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전제하자. 배우 故 장자연의 죽음, 그리고 성 착취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고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경찰의 손에 넘어갔고, 그것이 정말 고인이 작성한 것인지 조사가 이뤄질 것이다. 그녀를 착취한 것이 누구인지는 그 이후에나 판명될 것이다. 하지만 이 안개 속에서도 모두가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은, 만약 이 일이 사실일 경우 꼭 처벌해야 하며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윤리적 잣대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 때문만은 아니다. 한 인격을 성적 도구로 전락시키고 소비하는 것, 사람을 거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것은 기브 앤드 테이크의 차원이 아니다.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책임지지 않는 단어, 널리 퍼지는 플랫폼
진짜 故 장자연을 착취한 이들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과는 별개로, 연예인, 특히 여성 연예인을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 아래 성적인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경향을 점검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노출을 규제하고 심의를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는 마돈나부터 가까이는 이효리까지, 여성 연예인이 섹슈얼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문제는 노출이 아닌, 노출과 섹시함을 강요하고 그런 이미지로 연예인을 고착화하는 시장과 권력이다. 과거 MBC 은 ‘징거 타임’이라는 명목으로 시크릿의 징거에게 매주 맥락 없이 섹시 골반 댄스를 추게 했고, 그걸 즐기는 나이 많은 남자 연예인의 모습을 아무 고민 없이 보여줬다. 이런 일은 아마 갈수록 늘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윤리적 브레이크를, 이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누구인가.
최근 매체들이 너무 쉽게 연예인을 성적 이미지로 환원시켜 유통하는 모습은 그래서 아쉽다. 우연히도, 故 장자연의 친필 추정 편지가 경찰에 넘어간 날, 이 소식과 함께 포털 검색어 상위권에는 ‘하의 실종 행사’와 ‘현아 교복 사진’이 함께 자리했다. 모 의류업체는 다리의 노출이 많을수록 할인 폭을 높여주는 ‘하의 실종 패션 행사’를 기획했다. 할인율을 빌미로 여성의 노출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행위는 정도의 큰 차이는 있지만, 앞서의 경우처럼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 환원하고 소비하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상식적인 일이지만, 이 행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취소됐다. 매체들 역시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하의 실종 행사’에 비판적이던 매체들 안에서 ‘하의 실종’을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연예인 사진에 ‘하의 실종’이라는 딱지를 붙인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 연예인이 짧은 치마를 입고 섹슈얼한 이미지를 어필할 수는 있다. 누군가 그걸 보고 ‘하의 실종’이라는 천박한 성적 농담을 사적으로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 매체가 그런 단어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레드 카펫 위의 배우를 오직 ‘하의 실종 패션 종결자’로 환원시켜 포털을 비롯한 플랫폼에 유통시키는 행위에서, 한 인격에 대한 고려를 찾기란 어렵다. 포미닛 현아의 중학교 시절 교복 사진을 공개하며 ‘중학생이 저렇게 섹시해?’라는 제목을 다는 기사는 어떤가. 섹시하다는 말이 꼭 대상을 성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은 아닐지 몰라도, 그저 예쁘고 날씬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무감각 혹은 무책임한 말들이 매체라는 공론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유통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런 정신 나간 행사를 쉽게 기획할 수 있었을까.
불쾌함마저 사라져버린 시대에 대해
물론 매체가 연예인을 섹슈얼한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것과 故 장자연의 경우로 대표되는 성 착취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또한 그런 식의 소비가 온전히 매체의 주도 아래 이뤄지는 것 역시 아니다. 일부 혹은 다수의 네티즌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는 대신 동참하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매체의 궁극적 역할은 뉴스의 전달자가 아닌, 윤리적 감시자다. 정치 기자가 정부의 홍보정책을 빠르게 전달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아무런 비판적 검토도 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평가 받는다. 연예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故 장자연 사건에 대해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외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동시에 연예 매체를 통해 우리는 ‘뒤태’라는 단어에 무감해졌고, ‘꿀벅지’를 허벅지와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 언젠간 ‘하의 실종’에 대한 불쾌함도 무뎌질지 모른다. 다름 아닌 매체에 의해 한 인격을 섹시한 ‘무엇’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볼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글. 위근우 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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