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김갑수는 촬영 중간 짬이 날 때마다 촬영용 소품으로 나온 커피를 즐겼다. 그가 올 한 해 생명을 불어 넣은 드라마 캐릭터는 방영을 앞둔 것까지 세면 무려 열 명. 생각만으로도 아득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KBS ‘오페라가 끝나면’에서 김갑수가 맡은 역할은 회사에서는 유력한 차기 사장 후보이지만, 자신보다 어린 춘희(김보경)에게 구애할 때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중년 남자 한정훈 이사다. KBS 과 를 통해 각각 중년의 로맨스와 권력자의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김갑수에게는 맞춤옷처럼 어울리는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으로 인한 가슴앓이와 회사 내에서의 암투를 오롯이 견뎌야 하는 역할, 감정 소진이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김갑수는 그마저도 배우라면 즐기는 것이 일이라 말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지난 12일 야외 촬영 현장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김갑수와 나눈 대화를 옮겼다.
이번에 맡은 한정훈 이사라는 배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김갑수: 한 이사라는 인물은, 회사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는 데 필요했던 능력이랄까, 중역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남자다.“잘 즐기는 게, 연기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
맞춤옷과 같은 배역이다. 어른의 권력을 가진 동시에 소년처럼 사랑하는 남자라니.
김갑수: 맞춤옷이라니, 그런가. (웃음) 사실 나이가 있어도 로맨스라는 건 변하는 게 아니지 않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망, 그거야 누구에게든 영원한 거니까.
한 이사는 중에서는 비교적 감정 변화의 폭이 큰 캐릭터다. 연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김갑수: 한정훈 이사의 경우는 그의 감정선이 변화하는 것을 잘 따라가며 그리려 하고 있다. 초반에는 굉장히 강하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면모를 가진 인물로 출발을 한다. 그러다가도 제 뜻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그 기세가 다소 꺾일 때도 있고, 그런 감정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인물을 연기하다 보면 연기자 스스로도 감정이 소진되는 기분이 들지 않나?
김갑수: 하다 보면 소진되기도 할 거다. 그래도 연기는 어차피 현실하고 다른 거니까. 그런 캐릭터의 감정 소진조차 잘 즐기면서 해야겠지. 잘 즐기는 게, 연기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허허. 올해 들어서만 열 작품이다. 아직도 배역 욕심이 있어서 작품을 찾아가는 건가, 아니면 PD들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하는 건가.
김갑수: 아, 그런가? 그렇구나. 허허. 작품을 찾는 건 아니고, 날 찾는 섭외가 들어오니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섭외가 들어오면 해야지. 허허허.
무엇보다 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겠다.
김갑수: 안 지친다고 얘기 하면 거짓말이다. 힘들긴 한데, 중요한 건 이럴 때일수록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치니까, 연기를 함에 있어서 흐트러지거나 게을러질 수 있다. 잘 먹고, 틈틈이 잘 자고. 정신력으로 잘 버텨야 하는 시기라서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촬영현장에 오면 커피를 자주 마시게 된다. 아무래도 피곤하고 졸리고 하니까 잠도 깰 겸 해서. 허허.
체력적인 부분이야 그렇다 쳐도, 한꺼번에 여러 인물을 그리는 게 쉽지 않겠다.
김갑수: 빨리 몰입하고 빨리 벗어버려야지. 에 가면 좌의정 이정무라는 인물에 몰입하고, 에 오면 이정무를 빨리 버리고 또 한정훈 이사에 몰입하는 거다. 제일 어려운 건 여러 인물들에 맞는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 작품, 그 인물에 맞는 변화를 주는 게 제일 힘들다. 조금이라도 그 인물에 맞는, 작품마다 다른 인물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젊은 후배들과의 작업은 감각을 젊게 해준다”
최근 젊은 배우들과 자주 호흡을 맞추시는 것 같다. , 도 그렇고, 이번 작품을 함께 하는 최원영, 김보경도 비교적 젊은 배우들이다.
김갑수: 우연찮게 요즘 젊은 배우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아서 개인적으론 굉장히 기분이 좋다. 그리고 내가 젊은 배우들에게 어른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니까. 원래 내 스타일이 그렇지 않나. 허허. 그리고 젊은 친구들하고 같이 있을수록 권위적인 걸 더 탈피하게 되고. 그 친구들은 나를 재미있어 하고 좋아해주고, 나도 젊은 배우들을 좋아하고 예뻐하고.
그들 입장에선 김갑수 씨가 뒤에서 연기로 탄탄히 받쳐주는 덕분에 본인들도 안심하고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본인이 얻어가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김갑수: 감각이 젊어진다. 젊은 후배들과 함께 하면 할수록 그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생활상을 더 잘 알게 된다. 물론 우리 나이대도 그 시절을 거치긴 했지만, 우리가 그들 나이였던 시대와 지금은 여러 가지에서 많이 다르지 않나. 거치긴 했지만 지금의 2,30대와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연기자의 입장에서 단막극의 매력이란 무엇인가?
김갑수: 단막극의 매력은 사전에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연속극은 앞으로 극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그렇게 될 건지 불투명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하긴, SBS 에서는 죽음으로 퇴장하는 줄 아예 모르고 있었다고.
김갑수: 도 나는 죽는 줄 몰랐지. 허허. 그렇듯 단막극은 연극 대본처럼, 시나리오처럼 한 편으로 나와 있는 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극의 내용을 다 파악하고 연기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자 매력이다.
그렇다면 아직 단막극을 낯설어 하는 시청자들에게 단막극을 보는 재미를 설명해주신다면?
김갑수: 단막극이라는 장르가 방송국에서 사라졌을 때 굉장히 많은 분들께서 안타까워하셨다. 단막극이라는 것은 연속극과는 달리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보는 거니까. 마치 한 편의 책을 읽듯이 70분가량 되는 시간 안에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집중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연속극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사회의 여러 가지 단면을 다루는 등의 실험적인 시도도 만나실 수 있다. 아직 단막극이 낯선 시청자들이라면 단막극은 연속극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실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글. 이승한 fou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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