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영화가 있다. 그리고 배우의 영화가 있다. ‘나의 독재자’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 생각한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이 김일성이라 믿으면 사는 남자 김성근의 인생을 그린 ‘나의 독재자’는 배우의 연기를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영화다. 배우의 작은 손짓 하나마저도 캐릭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런 영화에서 배우가 관객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영화 자체가 흔들릴 게 자명하니까. 그런 김성근을 설경구가 연기했다. 근사하겠다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서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의 독재자’는 설경구가 왜 설경구인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다.

Q.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이 크게 없는 걸로 안다. 한 번 작업한 감독을 믿고 가는 편이라고. 하지만 ‘나의 독재자’ 같은 경우, 배우라면 한번쯤 욕심 낼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설경구:
욕심이 났다. 부모 자식에 관한 영화는 많은데 이 작품은 좀 특이했다. 일단 이 영화는 이해준 감독이 2007년도에 보도된 짤막한 신문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시작된 프로젝트다. 당시 김일성 대역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로 있었고, 그 배우가 남북정상회담 전에 시뮬레이션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 한국 현대사에 아버지와 아들을 대입시켜서 이야기를 풀고 나간 게 흥미로웠다. 대한민국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Q ‘박하사탕’에서 연기한 영호도 비극의 현대사 속에서 무너진 인물이었다.
설경구:
영호도 큰 사건을 겪으며 망가지긴 했지. 광주라는. 아무리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쳐도 돌아갈 수 없었던 인물. 김성근의 경우 평생 배우를 꿈꿨던 사람이다. 공연 오디션인줄 알고 갔는데, 도착한 곳이 알고 보니 고문실이야. 게다가 김일성 대역을 하래. 그것도 강제적으로. 분명 처음엔 ‘이게 뭐지?’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만다. 그 시대 안에서 맹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라 생각한다.Q. 어느 순간, 목표를 상실한 인간이기도 하다.
설경구: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후에도 김일성을 그렇게 붙잡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리니까. 사실 촬영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사람이 목표를 상실한 후 김일성 역에서 ‘못’ 빠져 나온 건지, ‘안’ 빠져 나온 건지에 대한 고민. 지금도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연기할 때는 ‘안’ 빠져 나온 거라고 생각하며 찍기는 했다.


Q. 연극무대 출신으로서 연극배우를 연기했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기도 하다. 극단 ‘한양레퍼토리’ 출신…
설경구:
(질문 빠르게 정정하며)아, 단원 생활은 극단 ‘학전’에서 했다. 대학(한양대) 졸업 후 ‘한양레퍼토리’에 들어가긴 했는데, 대학교 5학년 같아서 싫더라고.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줄 알았는데, 학교 선후배가 사회까지 이어지니까 싫었던 거다.

Q. 연기와 연출을 두고 고민할 때, 주위에서 연기에 소질이 있다며 부추긴 걸로 안다. 만약 그 때, 영화 속 성근처럼 연기를 못한다고 구박 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연기를 계속했을까.
설경구:
나라고 왜 구박이 없었겠나. 대학로 나와서 첫 공연을 했을 때 함께 작업했던 선배가 그랬다. “너는 연기는 아닌 것 같으니, 연출이나 스탭을 하라”고. 그래서 속으로 ‘XXX 마라!’ 하고는 ‘한양레퍼토리’를 나온 거다.(웃음) 아까 말했듯 졸업해서까지 학교의 그늘에 있는 게 싫기도 했고.Q.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있었나 보다.
설경구:
자신? 없었다. 다만 어린 마음에 그런 말이 듣기 싫었던 것 같다.(웃음) 그래서 선생님에게 “공무원 시험 치겠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나왔는데, 선생님은 아직도 그렇게 믿으시더라고. “저, 새끼는 공무원 한다고 나갔었어”라고. 하하하.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갈 곳이 없잖아. 집에 손 벌리기는 싫고. 그래서 극단 ‘학전’에 있는 선배에게 포스터라도 붙이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다음 날부터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 정도 했나? 포스터를 붙이다가 우연히 ‘지하철 1호선’에 캐스팅 되면서 무대에 다시 섰다.

