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윤종신은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그는 매달 한 곡씩 음악을 발표하는 을 통해 박정현과 정인, 장재인 등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재발견했고, 이규호와 김현철, 015B 등 다른 뮤지션들이 만든 노래에 자신의 음색을 입혔다. 더불어 KBS ‘1박 2일’에서는 좀처럼 예능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유희열과 윤상을 대동해 섬마을 음악회를 위한 밴드 ‘등대지기’를 결성했으며, MBC 에서는 신치림으로 함께 활동 중인 하림, 조정치와 함께 ‘못.친.소 페스티벌’에 출전했다. MBC 나 SBS 처럼 고정으로 출연하는 예능과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도 소홀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쯤에서 다시 말하자. 지난해 그의 활약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을 뿐, 사실 그는 늘 부지런하게 살아온 남자였다. 음악과 예능, 하나만 붙잡기에도 벅찰 두 마리 토끼를 양손에 거머쥐는 데 성공한 그의 현재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 순간 을 매달 하는 건 관성이 생겨서 힘들지 않더라고요. 다른 일들이 더해지면서 좀 힘들어지긴 했는데, 이런 건 즐거운 힘듦 같아요. 즐거운 곤욕이랄까.”
그리고 윤종신은 음악과 예능의 바탕이 모두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양쪽 다 저는 무슨 철학이 있는 게 아니라, 생활이 기반인 사람이거든요. 가사를 써도, 예능에서 애드리브를 해도 다 생활밀착형이에요. 열심히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거죠. 하루 종일 음악만 생각한다면 작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누굴 막 만나고 다니니까 가사 쓸 일도 생기고, 예능에서도 할 얘기가 생기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곧 온 힘을 다해 일하는 것과 같다는 믿음. 2012년의 말미, 윤종신에게 주어졌던 MBC 연예대상 최우수상이라는 큰 영광은 그가 살아온 방향이 결국엔 옳은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대답과도 같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더욱 음악과 예능과 삶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이 남자에게 지금 중요한 건, 어떤 틀이나 기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저는 남들이 윤종신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저를 드러낼 수도 있어요. 이미지에 갇히지 않게 된 것 같고, 많은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올해로 마흔다섯. 이토록 성실하면서도 매력적인, 흔치 않은 중년이 된 그가 생활의 매 순간 만난 작품들 중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영화들을 추천했다.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각각 강렬한 색깔을 띤 다섯 편이다.
1. (Mystic River)
2003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가 회사 이름을 ‘미스틱89’라고 짓게 된 게 때문이에요. 이 작품을 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정말 거장이구나, 기가 막힌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런 사람이 예술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영화의 엔딩은 제가 본 것들 중 최고였던 것 같아요. 오해로 친구 데이브(팀 로빈스)를 죽이고도 옳은 일을 했다고 믿는 지미(숀 펜)의 표정이 정말 압권이더라고요. 미국 보수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 거라고 하던데, 정치적 이념 그 자체에 동의하긴 힘들지만 영화로서는 꽤 설득력이 있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스물네 번째 연출작. 미국 보스턴의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지미와 데이브, 숀(케빈 베이컨)은 지미의 딸 케이티가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성인이 된 후 재회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죄책감이 점차 오해로 변해가며 세 친구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숀 펜과 팀 로빈스는 이 작품으로 2004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2. (La Strada)
1954년 | 페데리코 펠리니
“이 영화는 원어로 본 게 아니라, 어릴 때 성우 분들이 더빙하신 버전으로 봤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스토리 자체는 굉장히 단순한데, 잠파노(안소니 퀸)와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등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엄청나게 좋더라고요. 작품은 잠파노가 젤소미나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바닷가에서 우는 장면으로 끝이 나요. 제가 엄청나게 짠하다고 생각하는 씬이죠.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가 사라짐으로써 느껴지는 슬픔 같은 게 고스란히 묻어 있어요.”
어떤 사랑은 누군가 떠난 후에야 완성되기도 한다. 짐승 같은 차력사 잠파노와 순수한 백치 여인 젤소미나의 만남을 그린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역시 그런 사랑을 묘사한 작품이다. 돈 때문에 팔려온 젤소미나, 그녀를 아내로 삼았지만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탐하던 사내 잠파노는 끝내 이별하게 된다. 젤소미나 역을 맡은 줄리에타 마시나는 페데리코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데, 극 중 트럼펫을 불며 길거리를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부분이다.
