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구슬프게 풀어내었던 김원석 감독에게 ‘미생’이 다가온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장그래(임시완)와, 오상식 차장(이성민)처럼 말이다. 케이블채널 tvN 8주년 특별 기획드라마 ‘미생'(극본 정윤정,연출 김원석)을 통해 시대를 울린 그는 KBS2 ‘성균관 스캔들’, Mnet’몬스타’ 등을 통해 자라나는 청춘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오던 감독이었다. 그 시선은 드라마 안팎으로 골고루 번져 김원석 감독의 작품을 통해 배출된 젊은 연기자들도 상당수다.
운명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으나, ‘미생’이 김원석 감독의 품에 들어오게 된 구체적인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다. ‘미생’의 종방연을 끝내고 포상휴가지인 세부로 향하기 직전 참으로 오랜만에 한가로운 주말을 맞이한 김원석 감독을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만났다. 그는 ‘미생’은 ‘몬스타’ 기획 단계에 이미 드라마화를 마음먹었던 작품이라고 밝혔다. ‘몬스타’는 애초에 빅뱅을 배출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탈락한 비스트 장현승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기획된 드라마였다. 오랜 시간 연습생 생활로 자신을 갈고 닦았으나 탈락하고 만 청춘의 이야기를 한다고 후배 연출자에게 털어놓았던 찰나, ‘미생’이라는 웹툰을 추천받았다고 한다. 아이돌 연습생으로 청춘을 보냈던 아이와 바둑 연구생으로 젊음을 소진한 아이의 심정이 비슷하다고 여겼던 김원석 감독은 그렇게 ‘미생’의 드라마화를 결심하게 된다. ‘몬스타’ 작업 가운데, ‘미생’의 드라마화를 회사에 제안하고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를 만나 설득했던 그는 결국 모두가 반대했던 웹툰을 드라마로 제작했고,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미생’ 촬영 이후에는 당분간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도리어 젊은 세대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길을 돌고 돌아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할지언정, 그는 결국 언젠가 또 다시 젊은 세대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드라마를 통해 표현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김원석의 드라마 안에서 수많은 장그래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 위로가 절실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미생’ 방송 화면
Q. 마지막 회에서 화제가 된 캐릭터는 문과장이었다. 특히 문과장의 깨알같은 리액션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김원석 감독 : 문 과장 역의 배우 장혁진 씨는 코미디에 대한 동물적인 센스가 있다. 애초에 설정한 문 과장은 일반적인 무능한 과장 캐릭터 정도였다. 무능하기에 성대리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휘둘리는 그런 느낌의 캐릭터라고 설명했는데, 코미디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워낙 겁이 많으니 성대리에게 의존하고 또 나중에는 석율에게도 의존하는 그런 느낌을 만들어나갔다. 그래서 마지막 성대리 불륜이 발각되는 장면에서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고 입을 막으며 자신의 캐릭터를 살렸다. 그렇게 연기자들이 조금씩 보태어 만들어간 것들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Q. 배우들이 하나같이 ‘김원석 감독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일단 말했다’라고 했고, 그래서 더더욱 적극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원석 감독 : 이성민 선배는 그런 것에 워낙 천부적인 사람이고, 임시완에게도 개그본능이 있다. 또 김동식 배우는 워낙 연기를 잘 한다. 이외에도 연극판을 좌지우지 하던 배우들의 에너지가 들끓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작가님, 그리고 촬영감독님의 공이 크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본과 촬영, 즉 프리 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인데, 대본이 잘 나오게끔 철저히 준비하고 그 다음에 촬영을 잘 해야한다. 내가 애초에 윤태호 선생을 찾아가 ‘이런 느낌으로 드라마를 만들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것을 혼자 만들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번에 운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배우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일단은 개개인이 살아날 수 있는 대본을 써주셨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배우들이 자유자재로 연기해도 될 만한 환경을 만들어준 촬영 감독님 덕문이다. 배우들이 복잡한 동선으로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연출자가 일일이 카메라 워킹을 다 생각하면서 할 수가 없다. 촬영 감독님의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나 역시도 굉장히 신나게 찍었던 드라마였다. 내가 운이 가장 좋은 것 같다.Q. 거의 모든 배우들에게 자유로움을 열어준다는 것은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굉장히 힘들 것 같다. 촬영에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김원석 감독 :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 소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좋은 촬영 감독님 덕분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연기자들은 다 안다. 요르단 장면 역시 추격신을 포함해 모든 신을 찍는 것에 5일 밖에 안 걸렸다. 여기에는 박주천 무술 감독의 공도 꽤 컸다. 현재는 자기 것을 연출하려고 준비 중인데, 아주 뛰어나다. 우리는 뛰어난 스태프들 덕에 끝까지 A팀B팀 없이 한 팀만으로 갈 수 있었다. 대신 미술 스태프들이 좀 힘들었을 것이다. 촬영 속도가 빠른데 아무래도 미술 소품은 제작하는 것에 시간이 걸리고 내가 워낙에 작은 것까지 원하다보니 미술 스태프들은 죽어났다. 예컨대, 드라마만을 위해 인트라넷을 새롭게 구축하기도 하는 식이다. 또 최훈민 대리라고, 실제 상사맨 출신의 자문이 있었는데 그 분은 대본에서는 ‘하대리가 통화한다’라고 되어있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애드리브 대사를 하는 것에 도움을 굉장히 많이 줬다.
