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플럭서스뮤직

이승열은 자신만의 음악적 울림과 결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쏟는 싱어송라이터의 전형이다. 그의 존재가치는 대중적 인기나 트렌드보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운드 탐험과 진지한 음악적 태도를 잃지 않는 탁월한 창작자라는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1994년 2인조 유앤미블루(U&Me Blue)로 공식 데뷔해 선구적인 모던 록 사운드를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이어진 그의 음악여정은 ‘뮤지션이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추앙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최근 창작의 한계점으로 여겨지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발표한 정규 4집은 오히려 전작들의 성과를 뛰어넘는 다른 레벨의 예술적 울림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이승열에게는 ‘한국의 보노’, ‘한국 모던 록의 자존심’, ‘국보급 싱어송라이터’란 별명이 따라 다닌다. 과거 이 같은 찬사들은 일부 추종자들의 팬심을 증명하는 화려한 수사로만 생각했었다. 실제로 이승열도 그 같은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4집을 들어본 이후 그 정도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오버일까? 인터뷰 약속을 잡은 이후, 유엔미블루 1집부터 솔로 4집까지 7장의 음반을 연대기 순으로 다시 들어보았다. 추억의 질감으로 다가오는 음반도 있었지만 그가 끊임없이 음악적 발전을 거듭해 온 현재 진행형 뮤지션이고 무엇보다 매력적인 보컬리스트임을 새삼 깨달았다.

보컬과 기타 사운드가 중심을 유지했던 솔로 3집까지 그의 음악여정을 생각해볼 때 4집은 그동안 구축했던 자신의 음악적 틀을 여지없이 깨버린 획기적인 음반이다. 사실 보컬이 아닌 연주가 중심인 생소한 이국적 악기를 도입한 실험적 음악은 내 경험상 지루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앨범은 그 같은 내 선입견도 무참하게 깨트렸다.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기막힌 울림으로 들려준 음반을 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신보 이야기와 그의 굴곡 많은 음악여정을 듣기위해 교통방송으로 찾아갔다. 방송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에는 심각한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고 여유로움이 넘쳤다. 자연스럽게 신보 이야기를 꺼내며 앨범 발표 주기가 4년이 기본이었는데 2년 만에 신보가 나와 반가웠다고 말했다. “곡이 빨리나왔고 예전에는 앨범의 방향이 여러 갈래였던지라 오래 걸렸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간다는 방향타가 분명했습니다. 스튜디오 녹음은 진행이 지지부진해 초심이 흔들려 다른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가장 울림이 좋았던 공연장에서 원테이크 녹음방식으로 시스템을 단순화해 6곡을 3일 동안 2프로씩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혐오와 연민의 느낌이 가득한 이국적 분위기의 1번 트랙 ‘Minotaur’는 모로코인 오마르가 낭송하는 불어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마치 70년대에 아랑드롱이 낭송했던 ‘Paroles Paroles’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유학생 프헝이 연주한 베트남 악기 ‘단보우’ 소리는 이국적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랍 남자의 목소리를 내 음악에 넣고 싶었는데 낭송을 인트로로 넣자는 오마르의 제안을 수용했고 어느 날 차를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다 단보우 연주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차를 세우고 경청했을 정도로 기분 좋은 우연이었습니다.”

4집을 들으며 수록곡들의 엔딩 부분에서 소리가 없는 여백이 몇 초 간 계속되는 것은 의도적 시도인지 여부와 3번 트랙 ‘who’의 경우 클럽 벨로주와 스튜디오 2가지 녹음 버전을 함께 수록한 이유가 궁금했다. 벨로주 버전은 악기들의 울림이 놀랍도록 명징한 반면 보컬에 대한 아쉬움이 있고 스튜디오 버전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견이네요(웃음). 이번 음반은 영국 마스터링 스튜디오 메트로폴리스에서 마무리 작업을 해 제가 모니터한 후 최종 결정했죠. 사실 이전 음반들의 결과물이 곡 후반의 잔향을 쳐내버리는 경향이 있어 싫었는데 의도적으로 여백을 넣은 것은 아닙니다. ‘who’의 두 가지 버전은 회사에서 보컬 부문의 아쉬움이 있으니 곡의 매력이 살리기 위해 스튜디오 재녹음을 제안했습니다. 둘 다 수록한다는 전제하에 가벼운 마음으로 밴드를 소집해 원테이크로 연주했습니다. 다만 보컬은 얇은 질감을 두껍게 만드는 작업을 집에서 진행해 더빙하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사실 두 가지 버전이 청자들에게 어떻게 비교될지 궁금했습니다.”

