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클리셰 비튼 시도
강하늘과 정소민의 매력적인 케미
지연된 시간과 불통이 이뤄지는 부부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영화 '30일'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장르 영화(genre film)에는 관습처럼 내려오는 클리셰(cliché)가 있다. 개처럼 일하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는 조직원의 복수극을 담은 느와르나, 악행을 일삼는 빌런을 처단하고 홀연히 마을을 떠나는 서부극, 어둠 속에 숨은 의문의 존재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가 화를 당하는 공포영화에 이르기까지. 1895년 영화가 탄생한 이후로 이야기와 스타일에 따라 구분되는 장르 영화는 다르지만 엇비슷한 장면들을 종종 엿볼 수 있었다.특히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톰과 제리처럼 서로를 죽일 듯 싸우다가 사랑을 깨닫게 되는 장치가 중심이 된다. 여기, 로코 장르의 익숙함을 비틀며 변칙적인 시도를 한 작품이 있다. 피터 시걸 감독의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2004)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루시(드류 베리모어)를 연상케 하는 영화 '30일'은 기억을 소재로 로맨스를 풀어간다. 기존의 로맨스 영화들에서 한 사람이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은 기억을 되찾아주려는 구성이었다면, '30일'은 이혼을 앞둔 부부가 사고로 동반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훈훈한 외모와 달리 찌질하고 어리숙한 남편 정열(강하늘)과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요구하는 똑부러진 모습과 함께 의외의 똘기를 탑재한 아내 나라(정소민)는 시작부터 불통(不通) 상태다. 영화는 첫 장면은 블랙아웃 화면에서 오프스크린으로 들려오는 "연애만 6년 했습니다"라며 한숨 섞인 정열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어 결혼식 장면이 그려지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 나라가 등장한다. 행복한 날임에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의 나라는 맞지 않는 옷인양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정열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결혼식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예측했겠지만, 정열은 술자리에서 나라와 이별했다고 말한다.'30일'은 순차적인 시간 배열이 아닌 비선형적인 구성을 통해 손뼉이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결혼식장을 도망쳐 나와 정열 앞에 선 나라는 "다음부턴 늦지 마"라고 말하지만, 두 사람의 타이밍은 애초에 삐그덕댄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던 정열은 '백수'라는 단어에 꽂히고, 넉넉하게 살던 나라는 '너거는 부잣집이라서'라는 문장이 올가미가 된다. 본질적으로 다름을 이해하는 태도는 소거되고 상대의 입을 막는 반복된 상황을 결혼생활 내내 지녀온 것이다.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정열과 나라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 보자. 군대 동기이자 웨이터 기배(윤경호)의 도움으로 정열은 나라와 소개팅 아닌 소개팅 30초를 하게 된다. 정열 특유의 살인미소에 놀라 도망친 나라. 이들의 만남은 나라가 목에 걸린 무언가로 캑캑대는 상황에서 하임리히법으로 그것을 토해내면서 이뤄진다. 짧은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나라는 정열이 아닌 병원의 의사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어긋난 운명은 야구장 전광판에서 꽥꽥대면서 분노를 토해내는 나라를 목격한 정열에 의해 다시 이어진다.아이러니하게도 망가진 부부 사이를 드러내는, 야구공으로 인해 찢어진 결혼사진은 정열과 나라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절묘하게 결혼사진 속 정열과 나라가 야구공에 맞은 부위는 눈과 입이다. 입에 걸린 무언가를 빼주며 인연이 시작되었지만, 다시금 상대의 입을 막는 불균형한 부부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이후 정열과 나라는 이혼 조정 기간 30일을 부여받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난다. 눈을 뜬 두 사람의 기억에서 서로의 존재는 새까맣게 지워져 있다. 결혼했다는 사실은 각자의 부모와 사진으로 더듬더듬 흔적을 찾아갈 뿐이다. 나라의 엄마 보배(조민수)와 정열의 엄마 숙정(김선영)은 기억은 찾되, 예정대로 이혼은 진행시키는 작전에 돌입한다. 나라의 동생 나미(황세인)의 감시하에 기억 찾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이끌렸던 정열과 나라는 헐뜯고 미워하던 과거는 저편에 두고 다시금 설레기 시작한다. 새로운 도화지 위에 각기 다른 형태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는 '이해'의 시간이 생겨난 것이다.어째선지 늘 이 타이밍이 문제다. 사고로 바닥에 있던 야구공을 밟고 넘어진 정열은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반면 나라는 기억을 잃은 상태 그대로다. 보통의 로코 영화라면, 나라 역시도 다시 기억이 돌아올 테다. 남대중 감독은 이혼을 결심했던 순간처럼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바뀐 정열과 나라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30일이 지나며 속전속결로 지나간 이혼 조정 기간으로 인해 나라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정열은 같이 살던 집에서 짐을 빼낸다.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못내 정열과 나라의 이혼이 아쉬웠던 보배는 비행기가 떠나는 시간을 알려주고 정열은 나라를 붙잡으러 떠난다. 친구들이 정열에게 두 사람의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라고 말한다. 이에 정열은 회상신으로 나라와의 추억을 애써 보지만 투닥거리는 찡그릴만한 과거뿐. 정열은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보통 회상신은 아름다운 거 아냐?'라고.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시월애', '엽기적인 그녀', '접속' 등의 로맨스 영화를 보면, 늘 응답이 늦은 남녀가 나온다. 제시간에 마음은 도착하지 못하고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2000년대 한국 로맨스 영화가 의미 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편지나 삐삐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들은 지연된, 공백이 생긴 시간 속에서 조금씩 어긋났다. 2000년대 이후, 휴대폰의 보급으로 로맨스 영화는 다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당돌하고 마음을 숨기지 않는 로맨스로 변한 것.

영화 '30일' 스틸컷. /사진제공=㈜마인드마크


물론 '30일'은 다소 거칠고 개연성 측면에서 헐겁다. 유치하게 서로에게 흠집을 내며 내뱉는 대사들이나 기억을 잃고 다시금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아쉽다. 강하늘과 정소민이 묘사한 정열과 나라 캐릭터 역시 현실적이고 입체적이지만, 설렘이 부족하다.

다만, 시간의 지연과 응답과 수신을 중심으로 삼아 장르의 익숙함 위에 새로움을 덧씌우려는 남대중 감독의 의도는 잘 드러난 듯하다. 조민수, 김선영, 윤경호, 황세인 등의 주변 인물들도 존재감을 톡톡히 보여주며 재미를 더한다. 어쩌면 '30일'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서 늦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하는가 혹은 너무 늦어버려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 것일까.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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