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을 구성하는 무수한 입자들
이름이라는 족쇄로부터
뭉뚱그려진 형태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싶지만, 문장의 속뜻을 파헤쳐보면 어딘가 묵직한 느낌이 든다. 인간의 삶의 궤적을 압축한 이름은 영원히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영화 '한 남자'(감독 이시카와 케이)는 서로의 삶에 개입하기 위해서 혹은 이전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름을 지운 이들의 처절한 생존기다. 초반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액자 속 남자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지만 역시나 뒷모습으로 그려진다. 순간 액자 앞으로 같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스치듯 지나간다. 의미심장한 초반부 장면에서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 동일 인물인 것처럼 뭉뚱그려진 형태는 '나'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명하는 듯하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에서 비는 이전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문구점에서 일하는 리에(안도 사쿠라)는 그림 재료를 사기 위해 문구점에 들어온 남자를 보게 된다. 눈 밑이 깊게 팬 피폐한 몰골의 남자는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다. 천둥·번개로 인해 전기 차단기가 내려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게 된다. 남자는 "혹시 괜찮다면 친구가 돼주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서 견고했던 각자의 벽을 넘어 내부로 진입하게 된다.남자는 다이스케(쿠보타 마사타카)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을 리에에게 건네주고, 명함이 없는 리에는 종이 위에 자신의 이름을 꾹꾹 눌러 담아 전달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묻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나누며 다가올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딸아이의 죽음으로 지난한 시간을 보내오던 리에에게 다이스케는 죽은 아이의 이름을 묻고 함께 애도하는 과정을 보낸다. 딸아이의 죽음과 함께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다는 리에는 아들 유토와의 일상을 다이스케와 함께한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다이스케가 선택한 벌목업은 그의 일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적 표현이다. 특히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무게 중심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서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특수성이 바로 그것이다. 리에와 재혼을 하며 가정을 이룬 다이스케는 아들 유토와 함께 일하는 벌목 현장을 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 애써 균형을 없앤 나무에 자신이 깔려서 죽게 된 것. 다이스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방아쇠가 된다. 오랜 기간 교류를 끊었던 다이스케의 형 쿄이치는 영정사진을 보고는 그간 알고 있던 다이스케가 진짜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한다.그간 다이스케라는 외피를 덧씌우고 정체를 숨겼던 남자의 진짜 정체와 이름을 알고자 한 리에는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의문의 남자 X의 흔적을 쫓는 키도의 첫 등장은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한 남자'를 특정한 인물 X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착잡한 얼굴로 비행기의 창가 유리창을 바라보는 키도의 얼굴은 환한 빛이 감싸 안고 있다. 창가를 바라보던 키도는 이내 빛을 인식하고는 불편한지 창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키도는 빛보다는 음지에 닿아있는, 어쩌면 X와 닮아있는 인물이다. 재일교포 3세로 아내의 집안에서는 은근한 무시를 하고, 자신마저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라고 불리는 자신의 상황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사건을 추적할수록 키도는 X와 자신이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시작한다. 범죄의 가능성으로 인해 시작된 수사이지만 어느샌가 사건 자체에 몰입한 키도는 사칭 사건을 찾다가 호적 교환 브로커의 꼬리를 뒤좇는다. 교도소에 수감된 오미무라는 진실을 묻는 키도를 농락하듯 X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 오히려 재일교포 3세라는 것을 물고 늘어지며 키도에게 모욕감을 줄 뿐이다. 치욕스러운 상황 앞에서도 키도는 사건의 실마리가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헤친다. 그중에서도 X가 사고로 사망하기 전에 그렸던 그림을 단서 삼아 추적에 박차를 가한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년이 그대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X의 그림은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없는 풍경이 대부분이지만, 기묘함을 풍기는 눈과 얼굴이 뭉개진 사람의 그림을 떠올린 키도. 그림을 추적한 키도의 발걸음 끝에는 X의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사형수의 아들이었던 X는 아버지를 똑 닮은 자신의 얼굴과 물려받은 이름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했던 것. 이전 세대의 죄가 고스란히 이어지듯 이름은 마치 자신의 죄악처럼 족쇄가 되어 따라다닌다. X의 이름이 다이스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은 아들 유토가 "나 다음엔 누가 되어야 해?"라는 물음처럼 말이다. 부모의 성을 따라야 하는 다음 세대의 아픔은 씻기지 않는 상처가 돼버리고야 만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테두리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며 '한 남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사진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는 X라는 인물 한 사람이 아닌 그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을 조명하며 본래의 이름을 지우게 된 이유를 천천히 따라간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미스터리를 좇는 추적기임과 동시에, 개인을 구성하는 무수한 입자들이 삶의 방향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도 덧붙이며 깊이를 더한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한 남자'의 뭉뚱그려진 얼굴은 표정을 감히 짐작할 수 없어 더욱 마음이 아려온다.

'한 남자' 8월 30일 개봉. 122분. 12세 관람가.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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