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배용준을 ‘남산타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서울의 상징,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한국의 보물. 너무 멀리 혹은 높이 있거나, 한때 아름다웠지만 이제 타버렸거나,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이미 존재감을 잊어버린 그 무엇. 하지만 백날을 찾아봐라. 그 남자는 거기에 없다.
배용준을 찾아 떠난 여행. 그렇다면 이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가? 를 벅차게 나누고 에서 몸을 녹인 후 의 설산을 넘고 의 얼음 강을 건너 격정적인 에서 돌아와 에 살포시 동행이라도 해야 할까. 이런 연대기적 구성이라니, 파란 깃발을 따라다니는 단체관광만큼 지루하다. 배용준이라는 흥미로운 목적지로 가기엔 너무나 심심한 루트다.
욘사마? 그는 그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을 뿐이다
당신에게 배용준은 무엇이라 불릴까? 10년 입은 내복처럼 익숙해진 이름, ‘욘사마’라고 하자. 7년 전 방영된 , 이 드라마 한 편으로 ‘한류’(韓流) 혹은 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교류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바람에 날리는 갈색머리에 머플러를 곱게 두른 준상이 서 있었다. 물론 배용준은 데뷔 때부터 “그를 알아본 여대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 1996년) 인기를 실감해야 했던 스타였다. 하지만 의 범 아시아적 성공은 ‘인기’를 뛰어넘는 존재감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1세대 한류스타’라는 번쩍이는 배지를 달아주며 아직은 불안한 한류목장을 지키는 보안관이 되라고 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배용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배용준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아마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한류스타들이 겪었을 과정이다. 하지만 배용준이 2009년에도 여전히 도쿄돔에 5만 명을 운집시키는 슈퍼스타로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르다. 배용준은 그라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라서 해야 하는 일을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변환시켜 나갔다. 가슴팍에 달린 ‘국가대표’라는 이름표에 배용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양보하지도 않고, “천황 다음 욘사마”라는 농담 아닌 농담, 범인이라면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거대한 인기와 관심에 체하거나 과식하지도 않았다. 할리우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한 줄서기 행렬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대신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바다를 가르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며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만약 당신이 배용준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대한민국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엽렵한 사업가로 기록될 것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면서도 고급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고, 배우로서 자신이 중심이 된 매니지먼트 회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 스태프와 팬을 “일행”이나 “가족”이라고 부르듯, 배용준이 진행하고 있는 이 모든 일련의 것들은 ‘비즈니스’라기 보다는,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살림’이다. 이 ‘살림의 제왕’이 일본 팬들 앞에서 보자기를 접어 간단한 가방을 만드는 시연을 해 보일 때, 세계 어디나 있을 작은 천 조각은 한국인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정신이 깃든 찬란한 유산으로 둔갑한다. “가족 여러분, 우리 다음에는 서울에서 꼭 가족사진 찍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차라라락, 서울로 향하는 몇 만장의 비행기 티켓이 결제되는 소리가 들린다. 배용준이라는 사람이 움직이는 비즈니스 시장은 실로 거대하다. 하지만 스스로 비즈니스맨이기를 거부하는 배용준은 상품을 구걸하지도, 팬들의 사랑과 관심에 아부하지도 않는다. 대신 취미를 소개하고 지혜를 나누고 살림의 방법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수장이 된다. “농부가 되겠다”는 그의 꿈에서 ‘배용준 이장님’이 이끄는 ‘에코 빌리지’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고운 미소 뒤의 치밀함, 엄청난 인기 뒤의 진심
“곱다, 고와” 에서 수록된 배용준의 몇몇 사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저런 감탄이 터져 나온다. 멋지다가 아니라 곱다, 라니. 언젠가 그와의 인터뷰에서 손이 곱다고 했더니 그보다는 더 거칠고 사내 같은 다른 손을 불쑥 내밀어 보여 준 적이 있다. 99년 작 MBC 드라마 (이하 )의 ‘재호’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지만 가장 배용준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의 석주처럼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타고난 귀공자이자 까칠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다정한 왕자님이었다. 하지만 전반부에 등장한 배용준은 달랐다. 스스로를 엄격하게 조련해 세상에 적응한 발톱을 숨긴 거친 수컷. 성공을 위해 새벽시장에서 돈뭉치를 움켜쥐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여심을 쥐락펴락하던 남자. 를 쓴 노희경 작가는 당시의 배용준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용준 씨는 대사 한 문장 한 문장, 사소한 말 하나까지 신경을 썼어요. 뭐 사실 이렇게 읽으나 저렇게 읽으나 별 상관이 없는 경우라고 해도 말이죠. (웃음) 완벽주의자? 네,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이미 인쇄된 책의 단 한자의 오자를 정정하기 위해 매 권 마다 삽지를 끼워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니, 주변에 있다면 다분히 피곤할 이 꼼꼼함과 치밀함은 배용준의 온화한 미소만 본다면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지난 9월 29일, 30일 양일간 일본 도쿄돔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념하는 이벤트와 배용준의 한국문화 소개 책 의 일본 출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5만 명 가까운 관객이 하루도 빠짐없이 빽빽하게 도쿄돔을 채웠고, 그의 한 마디 말에 웃고 울었다. 하루는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았고, 하루는 가마를 타고 돔을 돌았다. 이처럼 일본에서 벌어지는 배용준을 둘러싼 행사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이건 말도 안돼!” 라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비현실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막을 수 없다. 만약 ‘종교행사’ 라는 말에 두려움과 조롱을 걷어낸다면, 이 행사는 정말 종교집회를 방불케 한다. 도쿄돔 안 팍, 혹은 그의 ‘가족들’에게 배용준은 기구를 타고 강림한 땅 위의 현신이자, 패혈증이라는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곧 부활해 기꺼이 당신들 곁에 임하신 젊고 아름다운 예수님이다. 금은보화를 갈취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기꺼이 조공을 바치고 싶은 어진 왕이다. 그가 늘 ‘가족’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옵빠-” 를 외치는 여동생들이 아니다. 이 곱디 고운 사내를 차지하려는 극성스러운 쿠거들도 아니다. 오히려 조용한 곳에서 변하지 않는 지지를 보내는 공동의 부모와도 같다. 또한 이 아들은 그 무조건적 사랑에 안도하지 않으며 심지어 고마워 할 줄 안다. 스타라는 자만심이 아니라, 공인이라는 무게가 아니라 대중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건 배용준이 가진 능력 혹은 행운이다.
