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쌍의 일곱 번째 앨범 의 앨범 재킷에서 두 남자, 길과 개리는 모래의 바다 위에 서 있다. 평평하고 단단한 땅이지만 발자국과 바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사진은 2009년 이들이 내놓은 6집 이후 그들의 삶과 이번 앨범의 성격을 보여준다. “오르락내리락 반복해 기쁨과 슬픔이 반복돼 사랑과 이별이 반복돼 내 삶은 돌고 도네”라는 ‘회상’의 가사처럼 복잡한 인생의 경험들을 찬찬히 풀어낸 이들의 앨범은 수록곡 대부분이 음원 차트 상위권을 뒤덮는 기현상을 일으켰다. 길은 MBC 에, 개리는 SBS ‘런닝맨’에 고정 출연하며 예능 활동을 병행하고 있지만 이들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단지 예능으로 인지도를 높인 뮤지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음악만으로 시작해 여전히 음악으로 승부하는, 그래서 다른 말은 불필요한 그들, 리쌍을 만났다.
작년 10월에 앨범을 내려다가 모두 엎고 완전히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다. 지난 앨범의 반응이 좋았던 만큼 새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진통도 컸을 텐데, 시작은 어땠나.
길 : 1월 말쯤 성대수술을 해서 활동을 다 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항상 지하에서, 개리는 옥탑에서 살았는데 이제 우리가 좀 좋은 집에서 사니까 음악이 안 나오는 거 아닐까. 그래서 개리는 옥탑방을 구하러 다니고, 나 역시 꽉 막히고 환기 안 되고 답답하고 잠들면 몸에 안 좋은 환경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지하방을 구할 때까지 녹음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불 들고 녹음실로 들어간 날, 새벽 네 시쯤 ‘여기 와도 뭐 안 되는구나’ 싶은 절망감 속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가 정확히 여섯 시 반에 ‘나란 놈은 답은 너다’가 거짓말처럼 나왔다. 그 노래의 주제를 다시 개리랑 이야기하면서 이별노래를 만들까 하다가 방향이 바뀌어 나온 게 ‘TV를 껐네’고, MBC 가요제를 하던 도중 ‘강남사짜’가 만들어졌다.
“신기하게도 여자들이 ‘TV를 껐네’를 더 좋아하더라”
요즘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TV를 껐네’ 의 가사는 쓰는 사람이 굉장히 즐겁게 작업했다는 느낌이 든다. 연인간의 성(性)은 아주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소재지만 그동안 한국 대중가요에서는 잘 얘기하지 않았던 지점이지 않나.
개리 : 6집의 ‘내 몸은 너를 잊었다’에서 내레이션으로 표현했던 내용과도 비슷한 느낌인데, 사실 연인 간에 사랑 아니면 이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들이 더 흔하지 않나. 처음엔 이별 얘기로 쓰려던 곡이었지만 둘이 얘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남자의 심정, 여자의 심정이 각각 다르니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타샤(윤미래)하고 타이거 JK 형이랑 술 마실 때 “미래야, 이런 얘기 써 주면 안 되겠니?” 했더니 타이거 JK 형이 “그러면 내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겠냐?” 라는 거다. (웃음) 형한테 절대 그렇게 야하고 선정적인 게 아니라 재밌고 아기자기한 내용이라고 설득했는데 나중에 가사 보더니 “야하지도 않네, 뭐” 라고 하더라. 이런 내용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내놓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개리 : 힙합 하는 친구들은 가사에서 이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걸 타이틀곡으로 하기는 힘드니까, 그걸 성공시켰다는 게 좀 기쁘다. 사실 나는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다. 언제까지 아름답고 예쁜 얘기만 할 수도 없고, 나이 드니까 더 솔직해지는 것 같다. 요즘 내가 예능에서 이미지가 여자한테 되게 잘 해주고 비바람 막아주는 순정남인데 솔직히 남자들끼리 모이면 하는 얘긴 뻔하다. ‘세레나데’라는 노래에 있는 것처럼 “아, 외로워 죽겠는데 누구 좀 불러봐.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웃음) 하지만 여자들이 “내가 오빠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하면서 떠난다. 저작권료가 좀 안 들어와도 오히려 이런 걸 더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여자들이 ‘TV를 껐네’를 더 좋아하더라. (웃음)
6집에 이어 이번에도 다양한 객원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그들이 기존에 보여주지 않았던 색깔들이 드러난다. 어떤 원칙을 세우고 작업을 했나.
