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츠지 히토나리는 늘 연애의 한 허리를 뚝 떼어내 우리 앞에 내보였다. 아오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지만 좀처럼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쥰세이의 내면은 그의 활자를 빌려 읽는 이에게 전해졌다. () 그렇게 사랑을 하는 남자의 마음을 레이스를 짜듯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보여준 츠지 히토나리의 능직법은 의 준고에게도, 의 큐에게서도 유효했다. 영화감독 츠지 진세이는 7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올해는 신작 로 제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다. 에서 늘 땅만 바라보던 왕따 소년은 왕년의 프로레슬러 노인과 만나 한 여름 아카시아 꽃처럼 쑥쑥 자란다. “폭력이나 섹스 신 없이 인간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성공한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서도 영화가 준 온기는 여전하니까 말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우리에게 소설가로 잘 알려진 츠지 히토나리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할 때는 진세이라는 이름을, 록밴드 잠잔반시의 보컬로 무대에 설 때는 징크 화이트라는 이름을 쓴다. “자아의 분열을 일으킬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만 “힘들다기 보다는 늘 즐기며 감사하는 마음 뿐”이라는 츠지 히토나리가 한국의 독자와 관객들에게 잊지 못하는 영화들을 건넨다.
1. (Husbands)
1970년 | 존 카사베츠
“미국 감독 존 카사베츠의 영화입니다. 존 카사베츠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특히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서 남은 친구들이 농구를 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남편들인 네 명의 죽마고우. 그러나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이들은 죽음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방황은 그들을 런던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폭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는 법. 이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아간다. 영화는 삶과 죽음은 결국 한 가지에 있다는 것을 ‘남편들’을 통해 보여준다.
2. (Paris, Texas)
1984년 | 빔 벤더스
“사실 요즘에는 영화를 잘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하는 것이 작업에 더 도움이 되지요. 하지만 젊었을 때 많이 보았던 영화들이 지금의 절 만든 것은 분명합니다. 도 그런 영화입니다.”

타들어갈 것 같은 태양, 먼지바람이 이는 사막, 너무 푸르러서 실재하는 하늘같지 않은 하늘.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제자리를 찾기까지를 그린 는 강렬한 이미지로 오래도록 잔상을 남긴다. 빔 밴더스 감독의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에 등장하는 라이 쿠더의 연주 또한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든다. 제 37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3. (Tokyo Story)
1953년 | 오즈 야스지로
“일본 영화중에서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를 좋아합니다. 인간을 깊게 들여다보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분들의 영화가 그렇지요. 는 천천히 움직이는 영화고, 는 굉장히 스피디한 영화로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둘을 비교하면서 보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는 일본의 가족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던져온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표작이다. 늘 풍족하진 않아도 기품 있는 서민가족을 통해 전후 일본인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한 그는 에서 점점 뿌리가 흔들리는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자식들과 노부부의 쓸쓸함이 남기는 여운은 단조로운 흑백화면에 특별한 사건 없이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4. (21 Grams)
2003년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죠.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아보자면 잭(베네치오 델 토로)이 교차로에서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의 남편과 아이들을 자동차로 들이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미지가 오래도록 남아있네요.”

누군가는 새 심장을 얻었을 때,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또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몸부림 칠 때 누군가는 생일파티를 준비한다. 각각 심장을 의식 받을 희망, 종교, 가족, 임신에 대한 집착에 의지해 살아가던 이들의 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겹쳐진다. 그리고 이들은 생의 동력을 잃어버리더라도 삶은 계속된다는 잔인한 진실과 마주한다.
5. (Volver)
2006년 |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넬로페 크루즈가 나오는 모든 작품을 좋아합니다. (웃음) 그리고 스페인 감독 알모도바르도의 영화도 모두 좋아하구요. 그래서 도 참 좋았습니다. 색감도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화였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속 색은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등장한다. 완벽하게 배치된 보색과 문양들은 때로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에서도 여주인공의 부엌에서, 옷장에서 감독 특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와 가족들의 아픔과 치유를 통해 깊이를 얻는다. 영화에 출연한 6명의 여배우 모두가 그해의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소설, 음악, 영화를 하고 있지만 표현하는 기술이 달랐을 뿐 감정은 똑같다”고 하는 츠지 히토나리의 말처럼 영화 는 그의 소설들과 닮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턱대고 긍정하지도, 대책 없이 냉소하지도 않는 그만의 시선은 이번에도 노인과 소년의 우정을 따뜻하게 그려내되 미화시키지 않았다. 혼자 하는 집필과 달리 여러 명의 스태프들과 함께 하는 영화 현장에서는 카메라맨부터 시작해서 운전기사까지 모든 스태프들의 풀 네임을 외우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 그는 문학과 영화 두 분야에서 모두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무대에서는 거친 포스로 관객들의 기를 죽이고, 부천의 술자리에서 만난 한국의 인디 밴드와 즉흥 공연을 계획하기도 하는 그에게서 권위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올해로 51살이 됐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출판사에 가도, 음악을 하러 가도 내 나이는 선생님 나이더라구요. 근데 그게 너무 싫어요. 인생에선 자유가 가장 중요한데 나이 때문에 선배가 되는 건 너무 싫어요. 10대라도 존중할 게 있으면 내 스승이 되는 것이고, 70대라도 존경할 게 없으면 그렇지 않죠. 그게 제 삶이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게 자유를 주는 록을 하는 거기도 하구요. 괜히 절 높이는 건 싫어요. 아, 그러고 보니 한국인들에게 메시지를 하나 전달하고 싶네요. 모두들 저 같이 50대가 되어도 어른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단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웃음)” 언제까지고 섬세한 글로, 사려 깊은 영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 까짓 어른쯤 영원히 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