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뻔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이래도 되는 걸까. 명색이 창작을 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대해야 하는 웹투니스트가 뻔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 무엇보다 전혀 뻔하지 않은 만화였던 , 를 연재했던 하일권 작가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돌이켜보건대, 자기 키만 한 가위를 든 미남 이발사가 외모 바이러스라는 의문의 병에 맞서 싸우는 내용의 장편 데뷔작 부터 하일권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한 발상과 스토리텔링으로 가득했다. 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히어로물의 쾌감을 만들어냈다면, 은 첨단 로봇이 등장하는 시대상에 ‘빵셔틀’로 사는 주인공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대비시키며 SF 장르의 문법을 교묘하게 비튼다. 최근 연재 중인 역시 정체불명의 마술사를 통해 마술과 마법,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지우며 독자의 범상한 예상을 종종 뒤엎는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뻔함이, 뻔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보편적 정서에 대한 것이라면 하일권 작가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주제의식에 있어서 는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은 착한 성품의 중요성을, 는 꿈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뻔한 주제들을 결코 뻔하지 않게 전달한다는 바로 그 지점이 하일권 작가 만화의 탁월함이다. 가령 돈이 없어 구멍 난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줄 때 의 마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예쁘다. 네 물방울무늬 스타킹 말이야.” 의외의 순간 얻게 되는 한줄기 위로. 말하자면 그는 뻔하지만 소중한 가치를 믿는다. 그리고 그 가치를 신선한 상상력에 담아 전달할 줄 안다. 들으면 스토리가 절로 떠오르는 곡을 소개해준 하일권 작가의 이번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그래서 더 반갑고 흥미롭다. “소재를 찾으려고 무엇을 특별히 하기보다는, 뭔가를 하다 보면 문득문득 소재나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그는 음악을 들으며 무엇을 상상할까.
1.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통 음악을 들을 때, 가사에 딱히 집중하지 않고 멜로디를 들으며 이야기를 상상하곤 해요.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를 들을 때 떠오르는 장면은 석양빛을 받는 기차역이에요. 애틋한 젊은 남녀의 모습이 보이고요. 보컬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헤어짐이 아쉬운 여성의 모습이 떠올라요.” 음악만큼 취향을 타는 장르도 드물지만 분명 누가 들어도 괜찮은 앨범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가 그렇다. 로 단박에 인디 신의 촉망받는 신인이 됐던 그들은 1년이 넘어 발매한 를 통해 그들의 감수성을 말 그대로 보편적인 수준으로 전달했다. 2. 패닉의
“우리나라 뮤지션 중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에요. 데뷔앨범부터 4집까지 모두가 다 명반이지만, 2집은 특히 더 소중해요. 개인적으로 패닉의 색깔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생각하구요, 곡을 하나씩 듣고 있노라면 아주 독특한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에요. 장난스러움과 진지함이 공존하는 앨범이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감성적 목소리와 가사로 공중파 가요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던 ‘달팽이’의 그들이 그런 후속 앨범을 가지고 나올 줄. ‘왼손잡이’에서, 데뷔 초 이적의 뾰족 머리에서 언뜻언뜻 반골의식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패닉의 은 충격적인 앨범이었다. 사랑을 가장한 부모의 구속에 대한 섬뜩한 직설 ‘Ma Ma’, 괴기스러울 정도였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조금은 치기 어린 분노와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UFO’ 등 문제작으로 가득했던 이 앨범은 9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돌연변이 중 하나일 것이다.
3. 언니네 이발관의
하일권 작가가 추천한 세 번째 곡은 언니네 이발관의 ‘생일 기분’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분명 이상해요. 그런데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는 가사이기도 하죠. 노래를 하는 건지, 정말 무뚝뚝하게 생일이 싫다고 투덜대는 건지 모를 이석원 씨의 목소리도 매력적이고요. 그렇게 이 곡을 듣다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떠올라요. ‘그는 왜 생일을 싫어할까?’” 그의 말대로 이상한 가사다.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에 대해 ‘오늘은 나의 참 바보 같은 날’이라며 ‘난 이런 기분 정말 싫다’고 투덜대는 모습이라니. 재밌는 건,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 가사가 언니네 이발관 특유의 사운드와 함께 아무 거부감 없이 청자에게 스며든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노래다.
4. Oren Lavie의
“스톱모션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도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이 말만으로 어떤 곡을 추천하는지 짐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뮤직비디오 공개 당시 유튜브에서 700만 히트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곡, 오렌 라비의 ‘Her Morning Elegance’다. “제목처럼 아침이 생각나는 노래예요. 그런데 상쾌하고 신선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 아닌, 아직 잠이 덜 깨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나른한 아침을 연상시키죠. 하지만 굉장히 기분 좋은 나른함이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해 잠에서 깨자마자 방금 꾼 기분 좋은 꿈을 다시 되뇌는 느낌이에요.” 천재성이라는 표현은 최대한 아껴 마땅한 표현이지만 그런 절약은 오렌 라비 같은 사람이 등장했을 때 마음껏 사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음악 작업과 뮤직비디오 연출, 극작가를 종횡무진 오가는 다재다능함이 인상적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냥 음악만으로도 정말 좋은 아티스트라는 것이다. 오, 이런.
5. The Cardigans의
하일권 작가가 추천한 마지막 곡은 카디건스의 중독성 강한 곡 ‘Carnival’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천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외국의 풍경이 떠올라요. 그 안에서의 저는 여행객이라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유를 만끽하고요. 이렇게 이 노래를 들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죠.” 하일권 작가가 느낀 쨍쨍한 햇볕은 혹 맛깔스럽게 사운드의 빈 곳을 메우는 오르간 연주일까, 아니면 니나 페르손의 나른할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일까. 아니면 화려하지 않지만 귀에 착착 감기는 기타의 리듬 스트로크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카디건스의 ‘Carnival’은 멜로디의 진행뿐 아니라 노래를 이루는 소리의 질감 자체가 간질간질한 곡이다. 그 화사한 소리의 햇살을 느낀다면 어떻게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연재 중인 에서 마술을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하일권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 속에서 성공한 마술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지만, 그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시시한 거짓말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의 작품 안에서 가상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잘 포개, 꿈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는 하일권 작가 역시 어쩌면 일종의 마술사일지도 모르겠다. 착한 건 착한 거고, 삶이 비루해도 꿈은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아름다운 가상 안에서 실현시키는 마술사. 물론 그것은 말 그대로 가상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마술사는 마법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만화의 2D 그림체를 만화 속의 현실로 인지하고 읽다가 실사가 나올 때 느끼는 이질감”으로 마술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가상세계를 견고하게 빚어내는 이 만화가의 교묘한 트릭은, 그 환상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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