단독자 배용준, 우리가 찾아갈 그 남자의 주소
본인이 책에서 언급한 대로 “대왕”이라 불리던 유일한 두 남자. 만약 땅과 하늘 같이 다른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사이의 교집합 모델이 있다면 아마도 배용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거침없이 영토를 확장해 가던 남자의 손에서 쓰인 한국에 대한 내밀한 독백. 기존 셀러브리티 여행서의 한계와 문제점을 묵직하게 뛰어넘는 그의 책 은 관광사업을 위한 옐로우 페이지가 아니라, “보물창고” 같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뚜껑을 열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호기심 왕성한 소년의 신나는 기록이다. 또한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돌아가 사고하고 움직이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깃발을 가슴팍에 아로새긴 애국 선교단은 아니다. 경주의 비어있는 아름다움이 가슴을 적시는 순간 일본의 건축거장 안도 다다오를 떠올리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걸으며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흥얼거리는 그 남자의 뒷모습엔 오롯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있다. 그는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 배용준은 남산타워도, 남대문도, 동대문도 아니다. 은유와 상징이 필요 없는 단독자 배용준, 그곳이 우리가 찾아갈 그 남자의 주소다.
사진제공_ BOF
글. 도쿄=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배용준을 찾아 떠난 여행. 그렇다면 이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가? 를 벅차게 나누고 에서 몸을 녹인 후 의 설산을 넘고 의 얼음 강을 건너 격정적인 에서 돌아와 에 살포시 동행이라도 해야 할까. 이런 연대기적 구성이라니, 파란 깃발을 따라다니는 단체관광만큼 지루하다. 배용준이라는 흥미로운 목적지로 가기엔 너무나 심심한 루트다.
욘사마? 그는 그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을 뿐이다
당신에게 배용준은 무엇이라 불릴까? 10년 입은 내복처럼 익숙해진 이름, ‘욘사마’라고 하자. 7년 전 방영된 , 이 드라마 한 편으로 ‘한류’(韓流) 혹은 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교류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바람에 날리는 갈색머리에 머플러를 곱게 두른 준상이 서 있었다. 물론 배용준은 데뷔 때부터 “그를 알아본 여대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 1996년) 인기를 실감해야 했던 스타였다. 하지만 의 범 아시아적 성공은 ‘인기’를 뛰어넘는 존재감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1세대 한류스타’라는 번쩍이는 배지를 달아주며 아직은 불안한 한류목장을 지키는 보안관이 되라고 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배용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배용준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아마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한류스타들이 겪었을 과정이다. 하지만 배용준이 2009년에도 여전히 도쿄돔에 5만 명을 운집시키는 슈퍼스타로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르다. 배용준은 그라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라서 해야 하는 일을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변환시켜 나갔다. 가슴팍에 달린 ‘국가대표’라는 이름표에 배용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양보하지도 않고, “천황 다음 욘사마”라는 농담 아닌 농담, 범인이라면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거대한 인기와 관심에 체하거나 과식하지도 않았다. 할리우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한 줄서기 행렬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대신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바다를 가르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며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만약 당신이 배용준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대한민국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엽렵한 사업가로 기록될 것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면서도 고급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고, 배우로서 자신이 중심이 된 매니지먼트 회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 스태프와 팬을 “일행”이나 “가족”이라고 부르듯, 배용준이 진행하고 있는 이 모든 일련의 것들은 ‘비즈니스’라기 보다는,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살림’이다. 이 ‘살림의 제왕’이 일본 팬들 앞에서 보자기를 접어 간단한 가방을 만드는 시연을 해 보일 때, 세계 어디나 있을 작은 천 조각은 한국인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정신이 깃든 찬란한 유산으로 둔갑한다. “가족 여러분, 우리 다음에는 서울에서 꼭 가족사진 찍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차라라락, 서울로 향하는 몇 만장의 비행기 티켓이 결제되는 소리가 들린다. 배용준이라는 사람이 움직이는 비즈니스 시장은 실로 거대하다. 하지만 스스로 비즈니스맨이기를 거부하는 배용준은 상품을 구걸하지도, 팬들의 사랑과 관심에 아부하지도 않는다. 대신 취미를 소개하고 지혜를 나누고 살림의 방법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수장이 된다. “농부가 되겠다”는 그의 꿈에서 ‘배용준 이장님’이 이끄는 ‘에코 빌리지’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고운 미소 뒤의 치밀함, 엄청난 인기 뒤의 진심
