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윤여정, 오스카 여우조연상 유력
영화 속 '그리고 윤여정' 주목
연기력, 수상수감으로 전세계인들 매료
오는 26일(한국시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배우 윤여정./ 사진=텐아시아DB


≪노규민의 영화人싸≫
노규민 텐아시아 영화팀장이 영화계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배우, 감독, 작가, 번역가, 제작사 등 영화 생태계 구성원들 가운데 오늘뿐 아니라 미래의 '인싸'들을 집중 탐구합니다."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좋은 배우로 인정해줬다"

한국의 할머니 배우 윤여정이 이 한마디로 유럽에서 '인싸'가 됐다. 지난 12일 열린 '2021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주인공으로 호명된 윤여정이 남긴 수상소감이다.이날 시상식이 끝난 뒤 해외 유력 매체들은 작품상, 주연상 수상자가 아닌, 윤여정에 주목하며 "이 밤의 주인공"이라고 엄치를 치켜세웠다.

인디펜던트는 "윤여정의 '고상한 체'하는 발언에 시청자가 매우 즐거워했다"고 했고,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윤여정이 전체 시상식 시즌에서 우승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앞서 미국배우조합상(SAG) 수상 때도 "동료 배우들이 나를 수상자로 선택해줬다는 것이 더욱 감격스럽다. 미국 배우조합(SAG-AFTRA)에 감사드린다. 이름이 정확한가? 내겐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재치 있는 소감을 전했다. 인디와이어는 "순수하고 여과되지 않은 정직한 순간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어느 소감보다 명료했다"고 칭찬했다.
영화 '마나리' 윤여정./ 사진제공=판씨네마

윤여정은 지난해 열린 제36회 선댄스 영화제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오스카' 레이스를 펼치는 동안 연기상 수상 37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최근 미국배우조합상(SAG)에 이어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거머쥐었다. 한국영화 역사 102년을 통틀어 최초의 기록이다.특히 한국 배우 최초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됐고, 유력 매체들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윤여정을 꼽고 있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윤여정이 출연한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계 미국 이민 가족의 정착기를 담은 작품이다. 극 중 윤여정은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았다.

'미나리'를 본 관객이라면 알겠지만, 영화 초반 크레딧이 표시될 때 스티븐 연, 한예리,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등 주요 배우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보여진 뒤, '그리고 윤여정'이라는 문장이 뜬다. 또한 '미나리' 메인 포스터에도 그의 얼굴은 없다.그렇다고 영화에서 윤여정의 비중이 적은 것은 아니다. 초중반 등장해,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이콥(스티븐 연 분) 가족과 함께 하는 그는,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순간까지 짙은 여운과 잔상을 남긴다.

윤여정의 연기를 보면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를 만한가?'라고 생각할 관객이 혹시나 있을지 모르겠다. 윤여정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일상과 가까운 연기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 사진제공=판씨네마

순자는 오랜만에 미국에서 재회한 딸 모니카(한예리 분)에게 어제 만난 것처럼 편하게 대하고, 어린 데이빗(앨런 김 분)이 싫어하든 말든 여느 할머니처럼 마냥 귀여운 마음에 장난을 친다. 윤여정은 꾸밈없이 담백하게 대사를 읊고 행동하면서 인물을 표현하는데, 오히려 연기라고 생각하면 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상황을 그려낸다.

또 윤여정은 주변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벌어지든, 묵묵하게 혼자의 힘으로 잘 살아남는 미나리를 심는 순자를 담아내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무게감 있게 전한다.'미나리'에서 윤여정은 주연 배우들 다음의 '그리고'라기 보다, '미나리' 그리고 윤여정이라고 할 만큼 영화와 또 한 편의 영화인 듯 존재감이 크다.

윤여정은 아카데미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무대인사 현장에서 "난 한국에서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이 영화는 사실 하기 싫었다. 신인 감독과의 작업인 데다 독립영화였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고생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가 잘 나왔다. 나는 늙은 여배우니까 이제 힘든 건 하기 싫다. 그런데 정이삭 감독이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라며 진부하지 않고 진솔한 말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해외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솔직하고 재치있는 말솜씨로 소통하며 모두가 그에게 빠져들게 했다.

'미나리'에서의 연기처럼 윤여정은 영어 실력도 꾸밈없고, 자연스럽다.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때도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쉬운 표현으로 위트 있게 말하며 상대방에게 공감을 안긴다.윤여정의 영어에 대해 외신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외국어가 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단 걸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웬만한 미국인보다 듣기도 말하기도 잘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오스카의 주인공 봉준호 감독도 언급하며 "한국 영화인들은 모두 달변가냐"라고 농담 섞인 반응까지 보였다.
배우 윤여정./ 사진=텐아시아DB

윤여정은 데뷔 55년 차, 73세 원로배우다. 주·조연 가리지 않고 오랜 세월 연기 한 그는 말 그대로 '거장'이다. 중년을 넘어서도, 여느 여배우들처럼 '어머니' 배역에만 치중하지 않았고, 작품마다 임펙트 있는 배역을 맡아 곳곳에서 유니크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결혼, 그리고 순탄치 않았던 미국 생활, 이혼까지 곡절도 있었고, 그 모든 것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겪고 할머니가 된 윤여정의 연륜은 연기를 통해, 또 유려한 말솜씨를 통해 드러났다. 이 모든 것이 1년 넘게 이어진 아카데미 레이스를 통해 증명 됐고, 전세계인들은 그의 인생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미나리'와 '말'을 통해 이미 윤여정에게 매료 됐다.

20일(현지시간) 시상식 결과를 점치는 사이트 '골드더비'에 따르면 윤여정은 이번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받아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윤여정은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아 바칼로바(592표), '힐빌리의 노래' 글렌 클로스(413표),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188표),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먼(164표)을 큰 표 차로 제치고 조연상 수상 1순위로 꼽힌 상황.
윤여정. / 사진제공=보그 코리아

윤여정은 전문가 27명 중 24명으로부터 수상자로 지명됐고, 골드더비 편집자 11명, 지난해 오스카상을 정확히 예측한 '톱 24' 회원, 지난 2년 동안 아카데미상 예측 정확도가 높았던 '올스탑 톱 24' 회원의 표를 모두 휩쓸었다. 또한 일반 회원의 76%(4천421표)가 윤여정을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꼽았다.

'미나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미나리'는 한국계 감독이 만들고, 한국계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미국 제작사 플랜B에서 만든 미국영화다. '기생충'과 다른 지점이 있지만, 우리의 정서가 담긴, 우리나라 배우가 등장하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미나리'가 오스카를 들어올릴 지 주목된다. 그리고 윤여정이다. 이날 오스카의 진짜 주인공은 윤여정이 될 지 모른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는 26일(한국시간) 오전 열린다.

노규민 텐아시아 기자 pressg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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