길 : 우리도 7집까지 오다 보니 예전에는 약간 끼워 맞추기 식의 콜라보레이션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러면 그 노래가 망한다. 망한다는 건 히트송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냥 우리가 듣기에도 짜증나고 부르는 사람도 별로인 곡이 된다는 거다. 그래서 앨범을 만들 때 스케치를 하면서 각 곡의 느낌에 대해 서로 많은 얘기를 하고 생각을 하고, 우리가 부탁하고 싶은 사람의 모든 노래를 다 찾아 들어본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이 냈던 앨범에서 그들이 새로 낼 수 있는 색깔, 예를 들어 검정색만 보였던 사람이 있다면 그 속에 숨은 약간의 회색이나 녹색을 잘 찾아내서 뽑아내려고 한다.
‘나란 놈은 답은 너다’에서 하림의 건조한 느낌이나 ‘회상’에서 백지영의 투명하면서도 애수가 느껴지는 보컬은 그들이 기존에 들려주었던 목소리와 상당히 다르다는 면에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떤 식으로 보컬 디렉팅을 했나.
길 : 하림 형에게 처음 말씀을 드렸더니 곡도 안 들어보고 “됐어, 너희 잘 하잖아. 언제 갈까?”하고 오셨는데 술이 좀 된 상태라 며칠 뒤에 녹음을 다시 했다. 하지만 결국 앨범에 실린 건 처음에 녹음했던 버전이다. (웃음) 하림 형은 진짜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천재, 신 수준인 것 같다. 자기가 곡과 딱 마주쳤을 때 ‘이게 최상이다’ 하면 그걸 다 보여주고 끝인 거다. (백)지영 누나는 곡 들어보더니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와서는 딱 20분 만에 녹음 끝내고 한 시간 수다 떨고 갔다. (웃음)
개리 : 우리가 보컬 디렉팅을 보면서 “톤을 좀 얇게요, 두껍게요” 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지영 누나의 최대 강점인 감정 표현은 정말 최고였다. ‘죽기 전까지 날아야 하는 새’의 경우 강산에-리쌍-Bizzy로 이어지는 뮤지션 3대 선후배의 관계가 겹쳐지며 더 흥미로운 곡이 되었다.
개리 : 내가 형으로서 동생인 Bizzy한테 얘기를 해 주고, 누군가 우리에게 선배로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에 (윤)도현 형한테 (강)산에 형님 얘기를 들은 게 생각났다. 비닐하우스에 사시면서 음악하고 그러셨다고. 그래서 부탁드렸더니 “어우 야, 나도 아직 젊은데” 하시면서도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투자사기에 휘말려 “수억 날리고 얻은 게 고작 이 가사 한 줄”이라는 ‘강남사짜’는 개리의 경험담인가.
개리 : 그렇다. (웃음) 그렇게 날파리 같은 사람들이 참 꾸준히 있다. 당구 치고 있는데 와서 술 한 잔 하고 친해지면 엄청 잘 해준다. “이거 아무도 모르는 소스인데 한 번 투자해봐라” 그리고 꼭 “불편하면 하지 말고.” 덧붙이는데 여기에 말리는 거다.
