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길고 긴 여정이었네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끝내고 소회도 남다를 것 같아요.
의외성의 매력. 그녀를 만나 포착한 첫 느낌이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의 진지함도 잠깐, 그녀는 이내 초여름의 풋풋함을 닮은 스물네 살다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MBC 수목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의 주연 서미도를 맡으면서 신세경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다. 연기력에 대한 혹평도 있었고 온라인상에는 악플도 많이 달렸다. 그런데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저는 운명적인 끌림을 믿어요”란 조금은 낯 뜨거운 얘기를 망설임 없이 꺼내놓는다. 듣는 입장에선 태연한 건지, 무신경한 건지 당최 감을 잡지 못할 법도 하다. 그런데 상반된 감정들 사이에 묘한 균형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신세경 특유의 긍정성’에 있단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게 바로 그녀의 새침한 외모와는 사뭇 다른 성격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까닭인걸까. 긍정성과 의외성을 외피로 두른 신세경의 옹골진 내면은 아마도 그녀에게 큰 무기가 될 것 같다.
신세경: 굉장히 후련해요. 사실 인터넷 기사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반응이 어떤지는 대충 들었어요. 초중반에 반응이 조금 격하게 올라와서 마음이 상한 시기도 있었지만 금방 잊었어요(웃음). 스스로는 내적으로 한 단계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작품이라 생각해요.
Q. 시청률이 조금 부진했기에 주변반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려웠겠어요.
신세경: 시청률이 잘나오면 큰 힘이 되죠. 저는 주변반응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제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보다는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얻은 느낌으로 작품을 기억하게 되요. 물론 처음 욕을 먹었을 땐 별 생각을 다했어요. ‘내가 캐릭터를 좀 더 순화해서 표현해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었죠. 만약 제가 그때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캐릭터를 변형했다면 많이 후회했을 거 같아요. 지금은 조금 욕을 먹기는 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냈기에 개운한 느낌이에요.
Q. 악역이라면 욕을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나요?(웃음) 물론, 미도는 악역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신세경: 물론 악역은 욕을 많이 먹을수록 좋은 거죠(웃음). 저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미도가 공감 받는 부분도 있고 욕먹는 부분도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부분이 아닐까요. 그게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고 생각해요.
Q. 당신 말처럼 시청자들 입장에선 공감하는 지점이 달랐기에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더 어려움이 컸을 듯한데요.
신세경: 일부러 착하게 보이려고 한 적은 없어요. 현실이 그만큼 복잡하기에 미도 역할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 중에 하나일 뿐인 거죠.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감정이 얽힌 캐릭터가 여럿이다보니, 각각의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 형성되는 감정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했다는 거예요. 초반부가 감정이 피어나는 단계라서 감정을 잘 잡아내지 못하면 후반부가 엉망이 될 것 같았어요. 감정의 단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숫자로 적어서 계산했죠. 원래는 ‘2, 3, 5’ 이런 식으로 수치를 적었는데 나중에는 상황이 점점 쪼개지고 감정선이 얽히다보니까 ‘3.2, 4.6’ 뭐 이렇게 까지 세분 했었어요(웃음).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신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Q. 그런데 작품을 보다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태상(송승헌), 재희(연우진)과의 관계보다는 미도의 내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 들더라고요.
신세경: 그게 바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에요. 아마도 많은 분들은 멜로드라마를 기대하고 보셨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연기할 때 미도 개인의 내적 성장과정에 중점을 뒀어요.
Q. 초반에 미도가 보여준 세속적인 욕망에 얽힌 이야기와 극 후반의 내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들 간의 자연스런 연결이 쉽지는 않았을 듯해요.
신세경: 미도는 다양한 이중성이 있는 아이에요. 물질적인 욕망도 있고, 태상의 도움을 받을 때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도 있죠. 또 굉장히 이성적인 척 하려고 하지만 종종 감정의 폭풍에 휘둘리기도 해요. 그런 모습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배역 준비에 공을 들였어요.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요. 물론 어려움도 있었죠. 미도가 보편적인 삶의 형태는 아니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삶의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제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노력했어요. 미도가 느끼는 감정의 폭풍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바라보는 느낌을 담으려 했죠. 그래서 두 남자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거죠. 여러모로 결여된 부분이 많은 캐릭터라서 더 애착을 가지고 고민하게 됐죠.
