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주역들이 20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초대로 오찬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영화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봉준호 감독은 문 대통령의 조리 있는 축하 발언에 “글 쓰는 사람으로서 충격에 빠졌다”며 재치 있게 화답하기도 했다.
오찬에는 봉준호 감독을 포함해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이정은, 박명훈, 정지소, 정현준과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장연환 프로듀서, 한진원 작가, 김성식 조감독, 홍경표 촬영감독, 이하준 미술감독, 최세연 의상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등이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충무전실에서 ‘기생충’ 주역들과 먼저 인사하고 환담을 나눴다. 문 대통령 부부가 입장하자 봉 감독은 아역배우인 정현준을 가장 먼저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자세를 낮춰 정현준과 악수한 후 다른 배우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문 대통령은 “촬영을 마치고 나서부터 대장정이었겠다”며 “꿈 같은 일”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봉 감독이 “배우, 스태프들과 같이 여기 오게 돼 기쁘다”며 “축전 보내주신 것도 잘 받았다”고 다했다. 문 대통령이 “아내가 특별한 팬”이라고 말하자 김정숙 여사는 “남편과 영화를 봤다”고 이야기했다.
환담에는 봉 감독의 대학 동기로 재학 중에 봉 감독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육성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도 함께했다. 봉 감독은 육 행정관과의 인연에 대해 “제가 결혼하고 충무로에서 연출부를 할 때 쌀도 한 포대 갖다주고 했다”고 밝혔다. 육 행정관은 “제가 결혼할 때 봉 감독이 결혼식을 찍어줬다”고 말했다.
이후 참석자들은 오찬장인 인왕실로 자리를 옮겼다. 문 대통령은 “우리 영화 ‘기생충’이 새계 최고의 영화제라는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고, 그 영예의 주인공이 되신 봉준호 감독님과 배우 송강호를 비롯한 출연진, 또 스태프진, 제작사 모두의 성취에 정말 진심으로 축하 말씀을 드린다”며 “우리 영화 100년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는 것도 아주 자랑스럽고, 오스카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게 만들었다라는 사실이 아주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오스카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최고 영화제이지만 봉 감독님이 핵심을 찔렀다시피 로컬 영화제라는 비판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지난해 10월 미국의 영화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적인 영화제가 아니라 로컬 시상식”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우리 영화가 워낙 빼어나고 봉 감독님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비영어권 영화라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영화,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그 자랑스러움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아주 큰 자부심이 됐고 아주 많은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기생충’이 보여준 사회의식에 깊이 공감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불평등이 견고하다”며 “그런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최고의 국정목표로 삼는데, 반대도 많이 있고 속 시원하게 금방금방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매우 애가 탄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기생충’뿐만 아니라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한 K팝, 한국드라마, 주요 국제 음악콩쿠르에서의 한국인 수상 등을 언급하며 “한국은 문화 전반에서 변방이 아닌 세계 중심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산업 지원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문화예술계도 영화가 보여준 것과 같은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제작 현장에서나 배급·상영·유통구조에서도 여전히 불평등한 요소들이 남아있다”며 “표준 근로(표준근로계약)시간제, 주 52시간 등이 지켜지도록 봉 감독과 제작사가 솔선수범 준수해 주셨는데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한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도화되도록 정부가 노력하고, 일 없는 기간 동안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복지가 잘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영화 유통구조에 있어도 스크린 독과점을 막을 수 있는 스크린 상한제가 빨리 도입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한마디로 영화 산업의 융성을 위해 영화 아카데미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확실히 지원하겠다”면서 “간섭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오찬에는 제 아내가 봉 감독을 비롯해 여러분에게 헌정하는 ‘짜파구리’가 맛보기로 포함돼 있다”며 “함께 유쾌한 시간 가지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지난 18일 서울 면목동 동원전통종합시장에서 구입한 재료로 짜파구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김 여사는 ‘이연복 레시피’를 참고해 대파와 돼지고기를 이용한 짜파구리를 연습했다고 전해졌다.
문 대통령의 7분여간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봉 감독도 마이크를 잡았다. 봉 감독은 “저나 송강호 씨나 모두 ‘한 스피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인데 작품 축하부터 한국 대중문화,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언급을 거쳐 짜파구리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신 게 거의 시나리오 두 페이지 분량”이라며 놀라워했다. 이어 “암기하신 것 같지는 않고 평소 체화한 이슈에 대한 주제의식이 있기에 줄줄 풀어내신 것 같다”며 “미국에서 많은 시상식을 갔지만 대사를 많이 외우는 배우들도 지금 (문 대통령이) 말씀하신 것의 1/4 정도의 짧은 스피치를 프롬프터를 보면서 한다”고 부연했다.
봉 감독은 “어떻게 하시는 거냐. 의식의 흐름인지 궁금하다”면서 “너무나 조리 있게 정연한 논리 흐름과 완벽한 어휘를 선택하면서 기승전결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니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충격에 빠졌다”고 말했다.봉 감독은 “아카데미 등 대장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이렇게 근래 (‘기생충’ 팀원들이) 많이 모인 적이 없었다”며 “영광스럽게 청와대에서 이렇게 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좋은 자리에서 대장정 마무리하게 돼 너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송강호도 “음식이 우리 민족에게는 그냥 먹거리가 아니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이렇게 대장정의 마무리를 짓는다는 게 특별하지 않냐”며 “그런 자리를 마련해준 대통령 내외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이날 문 대통령 부부에게 ‘기생충’ 각본집 2권을 선물했다.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등 4개 부문의 트로피를 가져가며 영화계에 새 역사를 썼다. 이번 아카데미의 최다 수상이며, 92년 아카데미 역사상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기생충’이 최초다. 또한 작품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의 동시 수상 역시 ‘기생충’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