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유행어가 입 속에서 맴돈다. “잘났어, 정말.” 그러나 기억 속의 그 억양이 아니다.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이다. 도산대로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준영(송혜교)과 지오(현빈)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었다. 잠시 사무실을 빠져나온 듯 한 차림의 여성들은 “어머, 대박이다. 주걸륜 닮은 것 같아.” “얘, 뭐래니. 우리 빈사마가 더 잘생겼어!”하고 속닥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넋을 놓은 남성들은 “히야, 예쁘긴 진짜 예쁘다.” “얼굴이 내 주먹보다 더 작네.”하며 실물은 송혜교가 역시 으뜸임을 서로 확인시켜 주기에 여념이 없다. 그 뿐인가, 일본인 아주머니들은 사진을 찍으며 “스고이!” “각꼬이!”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둘의 연애를 회사에 비밀로 하자는 준영은 그 이유를 묻는 지오에게 그렇게 답했었다. 둘 다 잘나가니 남들이 얼마나 샘나겠냐고. 아니, 이렇게 잘난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질투가 나기는커녕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표민수 감독이 사는 세상

의 제작 발표회에서 현빈은 “표민수 감독님에 대해 워낙 좋다는 얘기만 들으니까 나중에는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어요. 그런데 같이 작업을 해보니까… 정말 좋더라구요.”라고 드라마에 참여하게 된 소감을 밝혔다. 현장의 표민수 감독은 아무리 다급하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한순간도 얼굴에 미소를 잃는 법이 없다. 멀리 있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말소리가 전해지지 않자,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지시 사항을 전달하며 현장을 다이내믹하게 이끈다. 꼼꼼한 모니터와 정확한 계획을 토대로 몸소 자신의 욕심을 실현시키려 동분서주 하는 표민수 감독의 모습은 어느 순간 지오였다가, 준영이었다가 규호이기도 하다.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표민수 감독은 두 사람이 걸어오는 한 장면을 두고 멀리서 찍고, 바스트로 당겨서 찍고, 크레인으로 높은데서 찍고, 뒤집어 찍으며 다양한 장면을 만든다. 게다가 몰려든 인파와 자동차의 소음 때문에 예기치 못한 NG가 거듭되자 신을 정리할 무렵에는 시간이 제법 늦어 버렸다. 그 때,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던 스태프가 표민수 감독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다음 장소인 샌드위치 가게를 가까운 곳에 미리 물색해 둔 것이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표민수 감독은 흡족한 표정으로 손수 대본을 읽으며 준영이 되었다가 지오가 되었다가 하며 가게에서 걸어 나왔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촬영 감독은 손가락으로 앵글을 만들어 표민수 감독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아하, 아깝네. 저게 딱 걸려버린다.” 촬영 감독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도산공원] 네 글자가 박힌 바위가 버티고 있었다. “그럼, 이쪽으로 걸어가면 되겠네요.” 스태프들의 한숨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표 감독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살짝 동선을 틀어서 다시 걸음을 옮긴다. 표민수 감독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유연하고 경쾌한 곳이다.

“필요할 때는 스태프들이 출연도 합니다.”

의 현장을 찾은 두 번째 날. 여주에서도 한참을 들어가 촬영지로 알려준 외진 교회 앞에 도착하자 덩그러니 펼쳐진 갈대밭이 눈에 들어온다. 당황하고 있던 차에 사진 기자가 무언가 발견한 듯 손을 뻗었다. “저거, 버스 아닐까?” 대형 버스가 손바닥만 하게 보일만큼 멀리 떨어진 갈대 수풀 한 가운데, 요새처럼 외떨어진 물가에서 스태프들은 여전히 그들의 세상을 살고 있었다. 이날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은 과 여러 단막극을 통해 특유의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연출 능력을 인정받아 온 김규태 감독. 을 열심히 본 시청자들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B팀이 촬영을 하는 날이다. 김규태 감독이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슬쩍 모니터 앞의 감독석이 궁금해 고개를 뻗었다. 그러나 의자 위에 펼쳐진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은 김군이나 윤영이 아니라 호걸과 아낙들. 빼곡하게 쓰인 코멘트와 밑줄, 군데군데 그려진 동그라미까지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그 책은 극 중 규호(엄기준)의 드라마인 의 대본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정교한지 책 표지에 쓰여 있는 이름마저 주인에 따라 다른데, 손규호는 이름만 작고 단정하게 쓰여 있고 주준영은 핑크색으로 큼지막하게 ‘준영이 꺼’라고 쓴 후 귀여운 그림까지 그려져 있는 식이다.사실, 현장에서 과 은 스태프들조차 정확히 구분이 되질 않는다. 한겨울에 버금가는 추운 날씨 탓에 다들 두꺼운 점퍼를 껴입고 목도리를 둘둘 말고 있어서 누가 배우인지 잘 알 수 없었을 뿐 더러 “필요할 때는 스태프들이 출연도 합니다.”라는 서동락 조감독의 말처럼 때로는 제작진들이 카메라에 비춰지기도 한다. 카메라 앵글에 멀리 배경이 비칠 때면 몸을 녹이던 스태프들이 달려가서 현장의 분주함을 연출하는 식이다. 또한 조감독으로 출연하는 이다인과 곽병진이 소품인 초코파이와 우유를 스태프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은 극중 역할의 연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성원 모두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창의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 가는 모습은 분주했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로운 것이기도 하다.

믿을 것은 역시 사람, 그리고 진심

잠시 간식을 먹고 촬영 재개 되자, 불가에 모인 정석원과 서효림은 쉬고 있는 호걸과 봉순이 되어 자연스럽게 연기 상황을 이어나간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김규태 감독의 모니터에 감독석에 앉은 손규호 감독의 모습이 비춰진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방한복을 둘러쓰고 손난로까지 들고서 덜덜 떨던 엄기준은 어느새 얇은 점퍼 차림에도 꿋꿋한 냉혈한이 되어 있다. “니가 팀을 챙겨야지, 팀이 너를 챙겨야겠니?”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는 이죽거림이 눈앞에서 작렬한다. 그 비아냥의 대상은 당연히 미친 양언니, 수경(최다니엘)이다. 싱글거리며 현장을 누비던 최다니엘의 표정은 어느새 불만으로 가득 차 일그러졌고, 놀랍게도 그 얼굴에는 빡빡한 일정과 추위 속에서 현장을 지키는 스태프들의 고단함이 그럴듯하게 녹아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출연했던 광고의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 그들이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을 엿들은 기분이 든다. 사람들의 평가도, 시청률도, 무엇 하나 예측 할 수 없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믿을 것은 역시 생각, 그것 하나 뿐 인지도 모를 일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