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작
독립영화계 잔뼈 굵은 배우들 출연
'그때 나도 그랬지' 공감 가능한 섬세한 묘사
독립영화계 잔뼈 굵은 배우들 출연
'그때 나도 그랬지' 공감 가능한 섬세한 묘사
*이 글에는 영화 '비밀의 언덕' 스포일러가 포함됐습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대사. 웃기지만 어딘가 슬프다. 초중고 시절, 우리는 '나'로 존재하기보다 누구의 딸과 아들로 존재했다. 주기적으로 손에 받아든 가정환경조사서의 부모님의 학력, 직업란 앞에서 망설였던 경험들.
영화 '비밀의 언덕'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문승아)의 이야기를 담는다. 명은은 모든 것이 불만이다. 젓갈 장사를 해서 늘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엄마 '경희'(장선)도, 번듯한 직장을 잡지 않고 빈둥거리며 놀면서 젓갈 장사를 돕는 아빠 '성호'(강길우)도. 모두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과는 정반대다. 그래서 동경하는 가족의 형태를 자신이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미술 작품을 만들듯이 각종 재료를 덧붙여 '가짜 가족'을 만들어냈다. 그런 명은은 글쓰기 대회를 나가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한다.
1996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비밀의 언덕'은 그때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정도로 공감 가득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연출을 맡은 이지은 감독의 첫 영화 데뷔작임에도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을 파고들어 관찰한 것처럼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탁월한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12살 소녀 명은이 초등학교라는 총알 없는 전쟁터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방황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포착한다. '비밀의 언덕'은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신중하게 하나씩 문방구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는 명은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손에 꽉 쥔 유리컵처럼 쉬이 깨져버릴 명은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일까. 선물을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는 명은의 가벼운 발걸음은 집 안에 들어서자 바뀐다. 명은에게 집은 '나'가 아닌 부모의 딸로 존재해야 하는 족쇄 같은 공간이다. 게살을 쪽쪽 빠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명은의 가족은 웃음 포인트이자 동시에 명은의 자극제다. TV에서 나오는 불우이웃 모금 방송에 명은이 도와주자고 하자 가차 없이 "우리 집 가훈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라고 답하는 명은의 엄마는 억척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높은 명은과 가족 내부로 시선을 돌린 그들의 삶은 다른 선로를 걷고 있을 뿐이다.
명은과 담임선생님 애란의 상담은 일종의 방아쇠가 되는데 부모의 직업에 관한 질문에 명은은 거짓말로 답한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이 대답은 가짜 가족 만들기의 기폭제로 작동한다. 이제 명은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진짜 가족은 자신의 비밀이 된다. 갈팡질팡하면서도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명은은 급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도 같다.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조건을 뛰어넘고자 명은은 반장 선거를 나간다. 반장이 된 명은은 비밀 우체통을 만들어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획기적인 공약을 시작으로 반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명은의 정체성에는 이질감이 있다.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는 젓갈 가겟집 딸에 불과하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잘 챙기는 믿음직스러운 반장이자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규정짓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는 오히려 명은의 비밀을 거대하게 부풀리는 행위로 돌아선다.
반장으로서의 당당함과 때때로 눈치 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명은은 2009년 배우 문승아의 연기에서 비로소 완성됐다. 문승아는 어린 나이임에도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받은 바 있는 연기력을 입증한 아역배우다.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 ,'흩어진 밤'(감독 이지영, 김솔)에서 주연을 맡아 극의 중심을 끌고 가기도 했다. 여기에 배우 장선은 팍팍한 현실에 여유 없는 명은 엄마 경희를 맡아 명은의 답답함을 가중하고, 배우 강길우는 자식들조차 한심하게 생각하는 백수 아빠 성호로 분해 웃음을 더했다.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탄 딸 명은에게 "최우수상 타. 다음번엔"라고 말하며 고깃집으로 향하는 귀여운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담임 선생님 애란 역의 임선우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지만 아이들을 정성으로 챙기며 전형적인 선생님의 모습을 탈피했다. 독립영화계에서 잔뼈 굵은 이들의 만남으로 '비밀의 언덕'은 무게감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명은의 행보를 동행한다.
극적 긴장감은 명은이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서 시작된다. 와중에 세상 풍파를 겪은 얼굴로 같은 반에 전학 온 친구 혜진(장재희)의 등장으로 명은의 세계는 균열이 생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가정 상황을 밝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혜진은 비밀 가득한 명은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친구로 어울려 놀면서도 견제하는 명은의 복잡한 심리 변화는 '비밀의 언덕'의 핵심 포인트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관객들에게 '그때 그랬지'라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성원시 글쓰기 대회에 나가는 명은은 어떤 글을 작성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 "솔직한 것이 좋을 것일까, 거짓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했다는 이지은 감독은 극 중에서 명은이 글 쓰는 과정을 통해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감독의 고민처럼 명은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쩌면 우리 모두 겪어본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비밀의 언덕'은 차분하게 122분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포착한다. 얽히고설켜 있는 관계와 그것을 대하는 명은의 태도는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과 치기 어린 솔직한 마음으로 잘 버무려져 있다. '우리는 그때 어땠지?'라며 과거로 시간 여행하며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독립영화계에 또 다른 인장을 남길 '비밀의 언덕'은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는 감독으로서의 열망"이 가득 담겨있다. 12살 소녀 명은과 자신을 대입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오랜만에 잔잔하게 밀어붙여 관객들이 침착하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비밀의 언덕'은 7월 12일 개봉. 전체 관람가. 러닝 타임 122분.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대사. 웃기지만 어딘가 슬프다. 초중고 시절, 우리는 '나'로 존재하기보다 누구의 딸과 아들로 존재했다. 주기적으로 손에 받아든 가정환경조사서의 부모님의 학력, 직업란 앞에서 망설였던 경험들.