3. (Failan)
2001년 | 송해성
“과 은 거의 같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위에서 언급했던 장면과 에서 강재(최민식)가 우는 장면은 똑같은 장면이라도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들이 제가 영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포인트거든요. 흔하다고 생각했는데 없어지고, 만날 옆에 있던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별거 아닌 사람 같았지만 이별하고 난 후 뒤늦게 사랑을 깨달았다든가 하는 감정들인 거죠. 제 마음이 가장 많이 움직이는 종류의 감동이에요.”
“세상은 나를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 이 같은 영화 카피에서 볼 수 있듯, 은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를 확인받지 못하는 삼류 양아치 출신 강재와 그가 돈 때문에 위장결혼을 해준 아내 파이란(장백지)의 이야기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파이란은 편지로만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강재는 그녀의 죽음을 싣고 뒤늦게 날아온 편지를 읽으며 눈물 흘린다. 송해성 감독은 이 영화로 제39회 대종상영화제와 제22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최민식은 제22회 청룡영화상과 제21회 영평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4. (Dawn Of The Dead)
2004년 | 잭 스나이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꼽으라면 좀비물이에요. 를 보면 버스에 이만큼 큰 톱을 달고 가면서 좀비들을 죽이고 폭파시키잖아요. 저한테 살인 욕구가 있는 건 절대 아닌데, 보면서 막 미칠 것 같은데도 좀비들이 죽을 땐 후련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이미 한번 죽었기 때문인 건지. (웃음) 그렇지만 좀비가 또 너무 빠른 건 싫고요. 아, 사실 이 작품을 꼽긴 했어도 좀비물은 정말 다 좋아해서 하나를 고르기가 참 어렵네요. (웃음)”
는 좀비물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1978년 제작된 영화 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과 비교하면 액션적인 요소가 강해 스릴과 박진감이 넘친다고 평가된다. 간호사인 안나(사라 폴리)는 옆집 소녀에게 물어 뜯겨 죽은 남편이 좀비로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한 후 도망치려 하지만, 마을은 이미 좀비로 가득 차 있다. 지옥처럼 변한 그곳에서 안나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2004년에는 이 작품을 패러디한 가 제작되었는데, 제목에서도 눈치 챌 수 있듯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5. (Planet Terror)
2008년 | 로버트 로드리게즈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을 굉장히 좋아해요. 도 그렇고 도 그렇고, 진짜 짱인 거 같아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같은 영화도 좋아하는 편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전 대놓고 죽이는 영화를 더 좋아하거든요. (웃음) 는 B급 영환데 부분부분 빈티지처럼 만들어 놨어요. 엄청나게 웃기기도 하고, 특유의 느낌을 센스 있게 잘 연출해 낸 것 같아요.”
는 그라인드하우스라는 옴니버스 영화의 한 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다른 한편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 고고 댄서 출신인 체리달링(로즈 맥고완)은 마을에 살포된 DC-2 바이러스에 맞서 여전사로 재탄생하고, 좀비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 대신 기관총을 달고 다니며 총알을 퍼붓는다. B급 영화로 분류되는 만큼 고어와 스플래터, 코미디 등의 장르가 뒤섞여 있어 잔인하거나 무섭다기보단 보는 내내 유쾌하고 재미있다. 카메오로 출연해 좀비로 분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일 듯하다.
가수, 예능인, 프로듀서, 의 편집장, 한 가정의 가장. 여태껏 쌓아온 짐들만으로도 어깨가 충분히 무거울 법한데, 지난해 윤종신은 이름 앞에 ‘제작자’라는 직책을 하나 더 얹었다. Mnet 에 출연했던 투개월이 윤종신의 회사 ‘미스틱89’로 영입된 것이다. 트위터를 통해 “곡 참 많이도 받았고 쓰기도 하는데 진짜 고민된다. 내 앨범보다 정확히 20배는 고민한다”는 글을 남기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한 그는, 상업적인 성공이야말로 제작자로서의 첫 번째 목표라고 고백했다.
“속물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작자로서 저는 음악으로 돈을 많이 벌게 해서 투개월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해요. 제가 몸담은 이 판에서 가장 큰 의미란, 상업적으로 멋지게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면 행복한 거 아닐까요?” 높은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 뮤지션이라니, 그의 음악이 매일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웃기고 울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제 갓 막이 오른 2013년, 윤종신은 또 얼마나 성실한 생활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갈 길을 이곳저곳 만들어 놨어요. 그래도 올해는 음악이든 예능이든 더 타이트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예능 쪽은 철저하게 흑자를 보고 있으니까. (웃음)” 어떤 방향을 개척하고 선택하든, 그곳이 유일무이한 윤종신만의 길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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