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죽는 날까지 영원케 하소서.” 세상 모든 연인들의 맹세와 다르지 않은, 조금은 진부한 장면이었다. 조용한 성당에 찾아 들어간 연인들이 두 손 모아 잡고 영원을 꿈꾸는 기도를 나눈 뒤 포옹한다는, 클리셰라 하기에도 너무나 평범한, 길어야 채 3분도 되지 않았을 이 신은 그러나 결국 전파를 타지 못했다. 평범하지 않은 점은 딱 하나였다. 연인들,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가 둘 다 남자였던 것이다. 지난 10월 23일 방송된 SBS 58회에서 제작진은 이들의 ‘성당 언약식’ 신을 통편집했다.
사실 문제의 ‘성당 언약식’ 신은 방송 전인 20일 경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이 날 제작사 관계자는 제주도의 한 성당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이 신을 촬영하던 도중 성당 측에서 불편함을 호소해 철수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제작진은 해당 성당이 어디인지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촬영 분을 간략히 편집해 넣겠다고 했지만 23일 오후 김수현 작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는 마지막까지 수난이군요. 문제의 성당 신에 마음의 소리로 처리하려던 대사 몇 마디도 안 된다고 기어이 잘라내라는 방송사의 요구에 이어 잘라낸다는 통고? 뉘앙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삭제된 신의 대본을 올렸다. 이후 SBS의 김영섭 CP는 “성당 측에서 동성애자의 언약식인 줄 모르고 촬영을 허가했다가 내용을 안 뒤 촬영을 제지한 것을 보고 편집에 고려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도 보호해야 하지만 종교인들의 믿음과 가치관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더러운 젖은 걸레로 얼굴 닦인 기분”이라는 글로 방송사 측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했다.
언약식 대신 남겨진 커플링
시청자 게시판은 물론 각종 웹사이트가 토론으로 들끓었다. 촬영 허가를 번복한 성당 측에 대한 비난에 이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교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던져졌고 ‘왜 꼭 성당이었어야만 하느냐. 종교적 신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반론이 이어졌다. “반드시 성당이어야 했을 이유는 없으나… 우선 그림과 분위기가 괜찮을 것 같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가톨릭이 개신교보다는 품이 넓으니 문제가 되진 않겠지 달콤하게 생각했죠. 물론 동성애자들을 성당에 들어가게 한 것으로 불쾌한 가톨릭 신자들도 있겠죠” 라던 김수현 작가의 지나치게 순진한, 혹은 무모한 도전은 결국 21세기에도 피임과 낙태를 ‘공식적으로’ 금지할 만큼 보수적인 가톨릭의 교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대신 경수와 태섭의 겹쳐진 커플링만이 카메라에 덩그러니 담겼다.
그러나 이 ‘성당 언약식’을 둘러싼 일련의 논의가 단지 불편하고 일회적인 해프닝으로만 끝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지난 4월, 는 방송 3주 만에 태섭으로부터 “나는 게이다”라는 대사를 이끌어내며 한국 사회를 향한 작품의 태도를 과감히 커밍아웃했다. 주말 가족 드라마의 메인 커플로 게이가 등장할 거라고, 김수현 작가 이전에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는 태섭의 가족을 통해 성숙한 인간들이 소수자를 받아들이는 ‘모범 사례’를 제시했고 병걸(윤다훈)과 경수 모(김영란)로부터 호모포비아의 폭력성과 비논리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래서 “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등 블랙 코미디 같은 광고가 주요 일간지를 장식하는 사회임에도 이 작품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적지 않은 시청자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한심한 태도인가를 설득해냈다는 데 있다.
어쩌면 100년 뒤엔 박수를 받을 도전
물론 개개인의 인식 변화와는 별도로 뿌리 깊은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는 데는 보다 큰 진통이 따른다. 10년 전만 해도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받았듯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가톨릭의 교리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톨릭과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영국 성공회의 경우 커밍아웃한 게이 사제들이 적지 않고, 공식적 원칙은 아니지만 사제들이 자기 판단에 따라 동성결혼을 종종 주례하기도 하는 것처럼 ‘이성애자’만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포용하려 한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필연적일 것이다. 그래서 가장 세속적인 창작물인 드라마가 가장 신성한 종교적 권위를 향해 정면승부를 건 이번 사건은 한국 가톨릭계와 한국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드라마는 그것을 본 개인에게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모여 바꾸어 나가는 것이 세상이다. 어쩌면 100년 뒤, 우리 후손들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감히’ 게이 커플의 손을 이끌어 성당으로 안내했던 60대 후반의 한 이성애자 여성에게 박수를 보낼지도 모른다.
글. 최지은 fiv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