그렇게 치고 빠질 때 훅 가는 거 아닌가. (웃음)
개리 : 그러니까, 싹 빼려는 순간 “아니, 얘기해 보세요” 하게 되는 거다. (웃음) 그러다 모은 돈 다 까먹은 적도 있고 죽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따라 안 힘들기도 했다. 음악하고 공연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매번 잘 될 수는 없으니까. 예를 들어 평생 동안 100억 원을 벌 거면 그 중에 몇 억 날린 거라 생각하기로. 하지만 얄밉긴 하다. 내 돈 날리고 자기는 외제차 타고 다니는 걸 보면. 사실 곡 제목을 그 사람 이름으로 하려다가 참았다. (웃음)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도 당한 거겠지. “요즘에는 작업을 최대한 자유롭게 해야 되는 것 같다”
앨범 전체적으로 두 사람이 곡의 전면에 나서기보단 중심을 잡고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느낌이다. 길은 작곡가와 프로듀서인 동시에 보컬로서 자신의 영역을 결정하기도 해야 하는데, 리쌍의 노래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갖는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
길 : 우리는 음악을 만든다는 생각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가 이 몸뚱이로 누드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아니지 않나. (웃음) 하지만 브래드 피트가 오면 말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내 목소리에는 약간 슬픔이 배어 있다. 그런데 ‘TV를 껐네’같은 곡에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권)정열이가 달콤한 소스를 뿌려준 거다. 개리는 음식이 맛깔나 보이는 그릇을 만들어주고, 타샤가 체리처럼 예쁜 과일들을 얹어주면 나는 그 바탕에서 무표정한 목소리로 중심을 잡는 거다.
개리는 예전에는 랩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달려가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고저가 있으면서도 쿨한 톤을 유지하는 것 같다. 라임을 쓰지 않는 래퍼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어느 정도 사용하기도 했고.
개리 : 억지스러운 걸 싫어한다. 그래서 ‘난 힙합 이끌고 있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국 힙합 시작했고 내가 한국 힙합 짱이야’ 같은 얘기는 할 수가 없다. 그냥 내 성격대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정답인 것 같다. 물론 랩 메이킹을 해서 짜임새 있게 라임을 넣고 멋있게 가는 것도 좋지만 나는 글을 먼저 쓰고 편하게 얘기하듯 랩을 하는 편이다. 이건 핑계고 내가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 쓴 곡도 있는 거고.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하면서도 결국 이건 리쌍의 앨범인 건데, 그것들을 모아 리쌍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지 않나.
개리 : 요즘에는 작업을 최대한 자유롭게 해야 되는 것 같다. 건물 지을 때 디자인 한 사람이 전부 짓는 게 아닌 것처럼 분야에서 잘 하는 사람들이 와서 각자 맡는 부분이 있는 거지.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만 지난 번 앨범에서 장기하와 함께 한 ‘우리 지금 만나’ 처럼 그 뮤지션의 색깔이 강한 곡에서는 아예 욕심을 다 버린다. 그냥, 이건 진짜 재밌게 해보자, 그러면 된다. 누가 “이건 너무 그 사람들 색깔 아냐?” 해도 “리쌍의 색깔 위에 그 사람의 색깔을 덧칠하는 게 필요했어요”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별이나 시련, 외로움 같은 정서를 담은 곡들도 많지만 ‘조정 특집’ 응원가였던 ‘그랜드파이널’이 마지막에 들어가면서 앨범 전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도전하자’는 메시지로 완결성을 갖는 것 같다.
길 : ‘그랜드 파이널’은 ‘조정 특집’을 하다가 개리랑 한 번 만들어볼까 해서 재석이 형한테 말씀드렸더니 “좋다. 같이 하자” 하셔서 나온 곡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힘들었어. 내일은 안 할래’ 하는 게 아니라 술 한 잔 먹고 털어버린 다음에 ‘에휴,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살지 않나. 개리의 가사가 절망, 어둠 같은 류라고 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커왔기 때문에 사랑받는 거고.
말 그대로 리쌍은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된 것 같다.
길 : 유희열 형이 그러시더라. “이 분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음악에 방해가 안 된다”고. (웃음) 그냥 동네에서,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얼굴이란 얘긴데 사실 예능하기 전에 우리는 좀 무섭게 생긴 애들이었다. 그런데 예능을 하면서 매일 TV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목말라하던 이야기를 하는 음악을 내놓으면서 더 사랑받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개리 : 사실 예능 하면서 ‘얘네 결국 예능 하기 위한 애들이었어?’라는 말 듣기 싫어서 음악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음악적으로 무기력했는데 예능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또 예능 때문에 음악이 후져졌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음악에 집중하면서 또 재미를 얻고 있다.
그렇게 예능을 통해 리쌍을 알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도 좀 달라지지 않았나.