Q. 한 신 한 신을 놓고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도 들었다. ‘미생’이 일부 주연배우들의 서사만으로 가는 드라마가 아닌 탓에, 거의 모든 배우들과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엄청난 끈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 같다. 모든 드라마 감독이 배우와 그렇게 소통하는 것은 아니니까.
김원석 감독 : 작가님이 대본을 쓰시고, 내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로 촬영한 신은 없다. 대본에 책임을 져야한다면 결국 내가 져야한다. 또 기존에 작가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이렇게 저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에 관해서도 오래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그런 점을 현장에서 배우들과 이야기한다. ‘앞으로는 캐릭터가 이렇게 바뀌게 돼’라는 이야기들을 연출자가 해준다. 하지만 우리나라 드라마 환경상 연속극에서는 이런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초반 몇 회만 작가님과 작업을 하고, 그마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정 작가님과 ‘몬스타’ 때도 그러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듯, 충분히 사전에 이야기를 했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출자로서 가장 불행하다 여기는 일은 배우가 현장에서 작가와 전화로 소통하는 것이다. 작가 입장에서도 그런 배우들의 민원에 다 대응하다보면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즐기시는 작가님도 계실지 모르나 적어도 나와 함께 작업을 해온 작가님들은 고통스러워했다. 그렇게 배우와 소통하는 것은 연출자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현장에서 작가님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연기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 의도를 충분히 말 해두려고 했다.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안영이 역의 강소라는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왜 이런 대사를 해야 하는지 걱정하지 않고 찍은 첫 드라마’라고도 말하던데, 그만큼 우리나라 드라마 현실은 힘들다.
‘미생’ 방송 화면
Q. 원작과 다른 또 하나는 드라마에서는 주변부 인물들이 살아났다는 점이다.
김원석 감독 : 작가님의 공이 크다. 인물 개개인을 표현할 수 있는 대본이 우선인데, 그런 대본을 쓸 수 있는 작가님이 많지 않다. 원작자인 윤태호 선생 역시 그런 점을 즐겁게 바라봐주셨던 것 같다. 정말 감사했던 것이 본인 작품의 재해석을 흔쾌히 인정하고 즐거워해주셨다. 매회 방송을 모니터하시고 문자를 주셨다. 특히 장백기와 장그래가 함께 양팔을 파는 신을 재미있어 하셨고, 또 ‘비용상 문제로 타 부서 캐릭터를 많이 다루지 않았는데 드라마에서는 타부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좋다’라고도 하셨다. 끝날 때까지 열심히 모니터 해주셨던 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하게 작업했다.
Q. 배우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현장은 드물다. 특히 이번 포상휴가를 못가는 몇몇 배우는 실의에 빠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고(웃음).
김원석 감독 :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니 아주 작은 배역을 한 연기자 조차도 경건한 마음으로 현장에 오는 것이 느껴졌다. 급기야 정수영 씨나 오정세 씨 같은 훌륭한 연기자들이 오셔서 ‘저희가 혹시 작품에 누를 끼치진 않을까’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하시기도 했다. 또 스태프들도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더라. 고생만 시켰는데 고마울 뿐이다. 촬영이 즐겁긴 했지만, 마지막에 갈수록 잘 시간을 쪼개가며 작업해야했다. 종방연 때 ‘다음에는 꼭 12시에는 끝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마저도 일찍 마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많이 미안하다.
Q. 캐스팅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을 쏙쏙 뽑아낸 것만 같은 캐스팅이었다.
김원석 감독 : 주요배역 캐스팅은 거의 작가님이 하셨고, 이경영 씨와 임시완 씨는 이재문 PD의 공이 컸다. 이재문 PD가 그야말로 삼고초려해서 했다. 이성민 선배는 내가 워낙에 존경하는 분이라 내가 부탁드렸다. 그 외에는 골고루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박대리 역 최귀화 씨나 마부장 역 손종학 배우는 계속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영화 ‘일대일’을 보면서 찾게 됐다. 작가님도 동의해서 결정하게 됐다. 한석율 역 변요한, 강대리 역 오민석, 하대리 역 전석호 역시도 작가님의 의견이 컸다. 특히 전석호 씨는 스케줄로 거의 못할 상황이었는데 우연히 미팅을 하러 배우가 온 날 작가님과 내가 같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작가님과 보조 작가님이 강력하게 밀어붙여 하게 됐다.Q. 전작 ‘몬스타’ 속 배우들도 눈에 띈다. 특히 장백기 역 강하늘과 연이어 작업하게 됐다.
김원석 감독 : 하늘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늘이가 있어 장그래가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장백기도 돋보이게 됐다. 하늘이는 인품이 좋다.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또 박과장 역 김희원 선배는 이분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연기가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워낙에 원작의 팬이시더라. ‘진짜 잘 하고 싶다’라는 의지로 임하시던데, ‘몬스타’ 때는 즐기면서 편안하게 하셨다면 이번에는 긴장마저 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 ‘미생’ 김원석 감독, 요르단 에피소드를 넣었던 이유 (인터뷰①)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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