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이지가 집요하게 묻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영화 '플라워 킬링 문'에 관련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미국의 그늘진 시대상을 보다 날카로운 시각으로 스크린 위에 선명하게 드러내는 감독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감독은 내부로 파고들기보다는 경계선 바깥에서 거시적으로 포착한다.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좋은 친구들'(1990), '갱스 오브 뉴욕'(2002), '디파티드'(2006),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 '아이리시맨'(2019) 등 그의 대표작을 나열하기 벅찰 정도다.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얼굴이 되는 두 배우가 있다. 마틴 스콜세이지가 걸어온 길을 동행하는, 소위 페르소나(persona)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반항기 가득한 눈빛으로 "You talking to me?"라고 거울 속 자신에게 되묻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버클(로버트 드 니로)와 조각난 단서 너머에 불투명한 진실을 응시하는 '셔터 아일랜드'의 테디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혼돈에 휩싸인 표정까지. 두 배우는 마틴 스콜세이지 영화에서 인생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아이리시맨' 이후, 4년 만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참혹한 시대의 잔상들을 이어 붙인다. 1920년대 오클라호마를 배경으로 석유 시추로 인해 살해 당하는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플라워 킬링 문'은 데이비드 그랜의 녹픽션 소설 '플라워 문'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20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점차 일그러지는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얼굴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어니스트의 첫 등장은 북적거리는 기차 칸에 앉아 권태로운 얼굴로 차창 밖을 미동 없이 바라보는 모습이다.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어니스트는 이방인과 다름없다. 비혈연 관계인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농지에 방문한 어니스트는 마을의 '부유함'이 시작된 사연을 듣게 된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부글거리던 땅 속에서 용오름처럼 솟구쳐오른 검붉고 진득한 석유는 아메리칸 인디언 오세이지족의 신체 곳곳을 덮는다. 석유의 수익권을 소유한 인디언들은 '오일머니'를 받으며, 기존에 계승되어오던 문화 대신 백인들이 구축한 그들의 문명 안으로 발을 들이밀게 된다. "석유도 없고 시간이 흐르면, 이 부유함도 마르겠지"라는 킹 헤일의 대사처럼 인디언들의 시간은 백인들에 의해 빼앗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 어니스트는 죽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도한 인물이지만, 그만큼 무뎌진 상태다. 취사병이었던 어니스트는 "독감으로 더 많이 사망했다"라며 삶과 죽음의 단계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원인 모를 인디언들의 연속적인 죽음은 '플라워 킬링 문'의 서사 안에 반복적으로 틈입한다. 특히 택시 운전수로 일하는 어니스트는 단골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 고상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모습에 눈길이 쏠린다. 몰리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접근해보라는 킹 헤일의 제안이 있었다지만, 몰리를 향한 어니스트의 눈빛은 누구보다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두 사람의 달콤한 만남은 이내 검은 속내를 지닌 킹 헤일이 옥죄어오는 속도로 인해 빠르게 형태를 바꾼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몰리의 언니 애나, 동생 리타, 미니, 어머니 리지는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다. 킹 헤일의 입바른 말에 아내 가족들의 시간을 빼앗는 어니스트는 죄책감과 욕망이 한데 뒤섞여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병으로 죽은 미니와 살해당한 애나, 폭탄에 의해 불타 죽은 리타, 나이 든 리지의 죽음까지. 몰리에게 들이닥친 폭풍은 그녀를 고요한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당신들이 오기 전에 내 조상들은 자유롭게 살았어"라는 오세이지족 족장의 실체 없는 외침은 돈을 좇는 이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어니스트와 몰리는 같은 집에서 일상을 공유하지만, 그 너머에는 범인과 피해자라는 불편한 사실이 공존한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사설탐정을 고용한 몰리를 앞에서는 응원하지만, 뒤에서는 방해하는 어니스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다.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몰리의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어니스트는 무엇이 중요한지 전혀 판단하지 못한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사실 '플라워 킬링 문'은 어니스트, 몰리 부부와 킹 헤일의 사적인 욕망을 조명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인디언 집단 전체를 농락하는 백인 사회의 잔혹함을 은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태도는 '어니스트의 권태로운 얼굴이 언제 존재했었지?'라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FBI 국장 에드거 후버의 명령으로 몰리 가족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수사하면서 사건을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족, 종족, 집단이 지닌 검붉은 풍경을 보여준다. 아내 몰리가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목놓아 절규하는 모습이 여러차례 등장하지만, 어니스트는 순간의 죄책감만 스칠 뿐 죽음을 체감하지 못한다. 어니스트에게 몰리 가족의 죽음은 돈을 차지하기 위한 거추장스러운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사진제공=Apple TV+
어니스트는 자신의 딸 애나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죽음의 무게를 깨닫는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의도적으로 몰리의 언니 애나의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 뒤에 어니스트의 딸 죽음을 편집으로 붙이는 기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몰리의 절규를 들어왔지만, 마지막 순간에 어니스트의 후회 섞인 울음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표면적으로 1920년대 인디언의 땅과 권리를 빼앗은 괴물 같은 백인들의 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은 '죽음', '권리'를 우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한 기나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목에서 언급한 '플라워 킬링 문'(Flower killing moon)은 인디언 부족들이 5월을 꽃을 죽이는 달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초반부 "달면 달수록 좋지 않아요. 난 달면 아파요"라는 몰리의 대사처럼, 어니스트는 돈이라는 달콤한 욕망을 좇다가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딸 애나의 죽음 전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어니스트. 어쩌면 우리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시점이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10월 19일 개봉. 러닝타임 206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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