영화 '비밀의 언덕'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문승아)의 이야기를 담는다. 명은은 모든 것이 불만이다. 젓갈 장사를 해서 늘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엄마 '경희'(장선)도, 번듯한 직장을 잡지 않고 빈둥거리며 놀면서 젓갈 장사를 돕는 아빠 '성호'(강길우)도. 모두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과는 정반대다. 그래서 동경하는 가족의 형태를 자신이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미술 작품을 만들듯이 각종 재료를 덧붙여 '가짜 가족'을 만들어냈다. 그런 명은은 글쓰기 대회를 나가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한다.
1996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비밀의 언덕'은 그때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정도로 공감 가득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연출을 맡은 이지은 감독의 첫 영화 데뷔작임에도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을 파고들어 관찰한 것처럼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탁월한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12살 소녀 명은이 초등학교라는 총알 없는 전쟁터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방황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포착한다. '비밀의 언덕'은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신중하게 하나씩 문방구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는 명은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손에 꽉 쥔 유리컵처럼 쉬이 깨져버릴 명은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일까. 선물을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는 명은의 가벼운 발걸음은 집 안에 들어서자 바뀐다. 명은에게 집은 '나'가 아닌 부모의 딸로 존재해야 하는 족쇄 같은 공간이다. 게살을 쪽쪽 빠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명은의 가족은 웃음 포인트이자 동시에 명은의 자극제다. TV에서 나오는 불우이웃 모금 방송에 명은이 도와주자고 하자 가차 없이 "우리 집 가훈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라고 답하는 명은의 엄마는 억척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높은 명은과 가족 내부로 시선을 돌린 그들의 삶은 다른 선로를 걷고 있을 뿐이다.
명은과 담임선생님 애란의 상담은 일종의 방아쇠가 되는데 부모의 직업에 관한 질문에 명은은 거짓말로 답한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이 대답은 가짜 가족 만들기의 기폭제로 작동한다. 이제 명은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진짜 가족은 자신의 비밀이 된다. 갈팡질팡하면서도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명은은 급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도 같다.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조건을 뛰어넘고자 명은은 반장 선거를 나간다. 반장이 된 명은은 비밀 우체통을 만들어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획기적인 공약을 시작으로 반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명은의 정체성에는 이질감이 있다.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는 젓갈 가겟집 딸에 불과하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잘 챙기는 믿음직스러운 반장이자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규정짓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는 오히려 명은의 비밀을 거대하게 부풀리는 행위로 돌아선다.
반장으로서의 당당함과 때때로 눈치 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명은은 2009년 배우 문승아의 연기에서 비로소 완성됐다. 문승아는 어린 나이임에도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받은 바 있는 연기력을 입증한 아역배우다.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 ,'흩어진 밤'(감독 이지영, 김솔)에서 주연을 맡아 극의 중심을 끌고 가기도 했다. 여기에 배우 장선은 팍팍한 현실에 여유 없는 명은 엄마 경희를 맡아 명은의 답답함을 가중하고, 배우 강길우는 자식들조차 한심하게 생각하는 백수 아빠 성호로 분해 웃음을 더했다.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탄 딸 명은에게 "최우수상 타. 다음번엔"라고 말하며 고깃집으로 향하는 귀여운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담임 선생님 애란 역의 임선우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지만 아이들을 정성으로 챙기며 전형적인 선생님의 모습을 탈피했다. 독립영화계에서 잔뼈 굵은 이들의 만남으로 '비밀의 언덕'은 무게감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명은의 행보를 동행한다.
극적 긴장감은 명은이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서 시작된다. 와중에 세상 풍파를 겪은 얼굴로 같은 반에 전학 온 친구 혜진(장재희)의 등장으로 명은의 세계는 균열이 생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가정 상황을 밝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혜진은 비밀 가득한 명은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친구로 어울려 놀면서도 견제하는 명은의 복잡한 심리 변화는 '비밀의 언덕'의 핵심 포인트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관객들에게 '그때 그랬지'라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성원시 글쓰기 대회에 나가는 명은은 어떤 글을 작성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 "솔직한 것이 좋을 것일까, 거짓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했다는 이지은 감독은 극 중에서 명은이 글 쓰는 과정을 통해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감독의 고민처럼 명은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쩌면 우리 모두 겪어본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비밀의 언덕'은 차분하게 122분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포착한다. 얽히고설켜 있는 관계와 그것을 대하는 명은의 태도는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과 치기 어린 솔직한 마음으로 잘 버무려져 있다. '우리는 그때 어땠지?'라며 과거로 시간 여행하며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독립영화계에 또 다른 인장을 남길 '비밀의 언덕'은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는 감독으로서의 열망"이 가득 담겨있다. 12살 소녀 명은과 자신을 대입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오랜만에 잔잔하게 밀어붙여 관객들이 침착하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비밀의 언덕'은 7월 12일 개봉. 전체 관람가. 러닝 타임 122분.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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