사진제공. 플럭서스뮤직

이승열은 데모를 정교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항상 “왜 데모를 그냥 쓰지 못할까” 의문을 품었다. 더 훌륭한 기기들을 사용해 녹음하면 해상도가 선명하고 소리자체가 딴딴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자신이 구상했던 원석이 변질되는 결과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1, 2집을 거의 듣지 않는다. 3집부터는 이를 악물고 원래의 질감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경질 적인 반응도 숨기지 않았죠. 그래서 완벽을 추구하는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과도 인간적으로 멀어지는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 제가 원했던 결과물이 나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엔미시절엔 노래할 때 담배를 피며 무대뽀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2집 때는 심적으로 껍데기만 남아 너덜너덜했죠. 지금 그때 음악을 들어보면 어떻게 이런 걸 음반에 실을 수 있었을까 섬뜩합니다.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합니다.”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승열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필리핀에서 1년 간 살았다. 필리핀에서 유행하는 유행가와 춤을 좋아했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 학년 밑으로 재입학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 여동생이 1년 만에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했을 때 오르간을 근사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연주 잘하는 동생을 보고 자랑스러웠지만 열등감이 생겨 저도 음악을 하고 싶었죠. 헌데 엄마가 선생님에게 물어봤는데 넌 음악재능이 없었다고 단칼에 자르더군요.(웃음) 여동생은 줄리아드 음대에서 석사까지 받았습니다.”

최헌의 ‘오동잎’, ‘가을비 우산 속에’ 같은 가요를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성가대 활동을 했던 어머니가 구해준 클래식 음악에 몰두했다. 그때 온돌 파이프가 터져 집 정리를 했을 때 외삼촌이 준 바이올린을 발견한 어머니가 콘크리트 돌조각에 던져 부셔버렸다. “엄마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봤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시데요. 성가대활동은 허락하셔서 6학년 때까지 했는데 제가 악보를 잘 못 봐 다들 밑에 음을 내는 데 정반대로 높은 음을 내서 엄청난 망신을 당했죠. 난로가 너무 뜨거워 비명을 지른 거냐고 사람들이 말해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유앤미블루 시절 이승열의 모습

1984년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승열은 부모님의 행상 일을 도우며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1989년 뉴욕주립대에 들어간 그는 빙햄튼 캠퍼스에서 예술사를 공부했다. 의무적으로 기숙사생활을 했던 신입생 때 한 크리스천 모임에서 방준석을 만났다. 취미로 기타를 쳤던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룸메이트로 오기로 했던 백인이 오지 않아 혼자 2인용 방을 쓰고 있던 이승열은 “룸메이트가 너무 문란하다”며 불만을 드러낸 방준석과 한 방을 사용했다. 두 사람의 첫 무대는 한인학생회가 주최한 코리안 나이트 축제. 어니언스의 ‘편지’ 등 4-5곡을 불렀다. 이후 밴드 결성을 염두에 두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3학년 때 2집 타이틀 곡 ‘지울 수 없는 너’의 작곡자인 드러머 최철이 들어왔고 베이스는 방준석 친동생 방준원이 전학을 와 4인조 라인업을 구축했다.

밴드 이름이 필요했다. 이승열은 ‘왕’, 막내 방준원은 ‘유앤미블루’를 제안했다. “사람들이 U2의 유자를 흉내 냈냐고 말해 막내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블루지한 색이 우리와 맞닿은 것도 있고 그나마 막내의 제안이 제일 그럴듯해 대안이 없어 양보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U2의 그늘이 따라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밴드 결성 후 더빙이 가능한 고급 4트랙 머신과 드럼 셋을 마련했다. 자신들의 노래를 듣고 지인들에게 줄 수 있어 신기했다. 메릴랜드 동부 한인대학생 가요제에 출전했다. 당당히 우승을 한 이들은 한국에서 열리는 대학가요제에 가는 1인용 항공비 1,000불을 부상으로 받아 250불씩 나눠 가졌다. 그때 심사위원을 했던 이수만이 “데모가 있냐”고 물어와 테이프를 주며 살짝 꿈에 부풀었지만 결국 “너희는 내가 도와줄 부분이 없을 것 같다”는 비보를 들었다.(part2에 계속)

이승열 프로필
1970년 서울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빙헴튼 캠퍼스 졸업
1991년 4인조 유앤미블루(U&Me Blue) 결성, 메릴랜드 동부 한인대학생 가요제 대상
1994년 2인조 유앤미블루(U&Me Blue) 데뷔, 유앤미블루 1집 ‘Nothing’s GoodEnough’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41위
1996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OST 2집 수록곡 ‘그대 영혼에’, 유앤미블루 2집 ‘Cry…Our Wanna be Nation’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23위
2004년 솔로 1집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앨범, 올해의 남자 가수 노미네이트
2008년 5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아도나이’ 최우수 모던록 노래 2관왕
2012년 솔로 3집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 노래부문 2관왕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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