Q. 하지만 너무 복잡한 감정선을 내면 연기로 소화해서 인지 약간은 무미건조한 연기를 펼쳤다는 평도 많았어요.
신세경: 미도가 느끼는 감정의 갈래들이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뻗어 있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 너무 과도한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는 일종의 부담감도 있었어요. 그런 측면에선 시청자들께서 ‘무미건조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 캐릭터 자체가 감정선이 모호하게 설정되기도 했고, 뒤 따라 나오는 내용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감정을 터뜨리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폭이 넓지는 않지만 0.1mm라도 감정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담아내려 애썼어요.
Q. 참 연기하기 어려웠겠어요. 두 남자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신세경: 정말 좋았죠. 두 분 다 연기 스타일이 달라요. 특히 태상과의 관계도 복잡하지만, 재희가 느끼는 감정이 더 복잡한 터라 더 대화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재희의 고민과 미도의 고민을 공유하다보면 접점을 찾게 되더라고요.
Q. 실제로 본인이 미도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 같나요?
신세경: 저라면 둘 다 안 만나고 꿈을 찾아갔을 걸요?(웃음)
Q. 사실 초반에는 미도의 세속적인 욕망, 두 남자들과의 감정선 만큼이나 ‘미도의 꿈’도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근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부분이 약하게 다뤄졌더군요.
신세경: 맞아요. 그렇게 느끼시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사실 미도 나이 때는 그렇게 자신의 꿈을 갖는 게 당연하고,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꿈을 쫓아가는 게 현실적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드라마 상에서 애정문제와 그 부분이 엮이다보니 조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죠. 마지막 화에서 태상과 미도가 재회할 때는 2년의 시간이 흘러 있잖아요? 저는 그 2년의 시간 동안에 미도가 얼마나 자아를 성장시키고 돌아왔는지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한 것은 앞으로 두 남녀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서막이기도 하지만, 미도 입장에서는 좀 더 당당한 삶의 주체가 되어 태상 앞에 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일이었죠. 하지만 그게 드라마에서는 그 시간이 무척 짧게 다뤄지다 보니 공감대 형성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Q. 작품을 준비하면서 따로 기울인 노력이 있나요? 더불어 아쉬움 점도 있을 듯해요.
신세경: 사실 참고할 만한 자료도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미도같은 캐릭터가 없더라고요(웃음). 극의 중후반부에는 남녀관계의 감정선 때문에 미도의 세속적인 욕망이 많이 축소됐는데, 사실 제가 가장 집중한 부분은 미도가 초반에 물질적인 것들에 욕심을 갖게 되는 모습을 담는 것이었어요. 지나고 보니 그런 것들보다는 남녀관계의 감정적인 부분들만 부각된 거 같아서 조금 아쉬움이 남아요.
Q. 남녀관계의 감정선도 중반부까지는 활활 타올랐는데 후반부에 가면서 휴먼드라마로 바뀌고 일순간에 사그라지는 느낌이 강했어요. 미도가 쏟아 놓은 감정들을 채 주워 담지 못한 느낌도 들더군요.
신세경: 똑바로 보신 것 같아요(웃음). 드라마를 할 때면 항상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물론 드라마 연기를 하는 배우라면 당연히 순발력 있게 적응해서 최대한 단시간 내에 정확한 감정을 표현해 내야하죠. 그 부분은 저도 아쉬움이 남아요.
Q. 이젠 작품이 끝났으니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거 같아요. 세경씨가 느끼기엔 <남자가 사랑할 때>의 의미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신세경: 제목처럼 단순하게 정말 남자가 사랑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아요(웃음). 근데 사랑이란 게 남녀 간의 애정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타이틀만 보면 태상이 미도를 사랑할 때 같지만,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것은 굉장히 다양한 인간애인 것 같아요. 사랑이 얼마나 복잡해요. 쉽게 정의내리기 어렵죠(웃음). 그냥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아요.