Q. 원래 잘 저지르는 스타일인가.
설경구:
안 그러는데, 순간적으로 몇 번 그런 적이 있다. 그때 그랬고… 대학 다닐 때 집에 상의 한마디 안 하고, 휴학계를 내기도 했고… 하하.

Q. 김일성에 빠진 김성근처럼 당신 역시 김성근에 완전히 몰입했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설경구 연기는 ‘메소드’(극중 인물과 동일시를 통한 극사실주의적 연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스스로는 그 말을 부인한다고.
설경구:
메소드는 없다.
Q. ‘메소드는 없다’라. 그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설경구:
모든 연기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배역에는 결국 내가 있는 거다. 그런데 메소드는 100%다. 나를 지우고 어떤 인물에 100% 이입해야 하는 거다. 그랬을 때 내가 과연 그 인물에 100% 녹아들었다고 양심상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못한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경구는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평가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설경구:
글쎄. 내가 잘 속인 건가…아니야, 속인 건 아니고… 하하. 그 인물이 되려고 애를 쓰기는 한다. 그걸 그렇게 봐주신 게 아닌가 싶다.

Q. ‘메소드 연기’를 얘기할 때, 자주 호출되는 배우가 로버트 드니로다.
설경구:
글쎄. 내가 보기엔…. 아, 물론 너무나도 훌륭한 배우다.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데 그 안엔 결국 로버트 드니로가 보인다. 배우마다 가진 재료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에 표현 방식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결국 자기 자신이 배역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나는 완전한 메소드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끔 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해서 좋은 건 여러 인생을 살 수 있어서”라고 하는데, 살~기는! 그건 사는 게 아니다. 한 작품 들어가면 길어야 1년이다. 1년 연기했다고 해서, 산다고 하면 안 되지. 메소드는 미쳐야 한다. 다만, 그 누구야? 히…히스레저? 그 사람은 정말 메소드 같다. 자신을 놔 버렸거든. 거울을 보면 조커 얼굴이 보였다고 하니, 완전히 빠져 버린 거지. 나는 거기까지는 못한다. 물론 그 점을 향해 노력은 한다. 안될 걸 알면서도 가는 거다.Q. 연기에 대한 기준치가 높은 게 아닌가 싶다.(웃음) 그나저나 성근과 아들 태식(박해일)은 관계가 좋지 않은 부자다. 당신은 실제 아버님과 어떠한가.
설경구:
(질문하기 무섭게)아~주 안 좋습니다.(일동 웃음) 그런데 이번 영화 찍으면서는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관계개선이 됐다는 건 아니고. 하하하. 참, 나뿐 아니라 감독님도 해일이도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더라.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그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겪고 60-70년대 굵직굵직한 사회를 통과한 아버지들 말이다. 그 시대 아버지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항상 쪼들렸다. 애들 등록금 내기 급급했고, 인상 한 번 제대로 피지 못했다. 항상 돈,돈,돈,돈!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자식들은 ‘독재자’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참, 외로운 사람들이다. 모든 걸 가족들에게 다 줬는데, 돌아오는 건 그런 차가운 시선이었으니. 정신 차려 보면 쪼그라져 있고. 정작 엄마가 독재자가 돼 있어!(웃음) 진짜 실세는 엄마라니까. 나이가 들수록.


Q. 그런 것 같다. 그 시대의 아들들은 ‘독재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자신은 ‘독재자’가 안 되려고 하거나, 반대로…
설경구:
(말 바로 받아치며) 똑같이 되거나. 어느 쪽이냐고?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나.(일동 폭소) 내가 말 수가 많지 않다. 속정은 있는 것 같은데 표현은 잘 못한다. 참,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옛날 핸드폰이 없는 시대에 집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다가 아버지가 받으니까 ‘(깜짝 놀라며)우이씨’ 하면서 끊어버렸다더라. 자기도 모르게. 하하. 그땐 거의 그랬다

Q 출연한 영화들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나.
설경구:
당신이 가서 보신다.Q.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이실지 궁금하다. 설경구 하면 ‘공공의 적’의 강철중을 빼놓을 수 없다. 설경구 아닌 강철중은 아직 상상하기 힘든데 배우가 자신의 브랜드가 되는 캐릭터를 입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설경구:
‘공공의 적’은 나의 대표작 중 하나지. 몇 년 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공공의 적’ 후속편 촬영 때 나이트클럽 섭외를 갔는데, 주인이 “아~ 강철중” 하면서 빌려줬다고 하더라. 그 시리즈는 케이블 TV에서 많이 방영해서, 시골 어르신들도 다 안다. 그래서 영광이긴 한데, 그것이 또 굴레가 되기도 한다. 대표작이라는 것이 결국엔 어떤 기준이 돼 버리니까.