개리 : 예전에 길이 예능하기 전에는 대학 축제에 가든, 심지어 우리 이름이 걸린 파티에 가든 사람들이 우리를 몰랐다. 바로 앞에서 “리쌍 언제 오냐”고 묻기도 하고. (웃음)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연예인처럼 보는 관객 분들도 있다. 처음 한두 곡 부를 땐 “강개리, 송지효 어딨어?” 하고 놀리고 “ 무리수!” 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 세 곡, 네 곡 째로 가면서 점점 사람들이 우리 음악에 빠져든다. 트위터로 “오빠가 리쌍인 줄 이제 알았어요”라고 보내는 중고등학생들도 개리라는 사람이 궁금하니까 리쌍 음악을 들어본다고 하고, 그러니까 더 음악 하는 맛이 난다. 타이틀곡도 아닌 ‘회상’ 같은 곡이 음원 차트 5위권에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우리는 계속 그런 노래를 만들어 왔지만 어린 친구들은 그렇게 스토리가 있는 노래가 낯설면서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 : 사실 이번처럼 앨범 전곡이 차트 10위권 안에 드는 경험은 앞으로 없을 거다. 하지만 그냥 ‘또 한 번 그렇게 해 봐야지’ 하는 꿈을 키우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리쌍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성공도 거뒀다. 많은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부터 해 보고 싶은 건 뭔가.
길 : 개리랑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막 저지르고 싶다. 11월에 앨범을 하나 더 내고 싶은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아예 리쌍이 해왔던 것과 다르게, ‘얘네 망하려고 앨범 냈어?’ 소리가 나올 만큼 우리가 아예 안 했던 걸 해 보고 싶다. 또 하나는, 정말 재미있게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바를 하나 내 보고 싶다. 낮에는 음악 하는 친구들한테 무료로 렌트해 줘서 공연하고 쇼케이스 할 수 있게 해 주고, 밤에는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을 조금씩 넓혀가고 싶다.
개리 : 이번 앨범을 내고 보니 예능을 통해 우리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기존에 해왔던 것과 좀 다른, 작은 클럽을 빌려서 파티를 하고 놀거나 음악 잘 하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을 더 알릴 수 있는 문화적인 활동들을 하고 싶다. 돈은 음악이랑 막창으로 벌고, 내년에는 어릴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 DJ가 됐든 댄서가 됐든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한다. 춤은 원래 췄던 거니까. 잘은 못 추지만 (웃음) 올해는 일단 11월에 있는 리쌍 콘서트 열심히 하고.
사진제공. 정글엔터테인먼트
글, 인터뷰. 최지은 five@
인터뷰. 이가온 thirteen@
편집. 이지혜 seven@
작년 10월에 앨범을 내려다가 모두 엎고 완전히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다. 지난 앨범의 반응이 좋았던 만큼 새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진통도 컸을 텐데, 시작은 어땠나.
길 : 1월 말쯤 성대수술을 해서 활동을 다 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항상 지하에서, 개리는 옥탑에서 살았는데 이제 우리가 좀 좋은 집에서 사니까 음악이 안 나오는 거 아닐까. 그래서 개리는 옥탑방을 구하러 다니고, 나 역시 꽉 막히고 환기 안 되고 답답하고 잠들면 몸에 안 좋은 환경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지하방을 구할 때까지 녹음실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불 들고 녹음실로 들어간 날, 새벽 네 시쯤 ‘여기 와도 뭐 안 되는구나’ 싶은 절망감 속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가 정확히 여섯 시 반에 ‘나란 놈은 답은 너다’가 거짓말처럼 나왔다. 그 노래의 주제를 다시 개리랑 이야기하면서 이별노래를 만들까 하다가 방향이 바뀌어 나온 게 ‘TV를 껐네’고, MBC 가요제를 하던 도중 ‘강남사짜’가 만들어졌다.
“신기하게도 여자들이 ‘TV를 껐네’를 더 좋아하더라”
요즘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TV를 껐네’ 의 가사는 쓰는 사람이 굉장히 즐겁게 작업했다는 느낌이 든다. 연인간의 성(性)은 아주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소재지만 그동안 한국 대중가요에서는 잘 얘기하지 않았던 지점이지 않나.
