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발전이란 이를테면 수영을 배우는 일과 비슷하다. 아무리 두려워도 우선은 물에 뛰어들어야만 그 세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한지혜가 서서히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배우라는 이름에 살을 채워 넣는 과정도 그랬다. KBS 에서 깻잎 머리의 철없고 귀여운 여고생 정숙으로 성공적인 공중파 안착을 했던 그녀는, 하지만 영화 에선 그 이미지 그대로를 답습하며 한계를 드러냈다. 오히려 그녀가 가능성을 보여줬던 순간들은 같은 이미지를 견고히 할 때보다 KBS 로 일일드라마 특유의 생활 연기의 공식을 배워가거나 MBC 의 지현처럼 복잡한 성격의 인물을 표현할 때다. 특히 지고지순한 탄광촌 처녀에서 신태환 회장(조민기)에 맞먹는 카리스마를 가진 야심가로 변해가는 지현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며 그녀는 “이제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게 기대가 되요. 배우로서의 자신감이 아주 조금은 생긴 거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에 도전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자신감과 성취감 덕분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기생 백지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를 오히려 질리게 할 정도의 강한 위엄과 도도함을 갖춘 캐릭터다. “웃는 신은 하나도 없고 말도 별로 없는 역할이에요. 그런데 가끔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기 굉장히 의미심장해요. 쉽게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현과는 또 다른 느낌의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이죠.” 스스로도 촬영 초반에는 백지의 성격이 몸과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힘들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할에 도전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려운 역할에 도전하는 힘든 길이 결국 좋은 배우에 이르는 지름길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한지혜는 한 마디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다음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가 닮고 싶은 여자 배우들이 대체 할 수 없는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1. 의 키이라 나이틀리
(Pride & Prejudice) │ 2005년 │ 조 라이트
“만약 좋아하는 여자 배우 중 단 한 명만 고르라고 한다면 키이라 나이틀리를 꼽고 싶어요. 사실 로 처음 봤을 땐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매력의 젊은 배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리즈에서 고상한 귀족 아가씨와 터프한 여전사의 모습을 모두 소화하는 걸 보면서 많이 감탄했어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정말 잘 소화하는 배우에요. 그 중에서도 의 엘리자베스는 원작 소설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아요. 가난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자격지심이 아닌 진짜 자존심이 느껴져요.”워킹 타이틀로 대표되는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의 원류는 어쩌면 제인 오스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매튜 맥퍼딘)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 감정을 숨기고 오해하는 과정은 현대의, 심지어 한국의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세상에 남자가 당신 하나만 남아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엘리자베스의 분노에 찬 외침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한 남녀 관계의 모순적 감정을 잘 드러내는 대사도 없지 않을까.

2. 의 케이트 블랑쉐
(The Aviator) │ 2004년 │ 마틴 스콜세지
“사실 케이트 블랑쉐는 에서 보여준 여신 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클래식한 의미로의 미인 배우는 아니잖아요. 몸도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좀 깡마르고요. 그런데 그렇게 가끔 드러나는 남성적 느낌과 매력적인 목소리가 더해졌을 때 정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그녀만의 매력이 느껴지는 거 같아요. 를 보면 하워드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수많은 여인 중 그녀가 연기한 캐서린 헵번이 가장 눈에 띄잖아요. 휴즈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는 헵번의 지적인 모습은 케이트 블랑쉐였기에 가능한 연기였다고 봐요.”

당대 최고의 블록버스터를 찍어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고, 특유의 매력으로 캐서린 헵번이나 에바 가드너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유혹한 하워드 휴즈의 삶이 영화화된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블록버스터였던 그의 삶을 옮기기란 쉽지 않았는데 10여 년 동안 영화화에 매달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집념과, 마찬가지로 헵번의 인터뷰를 모두 수집해 연구한 케이트 블랑쉐 등의 노력을 통해 영화보다 영화 같은 실화는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3. 의 스칼렛 요한슨
(Match Point) │ 2004년 │ 우디 알렌
“가만히 있어도 순수하면서도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배우, 그게 스칼렛 요한슨이죠. 를 보면 굉장히 청순한데 남자들이 그녀에게 저절로 끌리잖아요. 그런 매력이 가장 극대화 된 게 같아요. 상류 사회로 편입하는 게 간절한 남자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돈 많고 신분 좋은 여자에게 만족해야겠지만 그 옆에 스칼렛 요한슨 같은 여자가 있다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겠죠. 그런 면에서 그녀가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영화라고 봐요.”

만약 우디 알렌의 냉소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는 코미디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저변에 깔린 불안함과 어둠은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류 사회에 진출하고픈 욕망을 가진 테니스 강사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그 기회를 확실히 잡았음에도 또 다른 욕망 때문에 로라(스칼렛 요한슨)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인간은 종종 옳지 못한 선택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옳지 못한 선택이 오히려 운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운명의 불가해함에 대한 통찰에 이른다.

4. 의 조디 포스터
(The Silence Of The Lambs) │ 1991년 │ 조나단 드미
“은 제가 초등하교 4학년 때인가 나온 영화에요. 중학교 때 봤지만 그 때부터 조디 포스터의 지적이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이 굉장히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한니발 렉터를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호연으로 기억되는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조디 포스터가 절대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줄리안 무어도 좋은 배우지만 에서 조디 포스터의 뒤를 이어 스털링 요원을 연기하니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잖아요.”짧게 요약해 은 악마적인 연쇄 살인마를 더 악마적인 천재 프로파일러의 도움으로 잡는 이야기다. 자신이 죽인 여성의 가죽을 도려내는 살인마 버팔로 빌도 살벌한 존재지만 한 마디 말로 옆방의 정신병자를 자살로 이끌고, 경찰의 살가죽을 벗겨내는 한니발 렉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결국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제이슨이나 프레디 같은 초자연적 괴물보다 인간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는데 있다.

5. 의 힐러리 스웽크
(Million Dollar Baby) │ 2004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연기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정말 여자로선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영화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힐러리 스웽크의 열정은 정말 꼭 배우고 싶은 요소에요. 에선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연기를 보여주고 에선 여자 복서 역을 위해 근육량을 엄청나게 늘리잖아요. 기본적으로 여주인공과 트레이너 간의 교감이 감동적인 영화지만 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선 여자로선 쉽지 않은 복싱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감내하고 영화에서 완벽한 시합을 보여주는 힐러리 스웽크의 노력이 더 눈에 띄네요.”

복싱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 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여자 버전은 아니다. 가 사회적 하층민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록키가 복싱 타이틀 매치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이야기라면, 는 부녀 같은 신뢰를 쌓은 매기(힐러리 스웽크)와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타이틀 매치 과정 이후에 겪은 불행과 그 불행에 대처하는 프랭키의 선택에 집중한다. 그 과정은 록키와 같은 영광의 기록과 거리가 멀지만 관습적이지 않는 결말은 그 어떤 해피엔딩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닮고픈 여배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

“을 위해 1980년대 시대상을 담은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처럼 이번 영화를 위해서 기생과 관련한 책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그냥 웃음을 팔던 사람이 아니라 선비들과 지적으로 대등한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만큼 준비가 필요하죠.” 영화 중 기생 신분에 맞게 시조창까지 직접 불러야 할 한지혜에게 당대 기생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백지의 차가운 성격을 완벽히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매니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딱딱한 말투로 대하는 연습도 꾸준히 하고 있다. 즉 자신이 닮고 싶은 당대의 여배우들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셈이다. 과연 그 노력이 그녀를 얼마나 먼 곳까지 옮길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한걸음 한 걸음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배우 한지혜를 닮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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