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텍사스의 메마른 대지에서 사냥꾼 모스(조슈 브롤린)는 핏빛으로 물든 마약 거래 현장을 발견한다. 남겨진 돈가방을 챙겨서 떠난 그는 아직 숨이 붙어있던 멕시코인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결국 물을 챙겨서 다시 그 곳에 찾아갔다가 국경까지 넘으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산소탱크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가 그의 숨통을 점점 조여 오는 가운데 늙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이 곤경에 처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모스는 개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자신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리라 생각했을까? 그에게는 생사를 넘나들었을 베트남전이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일평생 사냥을 해도 만져보기 힘든 200만 달러에 사로잡히지만 스스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 인정에 흔들려서 그 곳에 다시 가고야 마는 사내다. 통화를 하는 목소리에서 아픔이 묻어난다고 했던 아내 칼라 진의 말처럼 그는 감정이 배어 나오는 사람이다.
주름진 피부로 텍사스가 그려지고, 중후한 목소리로 연륜이 그려지는 벨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서 새파란 나이인 스물다섯부터 보안관이었던 그는 오래 전 보안관들이라면 이 막막한 시대를 어떻게 꾸릴까 궁금하다. 그저 무모한 객기로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은 바람을 녹록지 않은 세상은 흔들어 놓는다. 냉가슴을 앓는 그에게 삼촌은 말한다. 손해 난 것을 되돌리려 애쓰다가 더 많이 새게 된다며 접을 건 접으라고. 벨은 반 박자 느리게 사건을 쫓지만, 삶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만큼은 정박자로 따라붙는다.
짙은 쌍꺼풀, 단아한 가르마의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캐틀건(도살용 공기총)을 든 안톤 시거는 돈이나 마약에 휘둘리지 않는, 원칙이 있는 킬러다. 해칠 이유 없이도 다만 약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총구를 들이민다. 간혹 선심을 베푼다. 동전 던지기로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그는 모양새 빠지지 않게 삶에 미련을 버리라며 불시에 총을 발사한다. 동종업계의 칼슨은 그를 유머 감각이 없고, 특이하고 감당 못할 자이며, 싸이코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몇몇 단어로 가둘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다.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예사로운 이야기를 조금도 예사롭지 않게 풀어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이야기건만, 세 명의 인물이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은 없다. 심지어 한 화면에 안톤 시거와 모스, 안톤 시거와 벨이 담기는 순간에도 오가는 대사 한마디가 없다. 그러나 팽창하는 긴장감이 전편에 흐른다. 또한 음악을 대신하는 사운드도 섬뜩섬뜩하다. 무엇보다도 그저 무섭기만 한 스릴러가 아니라, 곱씹을만한 캐릭터와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악역은 상대역을 키우고, 이야기를 파고드는 결을 남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그러하다. 주인공인 배트맨 뿐만 아니라 관객의 숨통까지 조인다. 특히 양쪽 입가로 번지듯 남겨진 흉터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심각하게 지켜보는 자신의 얼굴에 칼로 미소를 그려준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부터였다. ‘다크 나이트’를 볼 때마다, 나에게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끝까지 간다! 끝까지 한다’를 보여주는 끝판왕 캐릭터다. 수갑으로 부보안관의 목을 조이는 첫 살인부터 마지막 차사고 후 절뚝거리는 뒷모습까지 시종여일 화면을 압도한다. 하물며 다리에 박힌 총알을 뽑는 순간마저도, 관객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하게 만든다. 칼라 진의 친정집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선심을 베푼다. 그녀가 동전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고 버티자,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거라고. 나는 악당으로서 대체 불가한 그만의 세계에 녹다운됐다.‘안톤 시거’와 ‘조커’는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악당인 캐릭터들이다. 누가 더 매력적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한 끗 차이. 땅을 밟고 다니는, 즉 현실적인 숨결이 보태진 세계와 상상력이 보태져야 하는 세계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따금 조커와 안톤 시거가 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즉 밀도가 다른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찔하고 짜릿한 상상화다.