개리 : 6집의 ‘내 몸은 너를 잊었다’에서 내레이션으로 표현했던 내용과도 비슷한 느낌인데, 사실 연인 간에 사랑 아니면 이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들이 더 흔하지 않나. 처음엔 이별 얘기로 쓰려던 곡이었지만 둘이 얘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남자의 심정, 여자의 심정이 각각 다르니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타샤(윤미래)하고 타이거 JK 형이랑 술 마실 때 “미래야, 이런 얘기 써 주면 안 되겠니?” 했더니 타이거 JK 형이 “그러면 내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겠냐?” 라는 거다. (웃음) 형한테 절대 그렇게 야하고 선정적인 게 아니라 재밌고 아기자기한 내용이라고 설득했는데 나중에 가사 보더니 “야하지도 않네, 뭐” 라고 하더라. 이런 내용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내놓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개리 : 힙합 하는 친구들은 가사에서 이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걸 타이틀곡으로 하기는 힘드니까, 그걸 성공시켰다는 게 좀 기쁘다. 사실 나는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다. 언제까지 아름답고 예쁜 얘기만 할 수도 없고, 나이 드니까 더 솔직해지는 것 같다. 요즘 내가 예능에서 이미지가 여자한테 되게 잘 해주고 비바람 막아주는 순정남인데 솔직히 남자들끼리 모이면 하는 얘긴 뻔하다. ‘세레나데’라는 노래에 있는 것처럼 “아, 외로워 죽겠는데 누구 좀 불러봐.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웃음) 하지만 여자들이 “내가 오빠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하면서 떠난다. 저작권료가 좀 안 들어와도 오히려 이런 걸 더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여자들이 ‘TV를 껐네’를 더 좋아하더라. (웃음)
6집에 이어 이번에도 다양한 객원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그들이 기존에 보여주지 않았던 색깔들이 드러난다. 어떤 원칙을 세우고 작업을 했나.
길 : 우리도 7집까지 오다 보니 예전에는 약간 끼워 맞추기 식의 콜라보레이션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러면 그 노래가 망한다. 망한다는 건 히트송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냥 우리가 듣기에도 짜증나고 부르는 사람도 별로인 곡이 된다는 거다. 그래서 앨범을 만들 때 스케치를 하면서 각 곡의 느낌에 대해 서로 많은 얘기를 하고 생각을 하고, 우리가 부탁하고 싶은 사람의 모든 노래를 다 찾아 들어본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이 냈던 앨범에서 그들이 새로 낼 수 있는 색깔, 예를 들어 검정색만 보였던 사람이 있다면 그 속에 숨은 약간의 회색이나 녹색을 잘 찾아내서 뽑아내려고 한다.
‘나란 놈은 답은 너다’에서 하림의 건조한 느낌이나 ‘회상’에서 백지영의 투명하면서도 애수가 느껴지는 보컬은 그들이 기존에 들려주었던 목소리와 상당히 다르다는 면에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떤 식으로 보컬 디렉팅을 했나.
길 : 하림 형에게 처음 말씀을 드렸더니 곡도 안 들어보고 “됐어, 너희 잘 하잖아. 언제 갈까?”하고 오셨는데 술이 좀 된 상태라 며칠 뒤에 녹음을 다시 했다. 하지만 결국 앨범에 실린 건 처음에 녹음했던 버전이다. (웃음) 하림 형은 진짜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천재, 신 수준인 것 같다. 자기가 곡과 딱 마주쳤을 때 ‘이게 최상이다’ 하면 그걸 다 보여주고 끝인 거다. (백)지영 누나는 곡 들어보더니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와서는 딱 20분 만에 녹음 끝내고 한 시간 수다 떨고 갔다. (웃음)
개리 : 우리가 보컬 디렉팅을 보면서 “톤을 좀 얇게요, 두껍게요” 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지영 누나의 최대 강점인 감정 표현은 정말 최고였다. ‘죽기 전까지 날아야 하는 새’의 경우 강산에-리쌍-Bizzy로 이어지는 뮤지션 3대 선후배의 관계가 겹쳐지며 더 흥미로운 곡이 되었다.
