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처럼 엽기발랄한 역할만 할 순 없잖아요.” 한지혜는 첫 주연작 KBS 를 온전한 과거로 묻어둘 만큼의 필모그라피를 쌓은 데뷔 7년차 배우다. 비록 영화 에서 과 비슷한 연기톤을 보이며 주춤했지만, KBS 일일연속극 의 주인공 나단풍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긴 호흡의 연기를 경험했고 MBC 과 영화 을 통해 캐릭터의 폭을 넓혔다. 에서 뚜렷한 꿈도 없던 천방지축 여고생 정숙은 KBS ‘피아니스트’에서 한 청년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조력자로 성장했고 한지혜는 파트너이자 연기에 첫 발을 내딛은 민호를 이끄는 든든한 선배가 되었다. 지난 7년간의 노력을 70분짜리 짧은 단막극에 쏟아붓는 건 그녀에게 어떤 경험일까.

결혼하고 약 1년 만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한지혜: 사실 영화제나 다른 행사장에는 틈틈이 다녔지만, TV 출연은 작년 이 마지막이었다. 잠깐 쉬는 동안에도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다. 어떤 역할이 들어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침 단막극 제의가 들어왔고 짧은 영화 한 편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는 겨울에 잘 어울리는 작품”

처음 ‘피아니스트’ 대본을 읽어 본 소감은 어땠나.
한지혜: 잔잔한 클래식 음악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겨울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평소에 클래식을 잘 듣지 않는 편인데, 나처럼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너무 좋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인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동시에 남자 주인공 제로(민호)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본인이 해석한 인사는 어떤 여자인가.
한지혜: 그냥 보통 여자다. 주변에 보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처럼, 인사도 어릴 땐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결국엔 기간제 교사로 살고 있다. 딱 봤을 때 자기 얘기라고 공감할 사람들이 많을 거다.

KBS 나 를 비롯해 현대극에서는 주로 밝고 명랑한 역할을 맡아왔는데, 이번엔 자신이 원하던 방향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어두운 인물을 연기한다.
한지혜: 그래서 너무 신난다. (웃음) 언제까지 같은 엽기 발랄한 역할만 할 순 없으니, 예전과는 다른 한지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인사가 제로를 만나기 전에는 아예 웃음이 없는 인물로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본 리딩할 때 많이 어둡게 표현했더니 감독님이 좀 더 편하게 가자고 말씀하시더라. 톤을 조절하긴 했지만, 초반에는 굉장히 그늘이 있는 아이였다가 나중에 제로를 만나면서 웃음을 되찾고 또 잠깐 그늘에 빠졌다가 결국엔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제로의 존재 유무에 따라 인사의 감정이 변하는 것 같다. 짧은 단막극 안에서 그런 변화를 다 담아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한지혜: 영화 을 촬영하면서 감정을 안에 담아두고 눈으로 얘기하는 것, 상대방의 리액션을 보고 반응하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다. 한 신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표현하려는 마음가짐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됐다. 연기하는 방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제로를 받쳐주는 역할이다.
한지혜: 사실 배우들이 그런 연기를 너무 하고 싶어한다. 여자들이 수동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은 인사가 중심을 이끌고 간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특별한 연기를 하지 않아도 민호는 제로 자체다”
상대 배우가 이번에 처음 연기를 해보는 샤이니 민호다. 함께 촬영해 본 소감은?
한지혜: 처음에 민호가 캐스팅됐다는 얘길 들었을 때 좋았다. 그룹 생활을 해서 그런지 낯가림도 없고 살가운 친구라 나한테 와서 이것저것 말도 많이 하고. 연기적인 면에서 염려되는 부분도 없었다. 왜냐면 그 친구가 연기를 잘하냐 못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작품에 캐스팅돼서 같이 연기를 하게 됐다는 게 더 중요한 사실이니까. 물론 연기를 처음 하기 때문에 대사 부분이 많이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대본 리딩을 여러 번 했다. 민호가 많이 바쁜 친구니까 (웃음) 밤 열한 시에 리딩을 시작한 적도 있고 또 한 번은 밤 아홉시 반에 여의도에서 만나서 연습하고. 그래도 카메라 앞에 많이 서 봤던 친구라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더라.

제로는 사랑에도 서툴고 혼자 꿈을 이뤄나가는 것도 벅차보이는 21살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잡아가는 게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건데, 옆에서 지켜본 입장으로서 어땠나.
한지혜: 민호는 특별히 연기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로 제로인 것 같다. 가끔 무대 위의 아이돌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연기하면, 감독님이 ‘제로는 그런 인물이 아니야, 수줍게 쳐다봐야지’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면 그 큰 눈망울로 수줍게 쳐다본다. (웃음) 이미 꿈도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무덤덤해진 인사에게 제로는 어떤 존재인가.
한지혜: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다. 본인이 잊고 있었던 생기를 되찾게 해주거든.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제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계속 고민한다. 결국엔 인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된다.

2003년 영화 로 데뷔해 어느덧 7년의 경력을 쌓았다. 연기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좀 달라졌나.
한지혜: 최근에 책을 쓰면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폰 덕분에 펜과 종이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메모를 할 수 있게 되니까 촬영장에서도 자꾸 끄적이게 되더라. 남들은 내가 하루 종일 문자 보내는 줄 안다. (웃음) ‘이 장면에서 감정은 좋았는데 표정의 느낌이 안 살았다, 오늘 촬영에서는 어떤 부분이 힘들었다‘ 같은 내용들을 적어둔다. 나중에 비슷한 경우가 생겼을 때 참고하기도 하고. 굳이 작품과 관련 없는 얘기라도 이것저것 생각날 때마다 짧게 메모해두는 편이다.

이번 촬영장에서는 어떤 것들을 메모했나.
한지혜: 얼마 전에 민호가 ‘팬들이 제일 중요하거든요’라는 말을 했다. 사실 배우들 입에서는 나오기 힘든 말이다. 가수들은 항상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지만, 배우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팬들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나한테 영감이 되는 얘기라 적어 놓았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