Q. 영화를 보면 “배우를 잡아먹는 배역이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런 배역을 만난 적, 있나.
설경구:
잡아먹혔다기보다 오래 남았던 역은 있다. ‘박하사탕’. 너무 오래 잔상에 남아서 힘들었다. 말했듯 대표작이 굴레가 되기도 한다. 2000년 1월 1일 ‘박하사탕’이 개봉하고, 그 해 11월 11일에 ‘은행나무침대2-단적비연수’가 개봉했다. 그때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박하사탕’ 때 어마어마한 찬사를 받았는데, ‘단적비연수’를 하고 나서는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Q. 캐릭터도 장르도 극과 극이긴 하다. ‘박하사탕’은 아직도 회자되는 영화다. 당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설경구:
‘박하사탕’이 부산국제영화제 4회 개막작이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다들 날 ‘소 닭 쳐다보듯’ 바라봤다. 내가 농담으로 2시간 10분 만에 사람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 후 날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면서 상영관을 빠져 나와 뒤풀이 장소에 갔는데 강제규 감독님, 안성기 선배님이 내 테이블에 계시는 게 아닌가. ‘이게 웬 떡이야’가 아니라,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그때 영화제에서 방을 열흘 잡아줬다. 밤마다 사람들이 나를 불러내는데, 처음에는 너무 좋았지. 맛있는 곳 가고, 그 유명한 배우들과 술 마시니까. 그런데 매일 새벽 5시까지 끌려 다녔으니 남아나겠나. 5-6일 되니까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는 형에게 “형, 내 방 써!” 하고는 8일 만에 도망갔다.(웃음)

Q. 인생을 바꾼 2시간 10분.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그 순간 기억나나.
설경구:
그땐 영화를 제대로 못 봤다. 못 보겠더라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모든 게 달라졌으니, 정말 영화 같은 경험이었다.

Q.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설경구:
그러니까. 그땐 인터넷 신문이 없고, 대부분의 신문이 지면이었다. 언론이 많지도 않았고. 서로 인터뷰를 하겠다고 요청을 해 왔는데, 그것도 참 재미있었다. 제일 처음 J일보에 내 인터뷰 기사가 반면 나왔다. 그 다음날 다른 신문에 4분의 3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른 신문엔 전면이 나왔다. 주위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신인에게 이렇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난리가 아니었다.

Q (웃음) ‘박하사탕’이 개봉한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그땐 설경구라는 배우의 연기에 대해 관객의 기대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반대지. 부담을 느끼나.
설경구:
그럼. 매번 부담이다. 그래서 매번 그만 두고 싶다. 이젠, 꺼낼 카드가 있나 싶기도 하다. 뭘 하든 똑같은 것 같아서 답답하고. 해가 갈수록 숙련되고 장인이 돼야 하는데 밑천이 떨어져 가는 느낌이다.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Q 박해일 씨와는 ‘호형호제’해야 하는 나이인데, 부자관계로 나왔다.(웃음)
설경구:
내가 해일이 나이를 방금 전에야 알았다. 77년생. 나랑 9살 차이 나더라고.

Q. 촬영 때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나? 당신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같다. 하긴,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나이 따지는 거, 별로긴 하다.
설경구:
하하하. 부자 관계를 연기했지만, 부담은 전혀 없었다. 술자리에서 해일이가 나에게 “아부지, 아부지” 하고 그랬다. 해일이에 대해서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해일이 자체가 약간 엉뚱하다고 해야 하나? ‘똘끼’ 혹은 의외성이 있는데, 그걸 종합하면 천진난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Q. 설경구에게도 그런 의외성이 있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설경구: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개또라이’ 같다고들 했으니까. 하하. 요새는 뭐. 그러지도 않아.

Q. 배우에게 적당한 ‘똘기’는 필요하지 않나.
설경구:
에이, 배우는 착실해야지. 하하하.

글. 정시우 siwoorain@tenais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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