개리 : 내가 형으로서 동생인 Bizzy한테 얘기를 해 주고, 누군가 우리에게 선배로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에 (윤)도현 형한테 (강)산에 형님 얘기를 들은 게 생각났다. 비닐하우스에 사시면서 음악하고 그러셨다고. 그래서 부탁드렸더니 “어우 야, 나도 아직 젊은데” 하시면서도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투자사기에 휘말려 “수억 날리고 얻은 게 고작 이 가사 한 줄”이라는 ‘강남사짜’는 개리의 경험담인가.
개리 : 그렇다. (웃음) 그렇게 날파리 같은 사람들이 참 꾸준히 있다. 당구 치고 있는데 와서 술 한 잔 하고 친해지면 엄청 잘 해준다. “이거 아무도 모르는 소스인데 한 번 투자해봐라” 그리고 꼭 “불편하면 하지 말고.” 덧붙이는데 여기에 말리는 거다.
그렇게 치고 빠질 때 훅 가는 거 아닌가. (웃음)
개리 : 그러니까, 싹 빼려는 순간 “아니, 얘기해 보세요” 하게 되는 거다. (웃음) 그러다 모은 돈 다 까먹은 적도 있고 죽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따라 안 힘들기도 했다. 음악하고 공연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매번 잘 될 수는 없으니까. 예를 들어 평생 동안 100억 원을 벌 거면 그 중에 몇 억 날린 거라 생각하기로. 하지만 얄밉긴 하다. 내 돈 날리고 자기는 외제차 타고 다니는 걸 보면. 사실 곡 제목을 그 사람 이름으로 하려다가 참았다. (웃음)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도 당한 거겠지. “요즘에는 작업을 최대한 자유롭게 해야 되는 것 같다”
앨범 전체적으로 두 사람이 곡의 전면에 나서기보단 중심을 잡고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느낌이다. 길은 작곡가와 프로듀서인 동시에 보컬로서 자신의 영역을 결정하기도 해야 하는데, 리쌍의 노래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갖는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
길 : 우리는 음악을 만든다는 생각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가 이 몸뚱이로 누드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아니지 않나. (웃음) 하지만 브래드 피트가 오면 말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내 목소리에는 약간 슬픔이 배어 있다. 그런데 ‘TV를 껐네’같은 곡에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권)정열이가 달콤한 소스를 뿌려준 거다. 개리는 음식이 맛깔나 보이는 그릇을 만들어주고, 타샤가 체리처럼 예쁜 과일들을 얹어주면 나는 그 바탕에서 무표정한 목소리로 중심을 잡는 거다.
개리는 예전에는 랩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달려가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고저가 있으면서도 쿨한 톤을 유지하는 것 같다. 라임을 쓰지 않는 래퍼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어느 정도 사용하기도 했고.
개리 : 억지스러운 걸 싫어한다. 그래서 ‘난 힙합 이끌고 있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국 힙합 시작했고 내가 한국 힙합 짱이야’ 같은 얘기는 할 수가 없다. 그냥 내 성격대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정답인 것 같다. 물론 랩 메이킹을 해서 짜임새 있게 라임을 넣고 멋있게 가는 것도 좋지만 나는 글을 먼저 쓰고 편하게 얘기하듯 랩을 하는 편이다. 이건 핑계고 내가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 쓴 곡도 있는 거고.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하면서도 결국 이건 리쌍의 앨범인 건데, 그것들을 모아 리쌍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지 않나.
개리 : 요즘에는 작업을 최대한 자유롭게 해야 되는 것 같다. 건물 지을 때 디자인 한 사람이 전부 짓는 게 아닌 것처럼 분야에서 잘 하는 사람들이 와서 각자 맡는 부분이 있는 거지.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만 지난 번 앨범에서 장기하와 함께 한 ‘우리 지금 만나’ 처럼 그 뮤지션의 색깔이 강한 곡에서는 아예 욕심을 다 버린다. 그냥, 이건 진짜 재밌게 해보자, 그러면 된다. 누가 “이건 너무 그 사람들 색깔 아냐?” 해도 “리쌍의 색깔 위에 그 사람의 색깔을 덧칠하는 게 필요했어요”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별이나 시련, 외로움 같은 정서를 담은 곡들도 많지만 ‘조정 특집’ 응원가였던 ‘그랜드파이널’이 마지막에 들어가면서 앨범 전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도전하자’는 메시지로 완결성을 갖는 것 같다.