8월 9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틸컷
달달한 커피를 즐기던 사람에게도 아주 가끔은 블랙이나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순간이 있다. 오늘 누군가 극장 매표소에서 “오늘은 좀 색다른 영화를 보고 싶군” 한다면, 나는 넌지시 말을 흘릴 듯싶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텍사스의 메마른 대지에서 사냥꾼 모스(조슈 브롤린)는 핏빛으로 물든 마약 거래 현장을 발견한다. 남겨진 돈가방을 챙겨서 떠난 그는 아직 숨이 붙어있던 멕시코인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결국 물을 챙겨서 다시 그 곳에 찾아갔다가 국경까지 넘으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산소탱크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가 그의 숨통을 점점 조여 오는 가운데 늙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이 곤경에 처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모스는 개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자신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리라 생각했을까? 그에게는 생사를 넘나들었을 베트남전이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일평생 사냥을 해도 만져보기 힘든 200만 달러에 사로잡히지만 스스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 인정에 흔들려서 그 곳에 다시 가고야 마는 사내다. 통화를 하는 목소리에서 아픔이 묻어난다고 했던 아내 칼라 진의 말처럼 그는 감정이 배어 나오는 사람이다.
주름진 피부로 텍사스가 그려지고, 중후한 목소리로 연륜이 그려지는 벨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서 새파란 나이인 스물다섯부터 보안관이었던 그는 오래 전 보안관들이라면 이 막막한 시대를 어떻게 꾸릴까 궁금하다. 그저 무모한 객기로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은 바람을 녹록지 않은 세상은 흔들어 놓는다. 냉가슴을 앓는 그에게 삼촌은 말한다. 손해 난 것을 되돌리려 애쓰다가 더 많이 새게 된다며 접을 건 접으라고. 벨은 반 박자 느리게 사건을 쫓지만, 삶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만큼은 정박자로 따라붙는다.
짙은 쌍꺼풀, 단아한 가르마의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캐틀건(도살용 공기총)을 든 안톤 시거는 돈이나 마약에 휘둘리지 않는, 원칙이 있는 킬러다. 해칠 이유 없이도 다만 약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총구를 들이민다. 간혹 선심을 베푼다. 동전 던지기로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그는 모양새 빠지지 않게 삶에 미련을 버리라며 불시에 총을 발사한다. 동종업계의 칼슨은 그를 유머 감각이 없고, 특이하고 감당 못할 자이며, 싸이코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몇몇 단어로 가둘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다.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예사로운 이야기를 조금도 예사롭지 않게 풀어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이야기건만, 세 명의 인물이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은 없다. 심지어 한 화면에 안톤 시거와 모스, 안톤 시거와 벨이 담기는 순간에도 오가는 대사 한마디가 없다. 그러나 팽창하는 긴장감이 전편에 흐른다. 또한 음악을 대신하는 사운드도 섬뜩섬뜩하다. 무엇보다도 그저 무섭기만 한 스릴러가 아니라, 곱씹을만한 캐릭터와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악역은 상대역을 키우고, 이야기를 파고드는 결을 남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그러하다. 주인공인 배트맨 뿐만 아니라 관객의 숨통까지 조인다. 특히 양쪽 입가로 번지듯 남겨진 흉터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심각하게 지켜보는 자신의 얼굴에 칼로 미소를 그려준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부터였다. ‘다크 나이트’를 볼 때마다, 나에게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끝까지 간다! 끝까지 한다’를 보여주는 끝판왕 캐릭터다. 수갑으로 부보안관의 목을 조이는 첫 살인부터 마지막 차사고 후 절뚝거리는 뒷모습까지 시종여일 화면을 압도한다. 하물며 다리에 박힌 총알을 뽑는 순간마저도, 관객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하게 만든다. 칼라 진의 친정집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선심을 베푼다. 그녀가 동전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고 버티자,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거라고. 나는 악당으로서 대체 불가한 그만의 세계에 녹다운됐다.‘안톤 시거’와 ‘조커’는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악당인 캐릭터들이다. 누가 더 매력적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한 끗 차이. 땅을 밟고 다니는, 즉 현실적인 숨결이 보태진 세계와 상상력이 보태져야 하는 세계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따금 조커와 안톤 시거가 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즉 밀도가 다른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찔하고 짜릿한 상상화다.
8월 9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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