“곱다, 고와” 에서 수록된 배용준의 몇몇 사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저런 감탄이 터져 나온다. 멋지다가 아니라 곱다, 라니. 언젠가 그와의 인터뷰에서 손이 곱다고 했더니 그보다는 더 거칠고 사내 같은 다른 손을 불쑥 내밀어 보여 준 적이 있다. 99년 작 MBC 드라마 (이하 )의 ‘재호’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지만 가장 배용준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의 석주처럼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타고난 귀공자이자 까칠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다정한 왕자님이었다. 하지만 전반부에 등장한 배용준은 달랐다. 스스로를 엄격하게 조련해 세상에 적응한 발톱을 숨긴 거친 수컷. 성공을 위해 새벽시장에서 돈뭉치를 움켜쥐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여심을 쥐락펴락하던 남자. 를 쓴 노희경 작가는 당시의 배용준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용준 씨는 대사 한 문장 한 문장, 사소한 말 하나까지 신경을 썼어요. 뭐 사실 이렇게 읽으나 저렇게 읽으나 별 상관이 없는 경우라고 해도 말이죠. (웃음) 완벽주의자? 네,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이미 인쇄된 책의 단 한자의 오자를 정정하기 위해 매 권 마다 삽지를 끼워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니, 주변에 있다면 다분히 피곤할 이 꼼꼼함과 치밀함은 배용준의 온화한 미소만 본다면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지난 9월 29일, 30일 양일간 일본 도쿄돔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념하는 이벤트와 배용준의 한국문화 소개 책 의 일본 출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5만 명 가까운 관객이 하루도 빠짐없이 빽빽하게 도쿄돔을 채웠고, 그의 한 마디 말에 웃고 울었다. 하루는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았고, 하루는 가마를 타고 돔을 돌았다. 이처럼 일본에서 벌어지는 배용준을 둘러싼 행사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이건 말도 안돼!” 라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비현실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막을 수 없다. 만약 ‘종교행사’ 라는 말에 두려움과 조롱을 걷어낸다면, 이 행사는 정말 종교집회를 방불케 한다. 도쿄돔 안 팍, 혹은 그의 ‘가족들’에게 배용준은 기구를 타고 강림한 땅 위의 현신이자, 패혈증이라는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곧 부활해 기꺼이 당신들 곁에 임하신 젊고 아름다운 예수님이다. 금은보화를 갈취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기꺼이 조공을 바치고 싶은 어진 왕이다. 그가 늘 ‘가족’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옵빠-” 를 외치는 여동생들이 아니다. 이 곱디 고운 사내를 차지하려는 극성스러운 쿠거들도 아니다. 오히려 조용한 곳에서 변하지 않는 지지를 보내는 공동의 부모와도 같다. 또한 이 아들은 그 무조건적 사랑에 안도하지 않으며 심지어 고마워 할 줄 안다. 스타라는 자만심이 아니라, 공인이라는 무게가 아니라 대중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건 배용준이 가진 능력 혹은 행운이다.
단독자 배용준, 우리가 찾아갈 그 남자의 주소
본인이 책에서 언급한 대로 “대왕”이라 불리던 유일한 두 남자. 만약 땅과 하늘 같이 다른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사이의 교집합 모델이 있다면 아마도 배용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거침없이 영토를 확장해 가던 남자의 손에서 쓰인 한국에 대한 내밀한 독백. 기존 셀러브리티 여행서의 한계와 문제점을 묵직하게 뛰어넘는 그의 책 은 관광사업을 위한 옐로우 페이지가 아니라, “보물창고” 같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뚜껑을 열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호기심 왕성한 소년의 신나는 기록이다. 또한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돌아가 사고하고 움직이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깃발을 가슴팍에 아로새긴 애국 선교단은 아니다. 경주의 비어있는 아름다움이 가슴을 적시는 순간 일본의 건축거장 안도 다다오를 떠올리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걸으며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흥얼거리는 그 남자의 뒷모습엔 오롯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있다. 그는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 배용준은 남산타워도, 남대문도, 동대문도 아니다. 은유와 상징이 필요 없는 단독자 배용준, 그곳이 우리가 찾아갈 그 남자의 주소다.
사진제공_ BOF
글. 도쿄=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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