길 : ‘그랜드 파이널’은 ‘조정 특집’을 하다가 개리랑 한 번 만들어볼까 해서 재석이 형한테 말씀드렸더니 “좋다. 같이 하자” 하셔서 나온 곡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힘들었어. 내일은 안 할래’ 하는 게 아니라 술 한 잔 먹고 털어버린 다음에 ‘에휴,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살지 않나. 개리의 가사가 절망, 어둠 같은 류라고 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커왔기 때문에 사랑받는 거고.
말 그대로 리쌍은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된 것 같다.
길 : 유희열 형이 그러시더라. “이 분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음악에 방해가 안 된다”고. (웃음) 그냥 동네에서,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얼굴이란 얘긴데 사실 예능하기 전에 우리는 좀 무섭게 생긴 애들이었다. 그런데 예능을 하면서 매일 TV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목말라하던 이야기를 하는 음악을 내놓으면서 더 사랑받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개리 : 사실 예능 하면서 ‘얘네 결국 예능 하기 위한 애들이었어?’라는 말 듣기 싫어서 음악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음악적으로 무기력했는데 예능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또 예능 때문에 음악이 후져졌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음악에 집중하면서 또 재미를 얻고 있다.
그렇게 예능을 통해 리쌍을 알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도 좀 달라지지 않았나.
개리 : 예전에 길이 예능하기 전에는 대학 축제에 가든, 심지어 우리 이름이 걸린 파티에 가든 사람들이 우리를 몰랐다. 바로 앞에서 “리쌍 언제 오냐”고 묻기도 하고. (웃음)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연예인처럼 보는 관객 분들도 있다. 처음 한두 곡 부를 땐 “강개리, 송지효 어딨어?” 하고 놀리고 “ 무리수!” 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 세 곡, 네 곡 째로 가면서 점점 사람들이 우리 음악에 빠져든다. 트위터로 “오빠가 리쌍인 줄 이제 알았어요”라고 보내는 중고등학생들도 개리라는 사람이 궁금하니까 리쌍 음악을 들어본다고 하고, 그러니까 더 음악 하는 맛이 난다. 타이틀곡도 아닌 ‘회상’ 같은 곡이 음원 차트 5위권에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우리는 계속 그런 노래를 만들어 왔지만 어린 친구들은 그렇게 스토리가 있는 노래가 낯설면서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 : 사실 이번처럼 앨범 전곡이 차트 10위권 안에 드는 경험은 앞으로 없을 거다. 하지만 그냥 ‘또 한 번 그렇게 해 봐야지’ 하는 꿈을 키우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리쌍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성공도 거뒀다. 많은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부터 해 보고 싶은 건 뭔가.
길 : 개리랑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막 저지르고 싶다. 11월에 앨범을 하나 더 내고 싶은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아예 리쌍이 해왔던 것과 다르게, ‘얘네 망하려고 앨범 냈어?’ 소리가 나올 만큼 우리가 아예 안 했던 걸 해 보고 싶다. 또 하나는, 정말 재미있게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바를 하나 내 보고 싶다. 낮에는 음악 하는 친구들한테 무료로 렌트해 줘서 공연하고 쇼케이스 할 수 있게 해 주고, 밤에는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을 조금씩 넓혀가고 싶다.
개리 : 이번 앨범을 내고 보니 예능을 통해 우리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기존에 해왔던 것과 좀 다른, 작은 클럽을 빌려서 파티를 하고 놀거나 음악 잘 하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을 더 알릴 수 있는 문화적인 활동들을 하고 싶다. 돈은 음악이랑 막창으로 벌고, 내년에는 어릴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 DJ가 됐든 댄서가 됐든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한다. 춤은 원래 췄던 거니까. 잘은 못 추지만 (웃음) 올해는 일단 11월에 있는 리쌍 콘서트 열심히 하고.
사진제공. 정글엔터테인먼트
글, 인터뷰. 최지은 five@
인터뷰. 이가온 thirte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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