델을 하면서 봄을 맞는다. 그럼 김서형에게 봄은 무엇인가.
조근현 감독 : 준구가 남긴 건 결국 자기 얼굴이다. 부인을 위해서 본인의 얼굴을 남긴 거다.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봄을 맞았다고 느꼈을 때의 얼굴, 그게 전부 정숙 때문인 거다. 근데 생각해보면 정숙 역시 그게 행복인 거다. 즉, 정숙도 봄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모델을 찾아오고, 조각을 하게 한다. 그 모습을 보는 게 곧 행복 아닌가 싶다. 정숙 덕분에 준구가 봄을 맞이한 거고, 민경도 자기 값어치를 깨닫게 된 거다. 모든 이들에게 선물을 준 거다.

Q. 해외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이다. 수상 소식도 많이 전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
조근현 감독 :
두 개가 생각난다.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끝나고 관객들이 되게 놀랐다고 하더라. 날 보더니 이렇게 젊은 감독일 줄 몰랐다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인생론이 심오해서 젊은 감독일지 몰랐다고 놀라워하는 거다. 또 하나는 마드리드 국제영화제였던 것 같은데, 칼 투니 집행위원장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대상을 받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호명 된 거다. 나가서 ‘땡큐’란 말 밖에 못했다. 그래서 다들 웃었는데 집행위원장이 툭 치면서 ‘자기가 이번에 영화제 준비하면서 아시아 영화 50개 정도 봤는데 2014년 아시아 영화 중에 최고’란 말을 해줬다. 정말 감동 받았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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