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CD도 추억의 물건이 되어 버렸어요. 음악이라는 게 소모품이고 오른 클릭해서 삭제해버리면 없어지는 것이 되어 버렸어요.” 지난 6월 2일 광장동 악스홀에서 열린 제2회 서울 레코드페어의 ‘하나음악 특별전’ 무대에 오른 한동준의 말이다. 2층 규모의 행사장에 붐비도록 사람들이 들어찬 레코드페어의 풍경과는 사뭇 상반되지만, 행사장 바깥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발언이었다. 지난 2011년 11월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열린 제 1회 서울 레코드페어가 신기하고 반가웠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레코드의 거래가 여전히 활발하고 중고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서구에서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열린 레코드페어였다. 국내외에서 발매된 CD와 LP를 한 자리에서 만져 보고 구매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었던 서울 레코드페어는 이제는 추억 속의 풍경이 된 ‘음반 가게’의 정서와 기능을 동시대에 구현하는 시도였다. 짧은 홍보 기간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이 찾은 1회의 성공에 힘입어 좀 더 넓은 장소로 옮기고 기간도 이틀로 늘어난 두 번째 레코드페어 역시 성황을 이루었다.

특별전부터 쇼케이스까지, 레코드의 모든 것

이번 레코드페어의 구심점이자 주인공은 9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대표하는 레이블 하나음악이었다. 조동진의 1집~4집 박스세트와 조동익의 LP(제작 공장의 사정으로 예정과 달리 예약 판매로 진행) 등을 비롯한 레코드페어 한정판은 물론 어떤 날 1, 2집, 고찬용 1집, 이규호 1집 등 한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앨범들과 푸른곰팡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새 앨범들이 판매되었다. “우리가 막 유명한 것도 아니라 얼마나 팔릴까 싶었다”는 하나음악 관계자의 걱정과 달리 “행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막 뛰어와서는 주저앉아 기다린 사람”은 물론 하나음악의 전성기를 경험하지 못 했을 “젊은 분들, 20대나 학생들”도 많이 와서 “아직도 많이 사랑받고 있는” 하나음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음악 음반들이 연대기로 진열된 특별전과 장필순, 고찬용, 윤영배, 이규호, 오소영, 조동희, 한동준 등 하나음악 뮤지션들의 특별공연도 열렸다. “끈질긴 인연으로 여기까지” 함께 온 하나음악 뮤지션들과 좌석은 물론 공연장 뒤쪽까지 가득 채운 관객들이 반갑게 재회했다.

3일에는 원 펀치, 얄개들, 페이션츠, 아키버드 등 밴드들의 쇼케이스와 오사카에서 온 소울 싱어 오니시 유카리, 소울-훵크 밴드 펑카브릭&부슷다의 특별공연도 열렸다. 판매 뿐 아니라 뮤지션들의 공연과 전시를 접목시킨 서울 레코드페어는 첫 날인 2일 하루에만 2500여 명이 다녀갔고 매출이 무려 1억 8천만 원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음반이 주인인 축제, 음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제’였다. 올해는 장소가 넓어지면서 참여 업체 수가 늘어났고 그로 인해 더 다양한 장르의 음반이 소개될 수 있었다. 콜렉터나 마니아 위주였던 첫 회에 비해 폭 넓은 연령과 취향의 대중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홍보를 맡은 아이디어 랩의 김도현 팀장에 따르면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와서 비틀즈 LP를 찾고 20만 원짜리 중고 LP를 보고 “어, 싸네요?”라고 말 하는” 광경도 펼쳐졌다. “나이 드신 분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클래식 LP가 많아지”거나 “장식용으로 LP를 사 가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수입과정이 복잡해서 못 했지만 다음에는 턴테이블도 함께 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처럼 아쉬움이 개선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대중의 참여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손에 잡히는 레코드에 담긴 의미

한편, 이 같은 레코드페어를 향한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은 최근 ‘음원 정액제 폐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음악계의 현재를 떠올리게 했다. 이 사안의 시발점은 불법 다운로드의 홍역을 겪은 뒤 디지털 음원 중심으로 재편된 국내 음악 유통 시장에서 몇몇 대형 음원 유통 사이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정액제라는 기형적인 상품이 보편화되고 그 과정에서 창작자들에게 정당한 수익을 보장해주지 않는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문제가 곪아왔다. 레코드페어를 지켜보면서 과거 LP나 CD와 같은 레코드가 갖고 있던 물성(物性), 즉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존재감을 데이터 형태의 음원은 갖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이 현실을 만든 한 가지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코드의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을 직접 만지면서 사는 경험을 한 이들에게 앨범은 창작자가 만들어낸 작품이자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사야하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를 잊거나 모르는 지금의 소비자에게 음원과 정액제은 클릭 한 번으로 살 수 있고 무제한 판매가 어색하지 않은 싸고 편리한 공산품처럼 여겨지고 있는 게 아닐까.

미국은 지난해에만 LP 시장이 39% 성장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일본의 경우 최근 발매된 록 밴드 미스치루의 두 번째 베스트 CD가 발매 3주 만에 19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음원 중심의 시장으로 재편된 이후 급속도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레코드 시장이 무너졌다. 동네 음반 매장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몇 개 남지 않은 대형 음반 매장에서는 장르를 논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편향된 음악만이 유통되고 있다. 레코드페어에서 오래된 LP 더미에 고개를 파묻은 채 신중하게 음반을 고르는 나이 지긋한 중년들과 “귀엽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LP 재킷을 이리 저리 살펴보는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한시적인 축제가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날이 다시 오길 바라는 것은 이미 시대착오적이고 무모한 꿈일까? 오른 클릭으로 쉽게 삭제되어서는 안 될 풍경들마저 너무 일찍 추억이 되어가는 시대다.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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