Q. 극 중에서 글방 앞의 칠판과 다양한 책들이 나왔던 게 기억에 남아요. 특히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었나요?
신세경: 제가 드라마 속에서 제일 좋아했던 장치도 바로 그거에요. 아날로그 감성도 느껴지고 그래서 요즘 트렌드와는 조금 다르잖아요. 칠판에 써진 글을 보러 책방까지 오는 불편함을 감수했기에 극 중 남녀 간의 감정이 더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제일 좋아했던 글귀는 “너에게 불러줄 노래가 있으니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나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시에요. 극 중 모든 글귀들이 남녀 문제만 다룬 것이 아니듯, 이 글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살기 싫을 때 보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느낌이에요. 시가 정말 좋아서 대본에도 적어 놓고 틈틈이 읽었어요.
Q. <남자가 사랑할 때>의 서미도 캐릭터도 그렇고 2012년 SBS 드라마 <패션왕>의 이가영 역도 뭔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 작품 캐스팅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나요?
신세경: 사실 모든 드라마 속에는 갈등이 있고 그런 갈등을 통해서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기에 다 비슷한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연기하면 정말 좀 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느끼시는 것 같아요(웃음). 이번에 <남자가 사랑할 때>의 캐스팅은 김상호 PD가 제가 나온 영화 <푸른소금>(2011)을 보시고 난 후에 바로 저로 결정하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Q. 세경씨는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부분을 보고 고르시나요?
신세경: 이번 작품도 그렇지만 대체로 시놉시스를 보면 느낌이 와요.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 달까. 그게 대사 한 줄이나 어떤 신 하나가 될 수도 있는데, 이번에는 극의 1, 2화가 그랬어요. 태상을 찾아가서 날 사면 어떠냐고 묻는 미도의 성격도 좋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회차에요. 저는 원래 인연을 믿어요. 그래서 작품을 하게 되는 것도 인연이고, 거기서 어떤 배우를 만나는 것도 다 저의 인연이라 생각해요. 또 저는 제 의사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요. 부담감을 나눠가지려는 거죠(웃음).
Q. 앞으로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은지도 궁금해요. 초기작부터 살펴보면 계속해서 이미지 변신을 해온 것 같지만, 최근에는 반복되는 이미지가 계속된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신세경: 저는 계속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져가려는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이미지 변신에 대한 부담도 없죠. 단지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부족함을 메워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Q. 세경씨는 연기생활을 하면서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신세경: 사실 부족한 점을 발견한지는 몇 년 됐는데 처음에는 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때는 자신감이 바닥이었어요. 그래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저의 부족한 점을 고쳐나가는 과정에만 집중했어요. 물론 자신감을 상실해서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목표가 있으니까 능동적으로 계속 뭔가를 하게 되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부족한 점을 좀 더 능동적으로 대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죠.
Q. 이제는 어느 정도 본인의 장단점도 파악이 됐을 듯한데요.
신세경: 장점은 열심히 하는 거죠(웃음). 물론 나는 뭘 좀 잘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있지만 매번 작품을 하다보면 또 난관에 부딪히는 것 같아요. 단점 같은 경우에는 너무 많아요(웃음). 사실 흥행성적, 시청률 이런 것에 대한 문제는 아니에요. 다만 제가 아쉬움을 느꼈던 것들에 대한 문제죠. 하지만 저는 제 부족한 점을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에요. 대중들이 그것만 보실까봐서. 어떻게 보면 전략적이죠(웃음).
Q. 차기작에 대한 고민도 있을 거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고요.
신세경: 앞으로의 계획은 없어요(웃음). 차기작을 잡아두면 계속 긴장상태가 돼서 편히 쉴 수가 없더라고요. 당분간 쉬면서 문화생활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가족여행도 계획 중이에요. 물론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드라마든 영화든 해야죠. 최근에 든 생각이지만 영화가 드라마보다 찍는 환경이 좋고 여유롭다고는 해도 제가 그 장르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 같아요. 때론 제가 너무 그릇이 작아서 다 담기에는 넘치는 느낌? 그래서 영화는 스스로의 감정이 더 풍부해지고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을 때, 그리고 잘할 수 있을 때 도전하려고 해요. 세상에 쉬운 일이 없더라고요(웃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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