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And the Oscar goes to…”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대 관심사는 분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데뷔 후 25년간 네 번이나 오스카 유력 후보로 지명됐으나, 수상 문턱 앞에서 미끄러지며 각종 ‘고통짤’을 남긴 디카프리오가 올해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트로피를 집에 가져 갈 수 있을까. 오스카에 딱히 관심이 없는 국내 영화팬들도 디카프리오가 4전 5기의 오뚝이 신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무척이나 큰 관심을 보였다.

# 이병헌이 조수미의 무대를 소개한다면?

그런데 아마도, 디카프리오를 향한 국내 팬들의 관심이 일정 부분 이병헌에게 덜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이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에 공식 초청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수상자는 아니다. 시상자 자격이다. 하지만 수상 못지않게 까다롭게 선정되는 것이 시상자다. 웬만한 인지도와 공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병헌의 이번 시상자 선정 소식은, 우리에겐 사실 그다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던 이병헌의 해외 위상을 일정 부분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 거나 흔히 말하는 ‘국뽕’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그의 해외활동을 지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이병헌은 “수상후보는 아니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초청을 받은 자체가 영광스럽고 배우로 감사한 일”이라며 참석 의지를 밝힌 상태다.
특히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유스’ 주제가 ‘심플 송’(Simple Song)으로 ‘007 스펙터’의 ‘라이팅스 온 더 월’(Writing’s On the Wall) 등과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상태라 국내 팬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조수미를 이병헌이 객석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거나, 이병헌이 조수미의 무대를 소개하는 시나리오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한 프레임의 카메라 속에 잡힌다면, 해당 영상은 국내에서 하루 종일 뜨거운 반응을 얻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이병헌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아카데미가 최근 ‘백인만의 잔치’라는 비판을 의식하고 다양한 인종을 초청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시각도 존재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후보 선정을 둘러싸고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 제기에 가장 앞장 선 이는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다. 그가 “어떻게 2년 연속, 후보 40명에 유색인종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는가”라며 보이콧 의사를 밝혔고, 윌 스미스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보이콧에 합류했다. 백인 배우 조지 클루니조차 “아카데미 시상식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여성, 유색 인종 등이 배제된 채, 백인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최근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일침을 날린 상태.
래퍼 ‘50센트’를 비롯한 흑인 연예인들은 이번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흑인 코미디언 겸 배우 크리스 락에게 오스카를 보이콧하라는 요구를 공개적으로 건네기도 했다. 백인들의 잔치에 흑인이 들러리는 서는 듯한 그림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크리스 락은 “내가 마음껏 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시상식을 꼭 봐야 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과거 “아카데미는 백인들의 행진”이라고 조롱한 바 있는 크리스 락의 반항정신을 시상식에서 기대해 보는 수밖에.

# “자유를 위한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논란이 일자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셰릴 본 아이작 위원장이 부랴부랴 “평생 유지되던 회원자격을 10년으로 줄이고, 2020년까지 여성과 유색 인종의 수를 2배로 늘리겠다”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론은 냉랭하다. SNS 상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인종차별 문제를 겨냥한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라는 해시태그가 유령처럼 유영한다.
사실 아카데미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 아니 적어도 ‘그러하다고 여겨졌던 움직임’은 지난 해 6월에 한차례 있었다. 당시 아카데미가 발표한 신입회원 322명의 명단에는 여성 영화인/ 해외 영화인 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임권택 감독·봉준호 감독·배우 최민식·송강호·디즈니 스튜디오 김상진 수석 애니메이터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당시 이는 아카데미가 백인 남성 위주의 회원 구성에 대한 비판을 우려해 대안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그래서 올해 백인들로만 채워진 후보 명단은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목소리와 행동이 따로 논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를 둘러싼 인종차별은 갑작스럽게 제기된 것이 아니라, 곪아오던 문제가 터진 쪽이다. 올해로 88회를 맞는 아카데미의 긴 역사에 역대 흑인 수상자는 단 15명. 수치 자체가 아카데미 논쟁의 역사를 명명백백 밝히고 있다. 지난 해 작품상과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데 그쳐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던 ‘셀마’의 OST ‘글로리’로 주제가상을 받은 존 레전드와 커먼은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위한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많은 흑인이 여전히 핍박받는 것이 사실이죠. 사람들은 ‘셀마’ 노래를 부르며 같이 행진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행진을 보고 있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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